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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떠난 뒤에 남겨진 것 (42)화 (42/156)

#42

세 번째 공연이 열리는 도시인 센그릭은 왕국 중부에 위치한 곳이었으나 왕성과 가까웠다. 글랜포드의 왕성은 수도의 가장 남쪽에 자리를 틀고 있기 때문이었다.

왕성 아래로는 레닐 강에서 흘러나온 물로 만든 호수인 셀리타 호가 있었고 이 물줄기를 따라 동남쪽으로 가면 센그릭이 나왔다.

예로부터 문명은 강과 함께 발전했다. 그런 의미에서 셀리타 호와 왕성을 끼고 있는 센그릭은 수도 못지않은 부유한 도시로 성장했다.

중부에 영지를 둔 귀족들은 센그릭에 타운하우스를 짓고 살았고, 왕족들 역시 센그릭에서 여가 시간을 보냈다.

국왕 로널드 험프리의 둘째 아들이자 글랜포드의 2왕자인 제럴드 험프리가 중부 공연에 참석한 것은 당연한 일이라는 뜻이었다.

“평론가들의 평이 아주 후하던데.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하하, 기대에 부응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제럴드를 향해 고개 숙이는 로겐의 입꼬리가 파들파들 떨렸다. 그의 맞은편에는 제럴드와 함께 귀족 몇 명이 앉아 있었다. 대표를 만나겠다며 굳이 극장 안까지 들어온 것이었다.

“오랜만에 헌티드 백작을 만나고 싶은데. 아쉽게 됐군요.”

“대표님께서는 웨즐 부인의 치료를 위해….”

“아, 그 소식은 신문에서 봤습니다. 눈이 멀었다고요.”

“…네.”

“하기야, 평생을 가죽이나 꿰며 살았는데 눈이 안 머는 게 이상하지요. 작위도 받았겠다, 편히 쉬며 살지. 왜 고생을 자처해 몸을 망치는지.”

“…….”

비아냥거리는 목소리에 로겐의 입이 다물렸다. 제럴드의 본새 없는 말투와 되먹지 못한 성격은 귀족들 사이에서 이미 유명했다. 이런 그의 성정은 프레져를 상대할 때 유독 지독해지는 경향이 있었다.

“내가 그렇게 살라고 아버님께 작위 수여를 요청한 게 아니란 말입니다.”

웨즐 남작가는 반동분자를 제압하는 데 도움을 준 공과 제럴드의 발을 노린 적군의 총탄을 튕겨 낸, 위대한 구두를 만들었다는 공으로 작위를 수여받았다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이건 어디까지나 대외적인 명분일 뿐이었다.

국왕이 반동분자라 명명한 이들은 이웃 나라인 록킹덤에서 넘어온 지식인으로 주먹싸움 한번 해 본 적 없는 샌님들이었으니.

록킹덤의 국왕을 끌어내리고 혁명을 일으키려 했던 지식인 일부는 계획이 실패하자 글랜포드 남부로 숨어들었다. 왕의 보복을 피하기 위함이었다.

그들은 몰래 야학을 설립해 글랜포드의 평민들에게 계몽의 필요성을 가르쳤고, 이를 알게 된 글랜포드의 국왕은 매우 분개했다. 국왕의 심기를 거스른 이상 반역이었다.

왕의 사생아였던 제럴드는 왕실 내 위치를 확고히 하기 위해 자청해서 남부로 향했고 이 과정에서 당시 평민이었던 웨즐 남작 부부에게 군화 지원을 받았다.

부부의 특별한 방법으로 제작한 군화가 마음에 들었던 제럴드는 이 기술을 빼앗을 궁리를 했다. 그 끝에 내린 것이 작위였다.

신분을 주고 기술을 뺏는 것. 이는 귀족들 중 알 만한 사람이라면 다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귀족이 되어서도 평민 때의 버릇을 못 고치니. 이래서 작위는 아무한테나 주는 게 아닌가 봅니다.”

“보석의 귀함은 보석을 가져 본 자만이 알아보는 것이죠.”

“이래서 평민과 귀족 사이의 구분을 명확히 해 둔 건데, 쯧. 젠트리들은 뭣도 모르고 설쳐 대니.”

