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사실 프레져에겐 일말의 기대감이 있었다. 제 앞에 벌벌 긴다든지, 이런 역겨운 연극을 준비했냐며 화를 낸다든지. 하다못해 악에 받쳐 소리를 지르는 모습이라도 보고 싶었다.
그러나 캐롤라인은 프레져가 그토록 원했던 장면을 보여 주지 않았다.
“어떡하면 좋아. 엄마, 우리 엄마…….”
그저 제 고향을, 아픈 어머니와 오라비를 하염없이 그리워할 뿐이었다.
그에게 용서를 구하거나 원망하지도 않았다. 애초에 그녀의 머릿속에서 자신은 완벽히 배제된 인물인 것이었다.
“하,”
그렇게 생각하자 더욱 배알이 꼴렸다. 독한 말을 내뱉고 여린 가슴을 마구 난도질하고 싶었다.
프레져는 그 욕구를 겨우 참아 내며 입을 열었다.
“걱정 마. 못 만나게 하지는 않을 테니.”
의도를 알 수 없는 말에 캐롤라인이 편지에 고정하고 있던 고개를 들어 올렸다.
“수도로 모시고 오기 위해 사람을 보냈다. 당분간 백작저에서 지내시게 될 거야. 그러니…….”
프레져는 캐롤라인을 향해 손바닥을 내밀었다. 그러곤 마치 에스코트를 하는 것처럼, 다정해 보이는 얼굴로 말했다.
“집으로 돌아와.”
“…….”
캐롤라인은 무어라 대꾸하지 않았다. 그저 제 앞에 놓인 커다란 손을 응시할 뿐이었다.
“그럼 일단은, 눈감아 주도록 하지.”
당신의 배신을.
캐롤라인의 눈빛이 바뀐 건 그 이후부터였다.
“싫어요.”
“…….”
“난 다시는 백작저에 돌아가지 않을 거예요.”
그러곤 프레져에게서 한 걸음 물러섰다.
“난 이제 당신 말은 안 들어요. 당신도 알고 있잖아요?”
편지를 안주머니에 넣으며 우산을 단단히 움켜쥐었다.
“도망친 순간부터, 당신의 뜻대로 날 움직이는 건 불가능할 거라고.”
프레져는 제법 단호한 캐롤라인의 얼굴을 보다 픽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러곤 그녀가 물러선 것보다 더 큰 보폭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그래. 어디 한 번 당신 마음대로 해 봐. 평생 어머니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다면.”
점점 가까워지는 프레져에 캐롤라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다른 이가 한 말이라면 쓸데없는 허세라며 비웃었겠지만 상대가 프레져라면 달랐다. 그는 무슨 일이 있어도 제 목표를 이루고 마는 사람이었다.
누구보다 귀족적이고 우아한 방법으로 자신을 찾아내지 않았는가.
아니, 이건 그가 자신을 찾아낸 거라 할 수도 없었다. 이곳까지 걸음한 것은 전부 스스로의 의지였으니.
순간 무력감이 캐롤라인을 덮쳤다. 단호했던 보랏빛 눈동자가 요동치는 것을 본 프레져는 비릿하게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설마 하나뿐인 딸이 사용인과 정분이 난 것도 모자라 야반도주까지 했다는 이야길 들려드리고 싶은 건가?”
“……!”
아, 역시 당신은 너무 약해.
프레져는 곧 꺼질 촛불처럼 위태로워 보이는 캐롤라인을 보며 생각했다.
“나도 반응이 궁금하긴 하군. 쓰러지시려나? 어쩌면 충격으로 눈이 더 안 좋아지실 수도 있겠어.”
그래. 이게 그가 아는 캐롤라인이었다. 한결같이 유약하고 누구보다 감정적인.
익숙한 표정이 눈앞에 그려지자 든 감정은 기쁨이었다.
저 여자에게 생채기를 낼 수 있다면, 그래서 더없이 기뻐하고 안심할 수 있다면. 어떤 말이든 스스럼없이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그는 더욱 오만하게 혀를 놀렸다.
“혹시 모르지. 그래도 어미인데, 마냥 비난만 하시진 않을 거야.”
“입 다물어요.”
“어쩌면 ‘역시 내 딸’하고 칭찬을 해 주실지도?”
프레져의 말은 딱 거기까지만 이어졌다.
짝!
마찰음과 함께 고개가 왼쪽으로 돌아갔다. 시선을 비트니 캐롤라인이 손을 올린 채 가쁜 숨을 몰아쉬는 게 보였다.
있는 힘껏 내리친 탓에 우산을 놓쳐 그녀의 표정이 더욱 잘 보였다. 비에 젖은 캐롤라인의 얼굴엔 선연한 분노가 서려 있었다.
“…하.”
아니, 이는 단순히 분노란 단어로 명명할 수 없었다. 그녀는 서럽기도, 억울해 보이기도, 외로워 보이기도 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분명 제게 익숙한 얼굴을 하고 있었는데.
