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살짝 열어 둔 창문으로 차갑게 식은 가을바람이 들어왔다. 해가 지기 직전이라 그런지 유독 공기가 찼다.
종종 코를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으나 나서서 창문을 닫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손님은 그야말로 상전이기 때문이었다.
오죽하면 임원진들까지 현장에 찾아왔겠는가.
“귀한 시간을 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지금 진행하는 인터뷰는 왕국에서 손꼽히는 명문가의 가주이자, 헌티드하우스의 주인인 프레져 헌티드를 상대로 하는 인터뷰였다.
모든 인터뷰를 생략하겠다던 프레져는 오늘 아침, 돌연 인터뷰에 임하겠다는 의사를 밝혀 왔다. 참으로 변덕스러운 결정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프레져의 변덕은 신문사 사람들에겐 크나큰 행운이었다.
‘어떻게 따낸 인터뷰인데, 백작님 심기를 거스를 수는 없지,’
안젤라와 프레져의 불화, 항간에 떠도는 단원들 간의 불화설에 대해 묻고픈 마음이 굴뚝 같았으나, 인터뷰를 성공적으로 마치기 위해서는 근질거리는 입을 걸어 잠가야 했다.
“지금까지의 모든 행보가 파격의 연속입니다. 순회공연은 그렇다 치더라도 직접 북부까지 오실 줄은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을 텐데요.”
“저는 헌티드하우스의 대표입니다. 극단과 함께 움직이는 게 당연한 일 아니겠습니까.”
“역시 극단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시군요.”
의례적인 질문과 뻔한 대답이 몇 차례 오갔다. 이따금 셔터가 눌리는 소리와 펜촉이 서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프레져는 기자의 손에 들린 수첩을 응시했다. 원하는 질문이 나올 때까지 기다리는 일은 몹시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
“한 달 간의 순회공연 이후엔 무엇을 하실 생각이십니까? 바쁘게 달리셨으니 휴식을 가지시려나요?”
드디어.
오랜 기다림 끝에 드디어 원하던 질문이 나왔다. 기자의 물음에 프레져가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감추며 입을 열었다.
“아쉽게도 순회공연 다음엔 개인적인 일정이 계획되어 있습니다. 휴식은 단원들에게 포상 휴가를 주는 것으로 대체할 생각입니다.”
일부러 애매한 답변을 흘렸다. 꼬투리 잡기를 좋아하는 기자들이라면 분명 반응을 보일 거란 확신이 있어서였다.
“일정이요?”
역시나 예상했던 반응이 돌아왔다.
“실례가 안 된다면 어떤 일인지 여쭤봐도 되나요?”
“흠…….”
“헌티드 백작님의 행보는 왕국의 모든 사람들이 궁금해하니까요.”
프레져는 난처한 것처럼 턱을 매만지다 조심스레 운을 뗐다.
“사실, 남부에 계신 장모님께서 몸이 많이 안 좋으십니다. 의사의 말에 의하면 실명 직전이라고 하더군요.”
“세상에나.”
곳곳에서 기계적인 탄식이 터져 나왔다.
“공연이 끝나면 한동안은 장모님과 함께 시간을 보낼 생각입니다. 사위로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곁에 있어 드리는 것 정도가 전부니까요.”
“참 안타까운 소식이네요. 부디 쾌차하실 수 있으면 좋겠네요.”
기자가 안타까움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러나 그의 손은 착실하게 기삿거리를 적고 있었다.
‘특종이다. 다른 신문사에서는 다룬 적 없는 특종이야!’
자리에 있는 직원들 모두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터였다.
프레져는 만면 가득 퍼지려는 미소를 쓴웃음으로 포장했다. 이 정도 연기쯤이야 그에겐 일도 아니었다.
“백작 부인께서 많이 속상해하시겠군요.”
“네. 그래서 이번 북부행에 함께하지 못했습니다. 아쉽게 되었죠.”
기다리던 질문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프레져는 뻔한 답변을 늘어놓으며 인터뷰가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오늘 인터뷰에 응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마지막으로 하실 말씀 있으신지요?”
“노르티움 극장에서 올리는 이번 공연은 매우 특별합니다. 작곡가인 투스카니가 유년 시절의 대부분을 이곳, 노르티움에서 보냈기 때문이죠.”
프레져는 작곡가와 노르티움에 대한 상투적인 설명을 늘어놓았다.
“직접 공연을 보러 오시면 왜 제가 많은 작품들 중 나비 부인을 선택했는지 아실 겁니다.”
그러나 마지막 말만큼은 아니었다.
“그만큼 흥미로운 작품이고.”
어절 하나하나를 뱉는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또 자신 있는 작품입니다.”
모든 단어들이 제 공연을 꼭 봐 줬으면 하는 단 한 사람에게 향해 있었다.
프레져는 봄날의 나비 같은 여인의 얼굴을 떠올리며 덧붙였다.
“그러니 꼭 보러 오시면 좋겠습니다.”
* * *
“앞으로 일주일 동안은 절대로 밖에 안 나갈 거야.”
캐롤라인은 이불을 목 아래까지 덮은 채 다부지게 말했다.
“필요한 게 있으시면 뭐든 말씀해주세요. 제가 다 가지고 올게요.”
침대 옆에 선 스테파니 역시 주먹을 불끈 쥐며 말했다.
공연을 위해 노르티움에 머물고 있는 프레져를 피하기 위해선 당분간은 몸을 사려야 했다.
“그런데 병원은 어떻게 하시려고요?”
“아직은 모르겠어. 가는 길에 그 사람을 마주치게 될지도 모르니까.”
병원에 가려면 노르티움 내의 번화가를 지나가야 했다. 길을 돌아갈 수는 있었으나 언제, 어디서 프레져를 만날지 알 수 없기에 특별히 주의해야 했다.