제럴드 옆에 있던 귀족들이 한마디씩 거들었다. 이에 제럴드의 어깨가 으쓱 올라갔다.

‘여전히 생각을 깊게 하진 못하시는군.’

로겐은 그런 제럴드를 보며 어색하게 따라 웃었다.

제럴드의 어미는 평민으로, 수도 시찰을 나온 국왕의 눈에 띄어 제럴드를 갖게 되었다. 축첩 제도가 허용되지 않는 나라에서 제럴드의 존재는 부정한 것과 다름없단 소리였다.

그런 주제에 출신을 운운하는 꼴이라니. 으스대는 왕자도, 그 옆에 붙어 있는 귀족들도 우습기 짝이 없었다.

“흠,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군. 공연 준비로 바쁠 텐데 내가 너무 오래 붙잡고 있었군요.”

“아닙니다.”

알면 제발 나가 주라.

로겐은 그리 외치고 싶은 것을 참으며 사무적인 웃음을 지었다.

그대로 나갈 줄 알았던 제럴드는 문 앞에 대기하고 있는 시종에게 무어라 명을 내렸다. 그러자 접객실 안으로 커다란 꽃바구니 하나가 들어왔다.

제럴드는 큼큼거리며 헛기침을 몇 번 한 뒤 눈이 휘둥그레진 로겐을 향해 입을 열었다.

“안젤라 골드 양에게 전해 주십시오.”

* * *

“흐음.”

안젤라는 분장실 화장대 위에 올려진 꽃바구니를 무감한 눈으로 쳐다봤다. 그러나 속눈썹을 살짝 내린 모습마저 남들 눈엔 도도해 보일 뿐이었다.

“어머, 왕실의 정원에서만 피는 장미네요? 아름다워라.”

“한 송이 가져갈래요?”

“네, 네?”

꽃 한 송이를 슥 뽑아 내미는 안젤라에 미용사의 얼굴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왕자가 보낸 선물을 함부로 받을 수도 없거니와, 이 귀한 것을 비둘기 모이 주듯 내미는 안젤라에 적잖이 놀랐기 때문이었다.

“싫음 말고요.”

불편한 기색을 읽은 안젤라가 내밀었던 손을 거뒀다. 관심이 없다는 걸 몇 번이나 표현했건만, 제럴드의 구애는 끝날 줄을 몰랐다.

정식적인 교제를 요청하는 것도 아니고. 뭐라 할 수도 없게 소극적으로 찝쩍대니 안젤라로선 그만하라 거절할 수도 없었다. 왕의 사생아이긴 하나 어찌 됐든 그는 왕실의 핏줄이니.

“더불어 오늘 밤에 단원들을 위해 연회를 여신다고 하셨습니다. 꼭 참석해 달라 하셨습니다.”

“공연이 끝난 후에요?”

장장 두 시간의 공연 동안 안젤라는 연기를 하고 노래를 불러야 했다. 두꺼운 화장과 조이는 옷을 입은 채 뜨거운 조명을 받는 일은 많은 체력을 요구했다. 집에 가서 쉬어도 모자랄 판에 연회에 오라니. 배려 없는 처사가 아닌가.

“못 간다고 전해요. 태평하게 술이나 먹을 분위기도 아니고요.”

지금 극단의 분위기는 매우 좋지 않았다. 이디나 웨즐의 지병이 악화됐다는 소식 때문이었다. 대표가 공연을 이탈할 정도면 꽤나 심각하다는 뜻이었고, 이는 한가하게 파티나 즐길 상황이 아니라는 뜻과도 같았다.

그런데 신문에 대서특필된 소식을 보고도 굳이 연회를 연다니. 이는 프레져에 대한 노골적인 악의가 보이는 행동이었다. 이 상황에 안젤라가 연회에 참여한다면 프레져와의 불화설이 더욱 확산될 것이 분명했다.

“꼭 가야 해요? 불편한데…….”

단원들 역시 불편함을 표했다. 심란할 대표를 두고 노닥거리며 놀고 싶지 않아서였다.

반면 기회를 놓칠세라 눈을 반짝이는 이들도 있었다. 로잘린을 비롯한 몇몇 귀족 단원들이었다.

