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감정 소모를 심하게 한 것도 모자라 비까지 맞은 탓에 캐롤라인은 쓰러져 버리고 말았다.
프레져는 당황했다. 아내가 이리 맥없이 픽 쓰러지는 모습을 보는 건 처음이었기에 경황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이성적인 사람이었다. 금방 침착함을 되찾은 그는 사람을 불러 정신을 잃은 캐롤라인을 호텔 스위트룸으로 옮겼다. 하녀를 시켜 옷을 갈아입힌 뒤에는 바로 의사를 불렀다.
“몸이 너무 찹니다. 차라리 열이 나는 편이 나으실 정도로요. 맥박도 많이 불안정하고……. 혹시 아내분께서 지병이 있으신지요?”
“없습니다만.”
“그렇다기엔 몸이 너무 약하신데…….”
의사는 말꼬리를 흐리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래도 허약한 몸으로 비를 맞으신 탓에 무리가 온 모양입니다. 노르티움의 가을비는 유독 차니까요.”
의사는 프레져에게 몇 가지 주의 사항을 설명한 뒤 자리를 떴다. 그사이 하녀들은 불을 피우고 따듯하게 데운 돌을 수건에 감아 이불 안에 넣었다. 방에 훈기가 돌기 시작하자 얼음처럼 차갑던 체온도 서서히 돌아오기 시작했다.
“……몸이 약하다고?”
프레져가 핏기 없는 얼굴로 누워 있는 캐롤라인을 보며 중얼거렸다. 대체 무슨 일이 있던 건지 손엔 붕대까지 감겨 있었다.
그가 아는 캐롤라인은 허약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결혼 생활 내내 감기에 걸린 적도, 몸살로 앓아누운 적도 없었다.
물론 그가 본 적 없다고 해서 아팠던 게 없었던 일이 되는 것은 아니었지만.
마샤와 스테파니가 호텔로 찾아온 것은 그로부터 2시간이 지난 후였다. 캐롤라인이 새벽이 돼도 돌아오지 않자 걱정이 된 나머지 직접 오페라 극장으로 찾아온 것이었다.
프레져는 당연히 이들이 올 줄 알고 극장에 사람을 남겨 둔 상태였다. 스테파니와 마샤는 감시에 가까운 안내를 받아 프레져가 있는 곳에 도착했다.
“마님!”
캐롤라인을 발견한 스테파니가 허겁지겁 침대로 달려갔다. 앞에 프레져가 있다는 것도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캐롤라인이 쓰려졌다는 사실은 그만큼 충격이었다.
프레져는 뚜벅뚜벅 걸어가 벽에 붙다시피 서 있는 마샤 앞에 멈춰 섰다.
“마샤 엘리엇.”
“…….”
“네가 왜 여기 있지?”
몸을 해부하기라도 할 것처럼 첨예한 시선에 마샤는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 긴장감으로 인해 손바닥이 축축하게 젖어 가는 게 느껴졌다.
“고향이 노르티움인 줄은 몰랐는데.”
중간에 합류했다는 여자가 마샤 엘리엇일 줄이야.
이제야 모든 그림이 맞춰졌다. 이 모든 게 에릭과 함께 도망치기 위한, 캐롤라인의 계략이었던 거다. 그리 생각하자 으득, 하고 이가 갈렸다.
“…죄송합니다.”
머리 위에 들리는 서늘한 목소리에 마샤는 허리를 직각으로 숙였다. 이 상황에서 그녀가 할 수 있는 말은 하나밖에 없었다.
“그럼 저쪽이 스테파니 아든이겠고.”
“…….”
“에릭 포스터는 어디 있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지금 당장 종합 병원으로 가야 해요.”
험악한 분위기를 끊은 것은 스테파니의 조급한 목소리였다. 그녀는 이미 제 겉옷을 벗어 캐롤라인의 몸에 두르고 있었다.
“이미 의사가 다녀갔다. 지금은 괜찮아졌으니-.”
“괜찮은지 아닌지 백작님이 어떻게 아세요?”
스테파니가 프레져의 말을 답싹 끊었다. 치켜올린 눈초리가 날카로웠다. 이에 프레져는 실소를 터트렸다.
“단체로 겁을 상실하기라도 했나?”