지금 캐롤라인은 꼭 처음 보는 사람처럼 낯설었다. 저런 얼굴을 한 캐롤라인은 처음이었다.
이에 프레져는 멍한 표정으로 제 뺨을 쓸어내렸다.
“억울해?”
왜 네가 그런 얼굴을 해?
“화가 나?”
날 버리고 떠난 건 당신이면서. 그러면 안 되는 거잖아.
“다 캐롤라인, 당신이 자초한 일이야.”
프레져는 그 말을 속에 욱여넣으며 말을 이었다.
“정의도, 가문도, 심지어 부모 형제까지도. 모두 저버린 건 당신이라고.”
그런데 왜.
프레져는 허공에 멈춰 있는 캐롤라인의 손을 보며 생각했다. 차라리 저 손으로 자신을 더 쳤으면 좋겠다고. 제 멱을 잡고 바락바락 화라도 냈으면 좋겠다고.
그러나 그의 바람과는 달리 캐롤라인의 숨은 차분해져 갔다. 가파르게 오르내리던 가슴이 차츰 진정되는 게 보였다.
“그래. 당신은 이런 사람이었지.”
비에 젖은 입술이 새하얀 입김을 내뱉었다. 캐롤라인은 퍼렇게 질린 입술을 짓이기며 입을 열었다.
“알고는 있었는데. 당신은 내 생각보다 훨씬 더 지독하고 못된 사람이었어.”
살을 맞대고 산 세월이 꼬박 2년이었다. 함께한 세월이 있는데, 그래도 자신을 조금이라도 신뢰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캐롤라인에겐 남아 있었다.
그러나 오늘 프레져를 마주함으로써 그녀의 기대는 산산조각이 났다.
“이런 인간을 내가 어쩌자고…….”
프레져가 주는 게 사랑이 아니라도 상관없다 생각했다. 그저 명예나 책임감, 하다못해 작은 동물에게 쏟는 관심 같은 거라도 상관없다고.
그러나 그것은 전부 자신의 교만이었다. 애초에 프레져는 자신에게 내어준 게 아무것도 없었다.
그게 실낱같은 믿음 한 줄기일지라도.
“당신 같은 인간한테 일일이 설명하기도 지쳐.”
나 좀 봐 달라고, 내 얘기 좀 들어 달라 소리쳤던 시간이 길었다. 그러나 그는 지금 목이 쉬어 목소리를 잃은 사람에게 왜 말을 못 하냐 추궁하고 있었다.
“편한 대로 생각하고 오해해요. 늘 그래 왔던 것처럼.”
캐롤라인에겐 그를 상대할 시간도 체력도 없었다. 제 죽음을 뒤늦게 알게 된 그가 후회하거나 반성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게 당신 특기잖아.”
한차례 바람이 불었다. 그러나 프레져는 추위를 느끼지 못했다. 비바람보다 자신을 보는 캐롤라인의 시선이 더욱 시렸기 때문에.
프레져는 뒤늦게 그녀의 눈동자가 보라색이라는 것을 떠올렸다.
가장 뜨거운 색인 빨강과, 가장 차가운 색인 파랑을 섞어 놓은 색. 열렬했던 사랑이 지나간 자리엔 혹한의 바다보다 차가운 감정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 * *
“정말 엄청난 공연이었어요.”
“역시 안젤라 골드의 목소리는 글랜포드의 보물이라니까요.”
“오케스트라는 얼마나 웅장하던지…….”
공연장에서 나오는 이들의 얼굴엔 황홀함이 가득했다. 그중 절반은 아직까지 엔딩의 슬픔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버터플라이가 자결할 때 얼마나 슬펐는지……. 안젤라 골드가 그렇게 연기를 잘할 줄은 몰랐어요.”
“근데 원래 나비 부인에 저런 장면이 있던가요? 버터플라이가 자결하는 장면이 나오긴 하지만, 저리 비극적으로 연출되진 않았던 것 같은데.”
클리브는 웅성거리는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공연장을 빠져나왔다. 공연장 밖에 있는 홀로 나가자 삼삼오오 모여 있던 귀족들이 보였다.
“왕녀 전하!”
“오랜만에 보는군요.”
귀족들이 샤를리즈에게 알은체를 해 왔다. 반응을 보니 그녀가 나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모양이었다.
“못 본 새 더욱 늠름해지셨습니다, 클리브 헤이오스 영식.”
“하하, 감사합니다.”
애초에 클리브는 늠름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굳이 말하자면 곱상한 쪽에 가까운 외모였다. 그저 귀족 간의 예우라는 것을 알기에 대꾸해준 것뿐이었다.
“2년 만이시지요?”
“얼마 지나지 않은 줄 알았는데. 벌써 세월이 그리되었네요.”
귀족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샤를리즈는 즐거운 표정이었다. 오랜만에 고향에 돌아와 기쁜 듯했다.
