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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떠난 뒤에 남겨진 것 (41)화 (41/156)

#41

사실 다른 속셈이라 할 것은 없었다. 지금은 그저 캐롤라인을 제 옆으로 불러오는 것이 목표였다. 그녀의 부재가 장기화되면 지금껏 프레져가 쌓아 올린 것들에 흠이 생길 테니.

캐롤라인이 감추고 있는 것도, 그녀의 처벌에 관한 건도, 에릭 포스터의 행방도, 모든 걸 제자리로 돌려놓은 뒤에 처리해도 늦지 않았다.

“캐롤라인, 나는 완벽한 헌티드를 원해.”

프레져는 캐롤라인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비 내리는 극장 앞에서 그랬던 것처럼.

“완벽한 백작 부부를 보여 주기 위해선 당신이 필요하고. 알잖아?”

“도대체 그 완벽한 헌티드라는 게 뭔데요?”

캐롤라인이 지긋지긋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게 그렇게 중요해요? 목숨을 바쳐 지킬 정도로?”

그 목숨은 프레져의 것을 가리키는 게 아니었다. 당연히 캐롤라인의 것을 뜻했다. 어쩌면 저 까다로운 남자에게 맞추느라 제 생명이 소모되어 버린 것은 아닐까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캐롤라인의 평화로웠던 삶은 ‘완벽한’이라는 단어 앞에서 무너져 내렸다.

“그래.”

“…….”

한때는 그가 불쌍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었다.

명예에 대한 집착과 병적인 결벽. 그것은 제가 병상에 누워 있는 꼴을 봐도 달라지지 않았다.

캐롤라인은 백작저를 벗어나서도 헌티드에게 발목을 잡혀야 한다는 것이 끔찍할 뿐이었다.

“그러니 내 손을 잡아.”

프레져가 손을 다시 한번 추어올렸다. 그녀를 재촉하기 위함이었다.

이 손만 잡으면 쉽게 어머니 이디나를 볼 수 있을 터였다. 그리고 프레져가 그렇게 목을 매 마지않는 품위도 지켜 줄 수 있겠지.

하지만 그렇게 하고 싶진 않았다. 동물원에 갇힌 짐승처럼 평생을 바깥만 그리워하는 삶은 끔찍했다.

‘무엇보다 더 이상 치료를 받을 수 없어.’

양질의 치료는 물론, 임상 실험도 받을 수 없게 된다.

거기까지 생각을 마치자 절로 단호한 목소리가 나왔다.

“아니요. 수도론 안 가요.”

“끝까지 고집을 부리는군.”

“이건 고집이 아니에요.”

고민 끝에 나온 대답은 같았다. 그러나 이전과는 다른 묘수가 머릿속에 있었다.

“어머니를 이곳, 노르티움으로 모실 거예요.”

노르티움은 명실상부 왕국 최고의 종합 병원이었다. 이곳에 오면 이디나 역시 자신처럼 상향된 치료를 받을 수 있을 터였다.

“여기엔 임상 실험이 있으니까요.”

그러나 캐롤라인의 설명을 들은 프레져는 미간을 찌푸렸다.

“망가진 신체를 되돌리는 의술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어.”

“눈을 원래대로 만들겠다는 말이 아니에요. 더 악화되지 않도록 막으려는 거지.”

눈과 관련한 실험이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포기할 수는 없었다.

캐롤라인은 안과 의사에게 개인적으로 부탁을 해서라도 이디나를 치료받게 만들 생각이었다.

캐롤라인 역시 이곳에서 고통을 한 꺼풀 덜어 내는 데 성공했으니, 어쩌면 이디나도 실명되는 시기를 늦출 수 있을지 몰랐다.

나름 설득력 있는 주장에 프레져가 손으로 턱을 문질렀다. 평소였다면 그녀가 어째서 임상 실험에 대해 그리 자세히 알고 있는지 의문을 품었겠지만 지금은 그런 생각을 할 여유가 없었다. 그의 관심사는 오로지 캐롤라인을 제 곁으로 데려오는 것뿐이었으니.

“이미 수도로 올라오고 계셔.”

“중간에 노선을 바꾸면 되잖아요. 수도에 들른 다음에 이동해도 되고요. 방법은 많아요.”

앞이 보이지 않는 이디나에게 배를 타거나 기차를 타는 것은 어려울 터였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두려운 건 기다려 주지 않는 시간이었다.

“더 늦기 전에 치료받으면 달라질지도 몰라요.”

자신은 이미 늦었지만 이디나는 다를 수도 있었다. 그러니 그녀를 무조건 노르티움으로 데려와야 했다.

“당신이 안 된다고 하면 내가 그렇게 만들 거예요.”

단호한 말에 프레져의 눈썹이 움찔거렸다.