“다른 분도 아닌 왕자 전하께서 여시는 연회잖아요. 거절할 수가 있나요.”

평소에도 프레져에게 불만을 품은 단원들이었다.

그들은 제럴드가 프레져보다 윗사람이라는 이유로 마지못하는 척 입을 열었다. 어떻게든 친왕파 귀족들과 어울리고 싶어 안달이 난 눈치였다.

그러나 평민 출신 단원들은 아니었다.

애초에 평민들에게 연회는 흔한 개념이 아니었다. 그들의 연회는 중요한 공연을 마칠 때면 가끔 여는 뒤풀이가 전부였다. 그런데 귀족들이 득실거리는 연회도 모자라 왕자가 있는 자리에 참여하라니. 혹여 실수를 할까 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평민이면서 감히 왕자 전하의 명을 거절하려는 거예요?”

“명이 아니라 청이에요. 그리고 전하께선 피곤하면 쉬어도 된다 하셨어요.”

“다들 이런 귀한 자리에 참여해 본 경험이 없어서 모르나 본데, 이럴 땐 그냥 조용히 감사합니다, 하고 가는 거예요. 알겠어요?”

하대하듯 업신여기는 로잘린의 태도에 단원들의 표정이 싸늘해졌다.

최근 들어 좋지 않던 극단 분위기는 프레져가 자리를 비우면서 극에 달했다.

“로잘린, 내가 말 그따위로 하지 말라고 했죠?”

릴리가 플룻 끝으로 로잘린을 삿대질하며 말했다. 그 과격한 행동에 로잘린이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악기 내려놓고 말해요. 어떻게 교양도 없이….”

“교양은 내가 아니라 로잘린이 먼저 챙겨야죠. 대표님께 안 좋은 일이 생겼는데 지금 허허거리고 파티나 즐기고 있을 때에요?”

점점 언성이 커졌다. 휴고와 로겐이 중재에 나섰지만 어느새 두 개의 패거리로 나뉘어 버린 집단을 하나로 뭉칠 수는 없었다.

‘내가 없는 동안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람.’

휴고는 릴리가 휘두르는 플롯을 빼앗아 든 채 한숨을 내쉬었다.

단체 생활에서의 불화는 피할 수 없는 일이었으나 이번처럼 다툼이 장기적으로 이어진 적은 없었다.

프레져의 감시에 가까운 관리 때문이기도 했지만, 단원들 스스로가 다툼을 지양했다.

헌티드하우스에 모인 이들은 자신의 역할을 끔찍이도 사랑하는, 프로 중의 프로였으니.

그러나 요즘 단원들은 아니었다. 마치 싸움만을 기다리는 투견처럼 의견이 맞지 않는 일이 생기면 족족 맞부딪쳤다.

프레져와 안젤라의 불화설 이후 생긴 변화였다.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생각인가요?”

종달새가 지저귀는 듯한 맑은 음성이 단원들 사이를 파고들었다. 안젤라의 목소리였다.

“어때 보일진 모르겠지만, 제 가체가 상당히 무겁거든요.”

그녀는 제 머리에 얹어진 거대한 가체를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싸움 구경이나 하자고 분장을 받은 게 아닌데. 이러다간 공연을 올리기도 전에 목이 꺾이지 않을까 싶네요.”

경쾌한 웃음소리였으나 단원들 중 그 누구도 안젤라를 따라 웃지 못했다.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 중 가장 불편한 차림을 한 건 안젤라라는 것을 뒤늦게 상기했기 때문이다.

“자, 그럼 다들 자기 자리로 돌아가세요. 이번 리허설이 마지막인 거 아시죠? 이후엔 바로 본 공연 시작이에요.”

침묵을 틈타 로겐이 박수를 치며 분위기를 환기하기 시작했다. 로겐의 말에 단원들은 불편한 표정으로 대기실에서 나갔다.

“감사합니다, 안젤라 양.”

휴고가 안젤라를 향해 감사를 표했다. 안젤라는 이 불화의 시작점이 자신이라는 사실에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인사는 됐으니 가서 리허설이나 시작하죠.”

그렇게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최종 리허설이 시작되었다. 이번 공연을 성공적으로 끝마칠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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