당당히 제 앞에 나타난 것도 모자라 말대꾸까지 하다니. 고작 하녀 나부랭이 따위가. 아무리 신분의 격차가 줄어들었다곤 하지만 이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백작님, 저 아이 말이 맞습니다. 큰 병원으로 옮겨야 합니다.”
마샤가 스테파니의 말에 동조하고 나섰다.
“저희를 벌하는 건 나중의 일입니다. 일단 마님을 종합 병원으로 모시고 가야 해요.”
프레져는 침대에 미동도 없이 누워 있는 캐롤라인을 쳐다봤다. 유난스럽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저 창백하게 질린 얼굴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피가 옅게 비치는 붕대도.
망설이던 프레져는 결국 두 사람의 의견에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 * *
비 오는 새벽, 병원의 응급실은 제법 분주했다. 빗길 운전에 미숙한 마부들이 종종 사고를 내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응급실을 운영하는 병원은 북부엔 노르티움 종합 병원 한 곳뿐이었기에 더욱 붐볐다.
캐롤라인은 그런 와중에 병원으로 찾아왔다. 다행히 병원에 갈 때 즈음엔 정신이 들어 제 발로 걸어올 수 있는 상태가 되었다. 물론 스테파니에게 반쯤 안겨서 가긴 했지만.
프레져는 캐롤라인을 따라가는 대신 그녀를 감시할 사람 몇을 붙였다. 덕분에 헌티드 백작 부인이 납신다는, 화려한 입장은 면할 수 있었다.
다행히 응급실은 보호자 외에는 출입할 수 없는 구역이었기에 마샤와 스테파니를 제외한 다른 사람은 들어오지 못했다.
“프레져한테 어디까지 말했어?”
캐롤라인이 침상에 누운 채 물었다. 커튼으로 간신히 구역을 나눠 둔 탓에 주변이 매우 비좁았다.
“걱정 마세요. 아프신 건 얘기 안 했어요. 에릭에 대한 것도요.”
“다행이다. 고마워.”
짧게 대화를 나누는 사이 응급실에 상주하고 있는 의사가 다가왔다. 그는 캐롤라인의 몸 상태를 진찰한 뒤 들고 있던 차트를 넘겼다.
“진료 기록을 보니 기존에 앓고 계신 병이 있네요. 아무래도 입원을 하는 게 좋겠어요.”
“입원이요?”
“고위험군 환자이시니까요. 게다가 저체온증에 실신까지 하셨다면서요.”
되묻는 캐롤라인의 얼굴은 당혹스러워 보였다. 의사는 차트에 무언가를 기록하며 말을 이었다.
“지금 몸 상태도 안 좋으시고. 입원은 불가피합니다, 아시죠?”
“…네.”
캐롤라인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저번에 쓰러졌던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몸이 안 좋아진 것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체온도 정상으로 돌아왔건만 이상하게 오한이 들기도 했다.
“담당의인 홉킨스 박사님은 월요일에 출근하실 겁니다. 일단 연락을 넣어 보긴 하겠지만… 언제 만나 뵐 수 있을지 확답은 못 드리겠군요. 워낙 바쁘신 분이라 일정 외 출근이 어려우시거든요.”
응급실에 상주하는 의사는 대부분은 외상 전문의였다. 야심한 밤에 찾아오는 환자는 대부분 사고나 테러 등의 피해를 입은 이들이기 때문이었다. 선천적 기형을 타고난 장기를 돌보는 것은 응급실 의사들의 전문 분야가 아니었다.
“검사 장비를 다룰 줄 아는 의료진들도 지금은 다 부재중이고요.”
캐롤라인의 심장을 검사하는 장비는 그레타에서 들여온, 글랜포드엔 단 하나뿐인 특수한 장비였다.
병원 내에서 그 장비를 쓸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의 의료진뿐이었다.
“입원은 얼마나 오래 하게 될까요?”
“그건 날이 밝고 검사를 제대로 한 후에 알려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일단은 입원 수속 먼저 밟도록 하세요.”
“네. 감사합니다.”
의사가 자리를 뜨자 주사기 여러 대를 든 간호사가 들어왔다. 스테파니는 입원 수속을 밟기 위해 커튼 밖으로 나갔다.