“대체 뭘 믿고 그렇게 말하는 거지?”

“난 이제 무서울 게 없거든요.”

믿는 구석이라도 따로 있는 것처럼 당당한 태도에 프레져의 한쪽 눈썹이 움찔거렸다. 요즘의 캐롤라인은 전혀 다른 사람처럼 돌변하는 일이 잦아 낯설었다.

물론 그녀에게 있어 죽음보다 무서운 건 없다는 것을 프레져가 알 리 만무했다.

“거부한다면 나도 가만있지 않을 거예요. 당신은 내 어머니가 치료받을 수 있는 기회를 강제로 박탈해 가는 거니까.”

캐롤라인은 완강했다.

프레져는 그녀의 눈에서 적개심이 타오르는 듯한 환각을 보았다.

“내 가족은 내가 꼭 지킬 거예요.”

“…….”

또 그놈의 가족.

당신이 온 힘을 다해 지키고자 하는 그 가족이라는 게 무엇일까.

프레져는 도통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캐롤라인의 가족에는 왜 자신이 포함될 수 없는지도…….

“일단은.”

허락은 세 음절로 떨어졌다. 의외로 순순히 나온 대답에 캐롤라인의 얼굴이 조금 멍해졌다.

사람을 몰아붙일 기세로 말을 뱉을 땐 언제고. 이제 와 저런 표정을 짓는 저 여자의 속을 도통 알 수가 없었다.

“말을 전해 두도록 하지. 노르티움으로 머리를 돌리라고.”

지금이 아니어도 캐롤라인을 데려갈 기회는 많았다. 이렇게 날이 서 있는 그녀를 강제로 데려간다면 조용히 지낼 수 없을 것 같았다.

귀족들 앞에서 아무 일 없던 것처럼 웃고 살아야 하는데, 캐롤라인이 협조해 주지 않으면 의미가 없지 않은가.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한발 물러나야 했다. 그녀를 옥죄는 건 나중에 해도 늦지 않았다.

“아, 그리고.”

프레져는 잊고 있던 걸 떠올린 듯 말을 덧붙였다.

“편한 대로 생각하고 오해하라고 했지.”

처음부터 이 말이 목적이었다는 걸 숨기려는 사람처럼.

“그 말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데.”

“말했잖아요. 일일이 설명하는 것도 입 아프다고.”

캐롤라인의 냉소적인 대답에 프레져의 눈썹이 씰룩였다.

“뭐가 그리 억울한지 들어 주겠다는데도 침묵하는 건가?”

마치 선심을 쓰는 듯한 태도. 어디 한번 들어 보겠다며 턱을 치켜올리는 모습에 캐롤라인은 이골이 났다.

“당신이랑은 이제 상관없는 일에요. 알려 주고 싶지도 않고요.”

“…….”

“그러니까 용건 끝났으면 나가요. 머리 아프니까.”

캐롤라인이 눈을 질끈 감으며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커다란 쇠막대기로 관자놀이를 때리는 듯한 두통이 이어졌다. 심장이 쿵쿵거리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그러나 고통에 떠는 캐롤라인의 모습은 프레져에겐 다르게 보였다. 그저 자신과의 대화를 끝내고 싶어 엄살을 피우는 모습으로 보일 뿐이었다.

“본인이 싫다는데 내가 굳이 알려 할 필요는 없지.”

프레져는 부르르 몸을 떠는 캐롤라인을 향해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그러곤 동굴처럼 음산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넌덜머리가 난다 해도 어쩔 수 없어. 당신은 절대 나를 못 벗어나.”

그게 마지막이었다.

프레져는 저주에 가까운 말을 남기고 병실을 빠져나갔다.

드르륵, 탁.

미닫이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프레져가 나간 걸 확인한 캐롤라인의 몸이 스르륵 풀렸다.

“하…….”

그녀는 흐물흐물해진 몸을 침대 헤드에 기댔다. 당당하게 굴긴 했지만 프레져가 호락호락하게 나오지 않으면 어떡하나 걱정되어 몸에 긴장이 들어갔다.

되판 땅이나 건물을 내놓으라고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준 걸 도로 빼앗는 성격은 아니었지만 제게 보였던 분노를 가늠해 본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꼼짝없이 치료비를 뺏기게 될 거라 생각했는데. 넘어갈 수 있어 다행이었다.

프레져가 나중에 다른 걸 요구할지도 몰랐지만 그건 미래의 일이었다. 그녀가 죽은 후,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때 일어날 일.

“다행이다…….”

캐롤라인은 두근대는 심장 위에 손을 올렸다. 긴장이 풀리자 찾아온 것은 묘한 희열이었다.

“그래. 할 수 있잖아.”

