소설리스트

그녀가 떠난 뒤에 남겨진 것 (43)화 (43/156)

#43

“통 얼굴 보기가 힘드네.”

로렌이 아쉬움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녀의 시선은 가게 앞에 진열된 꽃다발에 향해 있었다.

얼마 전 캐롤라인의 조언을 토대로 디자인한 것이었다.

“입원을 하시게 되어서요.”

에릭이 당근주스를 홀짝이며 말했다. 일이 끝난 후 돌아온 집이 너무도 휑해 1층으로 내려온 것이었다.

“몸이 더 안 좋아졌단 말이야?”

“그런 건 아니고……. 그냥 검사일 겁니다.”

사실 정확한 건 에릭도 알지 못했다. 스테파니가 사람을 시켜 전한 소식을 겨우 받았을 뿐이었다. 캐롤라인을 데려오겠다던 스테파니와 마샤는 그렇게 집을 나간 이후 아직까지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헌티드 백작에게 들키지 않으려면 별수 없나 보지.’

이제부턴 출근도 해야 하니.

아예 일을 그만둔 마샤와는 달리 스테파니에겐 아직 직장이 있었다. 찻집 사장이 스테파니의 솜씨를 무척 마음에 들어 해 그녀가 찻집을 그만두는 걸 극구 만류했기 때문이었다.

사장은 그녀에게 짧은 휴가를 주는 대신 다시 가게로 돌아올 것을 부탁했다.

차도 잘 끓이고 일머리도 좋고, 게다가 힘도 센 스테파니는 꽤나 고급 인력인 모양이었다.

그때 문이 벌컥 열리더니 익숙한 얼굴의 여인이 들어왔다.

“에릭!”

스테파니였다. 스카프로 머리를 칭칭 감은 탓에 스테파니임을 알아보는 데 시간이 조금 걸렸다.

“왜 그러고 오는 겁니까?”

“눈에 띌까 봐요!”

그게 더 수상해 보인다는 말은 차마 할 수 없어서 에릭은 입을 다물었다.

“스테파니, 캐롤라인은 괜찮은 거예요?”

“듣자 하니 또 쓰러졌다던데. 심각한 건 아니겠지?”

로렌과 아크만이 스테파니에게 달라붙어 질문을 쏟아부었다.

스테파니는 문에 붙어 바깥을 살피면서도 부부의 질문에 착실하게 대답을 했다.

위치가 들통난 것도 모자라 꽃집 주변에 감시가 붙은 게 일주일째라는 것은 정작 알지 못했다.

* * *

도시의 전경이 한눈에 들여다보이는 고층 객실.

프레져는 의자에 앉은 채 알프레도의 보고를 듣고 있었다.

이곳은 노르티움에서 가장 좋은 호텔의 스위트룸이었다. 어마어마한 넓이와 숙박료를 자랑하는 스위트룸을 프레져는 몇 주째 제 전용 객실로 이용하고 있었다.

스위트룸 안에만 몇 개의 방이 있었고 프레져는 책상과 의자가 있는 방에서 업무를 소화했다. 오늘 알프레도의 보고 역시 이 방에서 이루어졌다.

“이틀 전에 있었던 센그릭에서의 공연 역시 성공적으로 끝났다고 합니다.”

알프레도가 프레져에게 보고서를 건네며 말했다. 보고서 첫 장에는 중부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신문인 넥타 사의 신문이 스크랩되어 있었다.

“이건 센그릭에서 발행한 어제 일자 신문입니다. 뒷장에 있는 건 로겐 님이 보내신 서신입니다.”

급하게 보낸답시고 전서구를 이용한 탓에 종이가 보기 싫게 구겨져 있었다.

이번 기사에서는 공연에 대한 찬사를 찾아볼 수 없었다. 대신 공연을 관람하러 온 2왕자 제럴드에 대한 글이 아주 길게 쓰여 있었다. 사진 역시 제럴드가 오페라 극장 앞에 서 있는 것 한 장만이 실려 있었다.

비평가들의 관람평이 있어야 할 곳은 제럴드와 고위 귀족들의 관람 후기로 채워졌다.

프레져는 신문을 흥미 없는 눈으로 훑다가 입을 열었다.

“넥타 사가 왕실과 우호적인 관계였나?”

“세 달 전 리스터 백작이 국장 자리에 앉았다고 합니다.”

“역시.”