클리브는 그런 샤를리즈를 응시하다 사람이 없는 쪽으로 몸을 물렸다. 마음 같아선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만찬에 참여해야 한다는 어머니의 신신당부 때문에 내뺄 수도 없었다.
그는 시간을 죽이기 위해 다시 공연장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곤 벽에 등을 기댄 채 객석에서는 보이지 않는 풍경을 눈에 담았다. 돔 형태의 건물이라 넓고 천장이 높아 구경할 것이 많았다.
클리브는 천장에 어지러이 얽혀 있는 전선들과 조명 장치들을 훑어보다 자연스레 3층 객석으로 눈을 돌렸다.
아직 관객이 꽤 남아 있는 1층과는 달리, 3층엔 좌석이 몇 되지 않아 남은 사람이 적었다. 아예 판매를 하지 않았는지 천막이 쳐진 좌석도 있었다.
“…음?”
3층 객석을 눈에 담던 클리브는 눈을 가늘게 떴다. 익숙한 인영 하나가 시야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안경을 가지고 오는 건데…….”
눈이 좋지 않은 탓에 여자의 형상이 잘 보이지 않았다. 그나마 보이는 것은 흰 피부에 연갈색 머리칼 정도.
겨우 그 정도로 캐롤라인이라 단정할 순 없었으나, 풍기는 느낌이 너무도 비슷했다,
“오페라를 보러 간다는 말은 안 했던 것 같은데.”
헌티드하우스의 공연은 모두가 보고 싶어 하는 것이니 표를 얻었다면 분명 자랑을 했을 터였다. 물론 자신은 하지 않았지만.
클리브는 여자가 있는 쪽을 향해 팔을 흔들려다 멈칫했다. 그러곤 객석을 치우고 있는 직원에게 다가가 물었다.
“바쁘신데 죄송합니다. 혹시 저 구역으로 올라가려면 어디로 가야 하나요?”
“두고 오신 소지품이 있으신 건가요?”
“아니요. 그런 건 아니고, 그냥 확인할 게 좀 있어서요.”
직원은 눈을 돌려 클리브가 가리키고 있는 자리를 응시했다. 그러곤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죄송하지만 저 구역은 입장이 어려우십니다.”
“…네?”
“여러 문제로 판매를 하지 않은 좌석이라서요. 관계자가 아니면 들어갈 수 없으십니다.”
직원의 대답에 클리브는 조금 멍한 표정이 되었다. 다시 3층으로 시선을 옮겼을 때, 여자는 한 남자의 안내를 받아 객석을 나서고 있었다. 머지않아 두 남녀는 3층 뒤편에 난 문을 통해 공연장을 빠져나갔다.
“혹시 저 구역에 용건이 있으신 거면 관계자를 불러 드리겠습니다.”
“아뇨, 괜찮습니다. 감사합니다.”
허둥지둥 인사를 마친 클리브는 평소보다 조급한 걸음으로 공연장을 빠져나왔다. 그는 주위를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무슨 일 있어요?’
‘그냥, 개인적인 사정 때문에요.’
애매한 말투, 난감한 목소리, 묘하게 불편해 보였던 얼굴.
‘수도에서 왔어요. 고향은 남부지만요.’
‘그냥 이름으로 불러 주세요. 성보다는 이름으로 불리는 게 좋아서요.’
모든 것이 하나의 답만 가리키고 있었다.
‘…송구하게도 아내는 북부행에 함께 하지 못했습니다. 워낙 몸이 약한 사람이라.’
깊게 생각해 보면 알 수 있었다. 의심을 조금만 키웠어도, 헌티드 백작을 잡고 물어보기만 해도 알 수 있었을 텐데.
“클리브, 여기서 뭐 하고 있니?”
대충 자리가 정리됐는지, 샤를리즈가 클리브에게 다가왔다.
“도망갈 궁리를 하고 있다면 당장 그만두렴. 한 달 전부터 정해 둔 약속이니 혹시라도-.”
“어머니.”
클리브가 샤를리즈의 말허리를 끊었다. 이에 샤를리즈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이번엔 또 무슨 핑계니. 어디 한번 들어 보자.”
“그게 아니라…….”
클리브는 어느새 사람들이 빠져나간 홀을 두리번거리다 다시금 말을 이었다.
“헌티드 백작 부인 아시죠?”
“흠, 2년 전 건국제 때 본 기억이 나긴 하는구나.”
“그 사람 이름이 뭐예요?”
“이름?”
뜬금없는 질문에 샤를리즈는 눈을 깜빡였다.
“글쎄… 생각이 잘 안 나는구나. 워낙 존재감이 없던 여자라.”
“…….”
“약간 촌스러운 이름이었던 것 같긴 한데……. 아, 생각났다.”
샤를리즈가 짝, 손뼉을 쳤다. 이윽고 붉은 입술이 느릿하게 열렸다.
“캐롤라인.”
익숙한 이름의 등장에 클리브의 하늘빛 눈이 일렁였다.
“맞아. 캐롤라인 헌티드였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