위축되지 않고 말할 수 있잖아. 괜찮다는 말이 아닌, 제대로 내 의사를 전할 수 있잖아.

그렇게 생각하자 왠지 모르게 목이 멨다.

* * *

병실에서 나온 프레져는 곧장 병동 1층으로 향했다. 1층에는 수납과 함께 각종 사무 일을 처리하는 창구가 있었다.

“4층 5호실에 입원 중인 캐롤라인 헌티드 환자의 진료기록을 보려 합니다.”

평소였다면 아랫사람을 시켰겠지만, 환자의 건강은 보호자 외엔 확인이 불가했기에 직접 내려온 것이었다.

“환자분과의 관계가 어떻게 되실까요?”

“보호자입니다만.”

프레져의 신원을 확인한 남자 직원은 선반 한 켠에 수북하게 쌓인 종이 더미를 뒤졌다. 이를 본 옆자리 여자 직원이 슬쩍 고개를 들이밀었다.

“어떤 거 찾아요?”

“캐롤라인 헌티드 환자분 진료 기록이요.”

캐롤라인의 이름이 나오자 여직원의 얼굴이 오묘해졌다.

“그 환자분 진료기록은 본인 외엔 열람 불가예요. 안 그래도 조금 전에 헤이오스 선생님께서 다시 한번 당부하고 가셨는데.”

“네?”

예상치 못한 대답에 프레져의 목소리가 조금 올라갔다. 게다가 클리브 헤이오스의 이름까지 나오다니. 아무래도 프레져가 찾아올 것을 예상하고 언질을 주고 간 모양이었다.

“캐롤라인 헌티드 환자분의 기록은 처음 저희 병원에 오실 때부터 공개 금지였습니다. ‘의료 기록 열람 보호제’를 신청하셨거든요…….”

프레져의 굳은 얼굴을 본 여직원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난처해 보이는 건 옆에 앉은 남직원도 마찬가지였다.

왕국에는 ‘의료 기록 열람 보호제’라는 제도가 존재했다. 환자가 이 제도를 신청하면 본인 외에는 의료 기록을 열람할 수 없었다.

이는 환자의 직계 가족에게도 적용되는 것으로, 환자가 사전에 지정한 보호자를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의료 기록에 접근이 불가했다.

물론 환자가 스스로 결정을 내릴 수 없는 의식 불명 상태라면 어쩔 수 없겠지만.

이 제도는 건강 상태가 외부에 노출되어서는 안 되는 왕족이나 정치인, 테러의 위협이 있는 군사 지휘관들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글랜포드의 국민인 이상 모두가 쓸 수 있긴 했지만, 실제로 사용하는 이들은 거의 없었다.

“캐롤라인 헌티드가 직접 기록 보호를 요청했다는 겁니까?”

캐롤라인이 이 제도를 쓸 줄은 전혀 생각하지 못했기에 프레져는 더욱 황당해했다.

“아, 네. 환자분께서 직접 요청하셨어요.”

“그럼 그 지정 보호자라는 사람이 대체 누굽니까.”

“죄송하지만 그것도 알려 드릴 수 없습니다.”

직원의 대답에 프레져의 미간에 주름이 생겼다. 평소였다면 순순히 받아들였겠지만 이번에는 그럴 수 없었다. 정체 모를 초조함이 프레져를 압박했다.

“나는 환자의 가족입니다. 병명을 알려 달라는 것도 아닌데, 보호자가 누군지 말해 주는 것조차 안 된다는 겁니까?”

이성적이지 못한 행동은 프레져가 굉장히 싫어하는 것이었다. 그는 안 되는 일에 목청을 높이고 신경질을 내는 이들을 늘 꼴불견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은 그 볼썽사나운 짓을 스스로가 하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어찌 됐든 환자를 보호하는 게 우선이라서요.”

주위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근처에 있는 이들의 시선이 소란을 피우는 프레져에게 향해 있었다.

“…알겠습니다.”

프레져는 다시 평소의 신사다운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러곤 평소보다 넓은 보폭으로 병동을 빠져나왔다.

프레져는 벽에 등을 기대고 주머니에서 궐련을 빼 입에 물었다.

결혼 이후 끊었던 흡연인데. 요즘 들어 부쩍 이를 찾게 되는 일이 잦았다.

“대체 어디까지 할 생각이야, 캐롤라인.”

프레져의 중얼거림은 매캐한 연기에 뒤섞여 사라졌다. 가족은 못 돼도 그녀의 보호자라는 범주에는 들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근데 이번에도 아니었다.

프레져는 분노보다 짙은 허망함을 느끼며 병원에서 몸을 돌렸다.

캐롤라인은 부부의 교집합 밖으로 프레져의 것을 하나씩 내버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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