리스터 백작은 국왕 로널드 험프리의 사촌 동생이었다. 그는 제럴드에게 줄을 댄 귀족 중 한 명이기도 했다.

프레져는 조소를 지으며 보고서의 다음 장을 넘겼다. 스크랩된 신문 뒤엔 로겐이 보낸 보고서 형태의 서신이 있었다. 이를 읽은 프레져의 눈이 점점 싸늘해져 갔다.

“연회까지 열다니.”

프레져가 픽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러나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연회를 열 거면 적어도 일주일 전에는 고지하는 것이 왕국의 예의였다.

그러나 제럴드는 예의 따윈 옆집 개한테나 줘 버렸는지, 이를 당일에 통보하는 비상식적인 행동을 저질렀다.

무엇보다 헌티드하우스의 주인은 프레져였다. 단원들 개개인이라면 상관없지만 ‘헌티드하우스의 단원’이라는 이름으로 이들을 초대하려면 대표인 프레져의 허락이 필요했다. 그러나 제럴드는 이를 깡그리 무시했다.

게다가 관계자 외엔 출입 금지인 구역까지 들어와 제 방처럼 휘젓고 다니기까지 했다고.

로겐이 보낸 서신엔 우는소리가 가득했다.

“까마귀도 아니고. 반짝거리는 거라면 정신을 못 차리고 달려드는군.”

프레져는 화려한 보석을 주렁주렁 매단 제럴드의 사진을 보며 말했다. 어떻게든 제 존재를 과시하고 싶어 안달이 난 제럴드가 우습기 짝이 없었다.

1왕자 데본은 일찍이 정계에서 물러나겠다는 뜻을 밝혔으니 왕실의 후계를 이을 이는 사실상 제럴드가 유일했다.

그러나 국왕은 두 아들이 장성한 지금까지도 왕세자 책봉을 미루고 있었다. 머리도, 혈통도, 제럴드는 데본에 비해 무엇 하나 나은 것이 없기 때문이었다.

“마음이 급하니 연회를 열었겠지.”

얼굴을 비춰 인지도를 높이고 귀족들의 지지를 받아야 할 테니까. 기사까지 난다면 자신의 존재를 평민들에게도 각인시킬 수 있을 터였다.

제럴드가 안젤라의 꽁무니를 따라다니는 이유 역시 이와 어느 정도 통하는 부분이 있었다.

안젤라는 대륙을 통틀어 최고의 인지도를 가진 가수였다. 게다가 혈통으론 모자랄 게 없는 레제브 후작가의 사람이기도 했다. 그녀와 혼인하면 제럴드를 꼬리표처럼 따라다니는 말들이 사라질 것이었다.

“그래도 이건 좀 아니지 않습니까? 대표님이 안 계시는 곳에서 주인 행세라니요. 게다가 웨즐 부인의 병환이 깊은 걸 아시면서…….”

알프레도가 눈썹을 늘어뜨린 채 탄식했다.

“설치는 이유야 뻔하지.”

프레져 헌티드를 자극하기 위해.

제럴드는 과거 안젤라와 빈번하게 열애설이 났던 프레져를 엄청나게 의식했다. 열애설이 사실이 아니라 공표된 이후에도 프레져를 향한 그의 적개심은 사그라들 줄 몰랐다.

게다가 프레져는 제럴드가 가지지 못한 고귀한 혈통과 교양을 함양한 사내였다.

무려 왕실도 프레져의 눈치를 볼 때가 있었다. 제럴드는 자신을 오만한 눈으로 보며 무시하는 프레져를 마음에 들지 않아 했다.

무엇보다 두 사람이 척을 지게 된 계기는 따로 있었다. 때는 바야흐로 프레져와 캐롤라인의 혼담이 오갈 때였다.

평소 프레져에게 앙심을 품고 있던 제럴드는 캐롤라인과의 결혼을 그의 약점으로 몰았다. 그렇게 고고한 척하더니 결국 구두장이의 딸과 결혼을 하다니!

제럴드는 가죽을 무두질하는 게 얼마나 천박한 일인지를 시작으로, 자신 덕에 웨즐 가는 귀족이 되었으니 평생 자신에게 감사하고 살라는 망언을 뱉었다.

프레져는 단 한 글자로 모든 것을 귀결시켰다.

‘네.’

여태껏 제럴드의 도발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던 프레져였다.

제럴드는 그런 그를 자극하기 위해 몇 달간 침을 튀겨 가며 떠들었다.

