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녀가 떠난 뒤에 남겨진 것 (32)화 (32/156)

#32

클리브는 맞은편에 서 있는 단정한 남자에게 악수를 청했다. 웃고 있는 얼굴과 달리, 짙은 눈동자가 왠지 모르게 날이 서 보였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프레져 헌티드입니다.”

손바닥에 닿은 체온이 그가 풍기는 분위기만큼이나 서늘했다.

“오늘 식사에 아드님이 동행하시는 줄은 몰랐습니다만.”

“미리 말하지 못해 미안해요. 내가 급하게 부른 거라.”

샤를리즈의 능청에 클리브는 속으로 혀를 찼다.

병원으로 사람을 보낸 것도 모자라 직접 여기까지 끌고 왔으면서. 모르는 척 연기를 하는 모습이 제 어머니이지만 가증스러웠다.

“백작 부인도 같이 왔으면 좋았을 텐데요.”

“…송구하게도 아내는 북부행에 함께하지 못했습니다. 워낙 몸이 약한 사람이라.”

“저런, 환절기엔 건강 관리에 유의해야 한다니까요.”

샤를리즈는 프레져의 속내도 모르고 마냥 밝게 웃었다. 이 어색하기 짝이 없는 자리를 만든 사람이 본인이라는 것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이윽고 직원이 음식을 내왔다. 자리에 앉은 세 사람은 샤를리즈의 주도하에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내가 오페라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몰라요. 특히 헌티드하우스의 공연이라면 더욱.”

“영광이군요.”

결혼 후 쭉 그레타에서 살던 샤를리즈는 노르티움에서 공연이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한달음에 글랜포드로 향했다.  클리브가 글랜포드에 머무르고 있다는 이유가 가장 컸다.

동생을 국왕으로 둔 덕에 쉽게 표를 얻은 그녀는 그 기세를 모아 프레져와의 만남을 추진했다.

‘인맥을 넓혀 손해 볼 것은 없으니까.’

그러나 그녀의 아들인 클리브는 아니었다.

그의 사교성은 환자를 보듬을 때만 발휘되는 것이었다. 가식을 떠는 귀족들 사이에서 웃고 있는 시간이 클리브는 너무도 아까웠다.

물론 그건 프레져와 마주 앉아 있는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아, 물론 우리 클리브도 그렇고요. 그렇지?”

“네. 오페라도…, 발레도 모두 제가 좋아하는 것들이죠.”

클리브는 어머니의 재촉에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특히 나비 부인은 처음 보는 공연이라 더욱 기대가 되는군요.”

만족스러운 대답인 듯, 샤를리즈의 입꼬리가 매끄럽게 올라갔다.

“그런데 어째서 나비 부인을 공연할 생각을 했나요? 유명한 오페라긴 했지만, 헌티드하우스의 대표 격은 아니잖아요.”

“작곡가가 노르티움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기도 했고… 요즘 제가 빠져 있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어머, 비극을 좋아하시는군요.”

“그렇다고나 할까요.”

‘좋아하면 좋아하는 거지. 그렇다는 건 또 뭐야.’

참으로 애매한 대답이라고 생각하며 클리브는 와인을 마셨다. 저렇게 애매한 대답을 하는 사람이 주위에도 한 명 있던 것 같은데.

“…….”

클리브는 문득 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캐롤라인의 성이 헌티드라는 것을 뒤늦게 떠올렸기 때문이었다.

물론 성이 같다고 무조건 같은 가문인 것은 아니었다. 아주 옛날에 갈라져 나온, 먼 방계 중 하나일 가능성이 높으니.

‘게다가 백작가 사람이 노르티움에 동떨어져 있을 확률은 없지.’

헌티드 백작 부인이 아프다는 이야기는 들어 본 적도 없었다. 게다가 헌티드하우스는 수도의 노른자 땅에 있지 않던가. 백작가의 사람이라면 이 먼 북부 땅이 아닌 수도에 있어야 맞았다.

그럼에도,

“나비 같은 여인이라니. 얼마나 은유적인 표현입니까.”

클리브는 와인잔을 한 손에 쥔 프레져를 가만히 응시했다.

“다른 곳을 찾아 훌쩍 날아가고, 쉽게 으스러져 버리는 여인을 표현하기 제격인 단어라 생각합니다.”

아네모네를 닮은 연보랏빛 눈동자. 활짝 핀 꽃 사이를 배회하는 연갈색 머리칼. 따뜻한 봄을 닮은 캐롤라인은 금방 부서져 버릴 날개처럼 가녀린 체구를 가지고 있었다.

“……문학적인 말이네요.”

와인을 머금은 자줏빛 입술이 왠지 모르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소설이나 시에도 조예가 깊으신 모양입니다. 혹시 파스칼리오의 소설을 읽어 보셨나요?”

그래서였다. 대화의 주제를 벗어난 질문을 한 건.

“물론입니다. 좋아하는 작가 중 한 명이죠.”

늘 그렇듯, 프레져는 전형적인 대답을 내놓았다.