캐롤라인은 혈관에 꽂히는 서늘한 바늘을 보며 입술을 안으로 말아 넣었다.
비정한 제 남편에게는 절대로 아프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이 와중에 입원을 해 버리다니…….
‘아니야. 차라리 잘된 일일지도 몰라.’
입원해 있는 동안 만날 수 있는 이는 제한된다. 병문안을 핑계로 찾아올 수도 있는 일이지만 이는 캐롤라인이 거절하면 그만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가슴이 좀 진정되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올 때 짐을 챙겨 올 걸 그랬어요.”
마샤가 평소보다 납작한 제 가방을 보며 말했다. 급하게 나온 탓에 그녀의 가방에 든 건 지갑과 손수건, 비상약 몇 개가 전부였다.
“비가 그치면 제가 집에 다녀올게요.”
그새 입원 수속을 마치고 온 건지 스테파니가 안으로 들어오며 대답했다. 그녀는 안주머니에서 수첩과 펜을 꺼내 들었다.
“약이랑 옷이랑 수건이랑……. 아, 담요도 두툼한 걸로 챙겨야….”
“아니, 집엔 돌아가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캐롤라인의 낮은 목소리에 종이 위에서 움직이던 스테파니의 손이 멈췄다. 스테파니와 마샤는 의아한 눈으로 캐롤라인을 응시했다.
“분명 프레져의 감시가 따라붙을 거야. 우리야 이미 들킨 마당에 상관없다지만, 에릭의 위치가 들키면 큰일이니까.”
프레져는 자신이 에릭과 정분이 났다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에릭을 찾아낸 후에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몰랐다.
“그러니 집으로 돌아가는 건 안 돼. 에릭을 위해서는.”
단호한 캐롤라인 말에 두 사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좁은 커튼 안에 흐르는 분위기가 침울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마님이 에릭과 바람이 났다 믿고 계실 줄은 몰랐어요.”
씁쓸한 목소리로 입을 연 건 마샤였다.
“하다못해 자초지종 정도는 물어보실 줄 알았는데…….”
그 생각은 캐롤라인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에 대한 남편의 신뢰가 이렇게 바닥일 줄은 그녀도 몰랐다.
“그냥 사실대로 말씀드리는 건 어때요?”
스테파니가 캐롤라인의 눈치를 살피다 입을 열었다.
“오해가 쌓여서 좋을 건 없잖아요. 사실대로 말하면 에릭도 자유로워질 수 있을 거예요.”
“그 인간이 내 말을 믿을까?”
딱히 자신을 믿어 주길 바랐던 것은 아니었다.
그저 왜 도망쳤냐고, 왜 말도 없이 떠났냐고, 딱 한 번만 물어 주길 바랐다. 하다못해 자신의 추측이 맞는 거냐고 따지기라도 해 주길 원했다.
그러나 프레져는 그녀가 마지막까지 쥐고 있었던 기대를 산산이 부숴 버렸다. 부서진 희망은 세차게 내리는 빗줄기를 타고 씻겨져 내렸다. 캐롤라인의 손에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해명한들 나만 입 아플 거야. 그러니까 그냥 놔둘래. 오해를 하든 말든.”
몸이 아픈 순간까지 프레져에 대한 생각을 하고 싶진 않았다.
얼마 남지 않은 시간만큼은 오롯이 저를 위해 쓰고 싶었다. 설령 그게 이기적인 결정이라 해도.
“피곤해. 좀 자야겠어.”
“네. 쉬세요.”
캐롤라인이 눈을 느리게 깜빡이자 마샤와 스테파니가 자리를 비켰다.
그녀는 병실 특유의 거친 담요를 목 끝까지 덮고 눈을 감았다. 시야가 차단되자 응급실의 소란함이 귓속으로 흘러 들어왔다.
잠이 오질 않았다.
한참을 뒤척거리던 캐롤라인은 결국 눈을 떴다. 그러곤 몸을 옆으로 돌려 누워 창밖을 바라봤다. 작게 트인 창 너머에 있는 하늘이 점점 밝아져 오는 게 보였다.
“여명의 천사…….”
우중충한 비구름을 뚫고 누가 불러들였는지 모를 아침이 찾아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