그러나 프레져의 반응은 저 한 번이 전부였다. 아니, 반응이라고 할 것도 없었다.

제럴드의 말 따위 처음부터 듣지 않고 있던 것처럼. 자존심에 큰 흠집이 난 그는 더욱 눈이 돌아갔다.

“내가 없는 지금이 기회다 싶었겠지.”

평소였다면 쓸데없는 짓을 한다 무시했겠지만 지금 프레져는 안젤라와 대치중이었다. 그녀가 제럴드와 손잡고 무슨 일을 벌일지 알 수 없었다.

“지금 단원들 사이의 불화도 문제라…….”

“후우.”

프레져는 짜증 서린 한숨을 뱉으며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캐롤라인 하나만으로도 정신없이 바쁜데. 단원들에 왕자까지 문제를 일으키다니.

두통으로 머리가 지끈거렸다.

“여기 있습니다.”

눈치 빠른 알프레도는 얼른 프레져에게 두통약을 대령했다. 약을 씹어 삼키자 혓바닥 가득 쓴맛이 퍼졌다. 문득 병원에서 풍기던 싸한 소독약 냄새가 떠올랐다. 평소보다 부은 듯한 캐롤라인의 얼굴도.

“보고 마쳤나?”

“예? 아, 네.”

“그럼 자넨 나가 봐. 그리고 빌에게 들어오라 전해.”

이윽고 알프레도가 나가고 빌이 안으로 들어왔다.

“에릭 포스터는?”

프레져의 질문에 빌이 재킷 안주머니에서 반듯하게 접은 종이를 꺼내 내밀었다. 에릭의 일주일간의 행적이 짧게 요약되어 있었다. 그들이 아무리 몸을 사린다 하더라도 캐롤라인을 붙잡아 둔 이상 프레져의 손바닥 안이었다.

“노르티움 외곽에 있는 인쇄소에서 일하고 있더군요. 새벽에 출근해서 점심쯤 돌아오는 것 같았습니다.”

“특이한 점은 없었나?”

“네. 출퇴근할 때를 제외하곤 집 밖으로 나오지를 않더군요. 따로 만나는 사람도 없고요. 아, 건물 1층에 사는 노부부와 친하게 지내는 모습이 몇 번 목격되었습니다.”

“그런 것 말고.”

“오늘 스테파니 아든이 집으로 돌아가긴 했습니다만…….”

빌은 눈을 크게 뜬 채 다음에 나올 말을 기다렸다. 그러나 프레져에게서 추가적인 설명은 없었다.

“어떤 건지 구체적으로 말씀을 해 주셔야…….”

이에 빌은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헌티드 백작이 말이 없는 편이라는 건 휴고에게 들어 알고 있었지만, 부하에게 독심술까지 시킨다는 말은 들어 본 적 없었다.

“그렇게 말하는 걸 보니 특이점은 없었나 보군. 됐다.”

프레져가 한숨 같은 말투로 대답했다. 넥타이를 잡아당기는 손이 신경질적이었다. 제 입으로 캐롤라인과 에릭의 불륜 흔적을 잡아 오라 말할 수 없었다.

“캐롤라인 쪽은 어떻지?”

“그쪽도 별다른 움직임은 없습니다. 계속 병원에만 계셔서요.”

프레져의 기다란 검지가 테이블 위를 톡톡 두드렸다. 이쯤 되니 캐롤라인과 에릭이 자신이 생각한 사이가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가장 이상한 점은 넷이서 손바닥만 한 집에 함께 산다는 것이었다. 사랑에 눈이 먼 연인이 뭐 하러 다른 사람을 두 명이나 더 끼워 살겠는가.

무엇보다 주위 사람들의 목격담이 특이했다. 그들은 캐롤라인과 에릭이 한집에 살고 있다는 것도 모르는 눈치였다. 캐롤라인과 함께 외출하는 것은 주로 마샤와 스테파니였기 때문이었다. 다정하게 데이트를 했다는 증언조차 없었다.

무엇보다, 캐롤라인에게서는 에릭을 향한 애정을 찾아볼 수 없었다.

사랑에 빠진 보랏빛 눈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은 프레져 자신이라고 자부할 수 있었다. 그런데 에릭에 대해 말하는 그녀의 눈은 뜨거워 보이지도, 애틋해 보이지도 않았다.

오히려,

‘……서러워 보였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