“그래도 병원은 가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건강만큼 중요한 건 없으니까요.”
“음, 상황 봐서.”
걱정스레 말하는 마샤에 캐롤라인은 부스스 웃으며 대답했다.
“에릭은?”
“사흘만 휴가를 받았대요.”
“사흘이면 너무 짧은데…….”
프레져는 캐롤라인이 에릭과 함께 도망쳤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일을 가는 건 위험한 행동이었기에 에릭은 인쇄소에 휴가를 요청했다.
“공장 쪽은 유독 휴가에 박하니까요. 게다가… 이번엔 작업량이 꽤 많은가 봐요. 잔업이 있다고 하더라고요.”
일이 많은 이유는 뻔했다. 북부에서 가장 잘 팔리는 일간지에 프레져의 특별 인터뷰까지 실릴 예정이라 하니.
“불티나게 팔릴 걸 대비하려면 많이 찍어야겠지.”
캐롤라인이 씁쓸하게 말했다. 가만히 있어도 흘러들어오는 것이 프레져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래도 공장치고 사흘이면 많이 받은 편이에요.”
그나마 다행인 점을 꼽으라면 공장이 모여 있는 단지는 노르티움 외곽에 있다는 것이었다. 시내를 돌아다니는 프레져와 동선이 겹칠 일은 없을 터였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에릭이잖아요. 알아서 잘할 거예요.”
헌티드 백작저에서 일한 시간만 자그마치 5년이었다. 이 같은 상황에 프레져를 마주친다면 뼈도 추리지 못할 거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터였다.
“그러니 걱정일랑 마시고 얼른 쉬세요. 어제부터 통 못 주무셨잖아요.”
캐롤라인은 요 며칠 잠을 설쳤다. 팔다리에 쥐가 나 잠을 깨는 일이 잦았기 때문이었다.
얼굴부터 시작된 부종은 곧 몸 전체로 퍼져갔다. 딱 맞는 신발을 신으면 발이 저려 걷기가 어려울 때도 있었다. 새 약을 복용한 후로 나타난 변화였다.
“응, 좀 자야겠다.”
눈을 감아도 잠은 오지 않을 테지만, 캐롤라인은 애써 침대에 몸을 뉘었다.
엄습해 오는 불안을 떨치려면 억지로라도 잠에 들어야 했다.
* * *
한 시간 남짓한 인터뷰가 끝났다. 프레져는 넥타이를 정리하며 소파에서 일어났다.
“기사는 언제 확인할 수 있는 겁니까?”
“내일 아침 신문으로 바로 나올 겁니다.”
“빨라서 좋군요. 그럼.”
짧은 인사를 마친 프레져는 곧바로 자리를 떴다. 현장에 남아 있던 신문사 임원들은 프레져의 뒤를 쫄래쫄래 따라가기 바빴다.
“살펴 가십시오!”
탁.
우렁찬 작별 인사를 마지막으로 사무실 문이 닫혔다. 영업용 미소를 짓고 있던 직원들은 문이 닫히자마자 일사불란하게 손가락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타닥타닥, 타자기를 두드리는 소리가 사무실 안을 가득 울렸다. 창밖으론 해가 지고 있었고 늦지 않게 기사를 내려면 부지런히 움직여야 했다.
“다 됐다!”
완성본은 해가 다 지고 나서야 나왔다.
사무실의 막내 직원은 가보 모시듯 소중히 종이를 안고 인쇄소로 향했다. 굳게 닫혀 있어야 할 인쇄소는 불이 훤하게 켜져 있었다.
“안 그래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인쇄소는 새벽에 문을 열어 정오 닫았다. 이 시간까지 문을 닫지 않았다는 건 프레져의 인터뷰 하나를 인쇄하기 위해 모든 직원들이 퇴근을 미뤘다는 뜻이기도 했다.
“아주 귀한 아이입니다. 잘 찍어 주셔야 합니다?”
“그럼요. 걱정 마세요.”
호탕하게 입을 여는 공장장에 직원은 그제야 안심한 얼굴이 되었다. 그는 날이 밝기 전에 찾아올 것을 약속한 뒤 공장을 떠났다.
“얼마나 급한 일이길래 이 시간에 일을 시킨대?”
“아주 귀한 아이라잖아. 직접 전달하고 갈 정도면 말 다 했지.”
“덕분에 잠만 못 자게 생겼네.”
사상 초유의 사태에 직원들이 한마디씩 불평을 내뱉었다. 그래도 고분고분 손을 움직이는 걸 보니 추가 수당을 받는 게 싫진 않은 모양이었다.
에릭은 덜컹거리며 돌아가는 윤전 인쇄기 앞에 섰다. 기계는 프레져의 얼굴이 찍힌 종이를 빠른 속도로 찍어 내고 있었다.
“에릭, 잘 나왔는지 확인 좀 해 봐. 그렇게 신신당부를 하고 갔는데, 잘못 나오기라도 하면 난리 칠 테니 말이야.”
“네.”
에릭은 다른 직원에게서 건네받은 신문을 꼼꼼히 훑어보았다. 프레져의 얼굴 옆에 「단독 보도」라는 글자가 큼지막하게 쓰여 있었다.
“…….”
긴 글을 천천히 훑어 내리던 에릭의 시선이 어느 한 곳에서 멈췄다. 늘 감흥 없는 빛을 유지하던 눈동자가 일순간 크게 뜨였다.
“왜 그래? 무슨 문제라도 있어?”
그 변화를 감지한 공장장이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러나 에릭은 좀처럼 입을 열지 못했다.
“대체 이게…….”
가장 귀족적인 남자의, 가장 귀족적인 도발이 새까만 잉크가 되어 인쇄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