이후로도 두 사람은 질문을 주고받으며 의미 없는 대화를 이어 갔다. 이리 애매한 도수의 술로는 빨리 취할 수가 없어 답답할 뿐이었다.

* * *

왕녀와의 식사를 마친 프레져는 서둘러 숙소로 돌아왔다.

왕족의 비위를 맞추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엔 프레져가 남의 비위를 맞춰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이 큰 요인으로 작용했다.

“피곤하군.”

하지만 이대로 잠들어서는 안 됐다. 노르티움 일대를 뒤지려면 부지런히 움직여야 했다.

그래도 배를 탄 덕에 예상보다 일찍 도착해 다행이었다.

프레져는 타이를 느슨하게 푼 뒤 필요한 서류만을 챙겨 호텔 방을 나섰다.

“대표님!”

다소 경박한 발소리와 함께 뛰어온 사람은 다름 아닌 로겐이었다.

“왜 여기 있지? 극장에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로겐을 발견한 프레져의 미간이 좁혀졌다. 공연 준비로 바빠야 할 사람이 자리를 이탈했기 때문이었다.

“대표님,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닙니다.”

로겐은 안주머니에서 꺼낸 편지를 프레져에게 내밀었다.

“로우밸리에서 편지가 왔습니다.”

“…어디서 왔다고?”

“로우밸리에서요!”

로겐이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손등으로 닦으며 외쳤다.

“마님의 오라버니께서 편지를 보내셨다고요!”

* * *

「캐롤, 나야. 잘 지냈어? 얼마 만에 편지를 쓰는 건지 모르겠네.

다름이 아니라, 어머니께서 눈이 더 안 좋아지셨어. 의사 말에 따르면 나중엔 빛만 구분할 수 있을 정도로 시력이 악화될 거래.

내색하지 않으시지만 많이 심란하신가 봐. 그래서 말인데 캐롤, 더 늦기 전에 로우밸리에 와 줄 수 있어?

어머니께서 시력을 잃기 전에 너를 꼭 한번 보고 싶으신가 봐.

너한테 방해되지 않도록 우리가 수도로 찾아가고 싶지만, 알다시피 내가 아니면 구둣방을 책임질 사람이 없어. 그렇다고 어머니를 수도까지 혼자 보낼 수도 없고…….

하루만 있다 가도 좋으니까 여기로 와 줄 수 있어? 지금이 아니면 어머니는 평생 네 얼굴을 못 보실 테니 그 전에 꼭 봤으면 싶어서.

바쁠 텐데 시간 뺏어서 미안해. 늘 감기 조심하고, 건강 잘 챙기고. 물론 너는 알아서 잘하겠지만.

그럼 답장 기다리고 있을게.

-너의 하나뿐인 오빠 애런이」

“뭐라고… 쓰여 있습니까?”

로겐이 프레져의 안색을 살피며 물었다. 캐롤라인이 사라진 걸 눈치챈 건 아닌지 걱정이 되어서였다.

‘수신인이 마님인 걸 보면 상황을 알고 계신 것 같진 않은데.’

로겐은 관자놀이에 맺힌 땀을 닦으며 프레져의 입에서 나올 말을 기다렸다.

“빠른 시일 내에 로우밸리로 와 달라는군.”

캐롤라인의 어머니인 이디나 웨즐은 눈이 매우 안 좋았다.

일종의 직업병이었다. 하루 종일 가죽에 바늘을 꿰고 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남편이 죽은 이후로 혼자서 두 사람 몫의 일을 하다 보니 그녀의 눈은 빠르게 나빠져 갔다. 결국 프레져가 맞춰 준 안경도 소용없는 지경에 이른 모양이었다.

“결국엔 실명이라니.”

바쁘면 오지 않아도 괜찮다는 말과는 달리, 종이에 적힌 필체는 꽤 급해 보였다. 편지에 쓰인 대로 실명이 머지않은 모양이었다.

“답신은 어떻게 할까요?”

영영 앞을 보지 못할 거라는데, 환자의 청을 거절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승낙할 수도 없었다. 가장 중요한 사람인 캐롤라인이 없지 않은가.

퍽 난감한 상황에 로겐의 근심은 더욱 깊어졌다.

“곧 모시러 가겠다고 적어 보내.”

“네?”

그러나 프레져의 입에서 나온 대답은 빠르다 못해 흔쾌하기까지 했다. 이에 로겐은 순식간에 얼빠진 표정이 되었다.

“빠른 시일 내에 로우밸리에 마차를 보내겠다고.”

“…진심이십니까?”

“그래.”

프레져는 오히려 아까보다 후련해진 표정을 짓고 있기까지 했다.

“차라리 잘 됐어.”

제 주변 사람에게 유난히 무른 여자였다. 특히 가족에 관한 일이라면 더욱.

‘이 소식을 들으면 분명 돌아올 수밖에 없을 테지.’

짧은 시간 동안 프레져의 머리는 빠르게 돌아갔다. 그 끝에 캐롤라인을 찾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돌아가지 않겠다고 버티면 그만이니까.’

사랑에 미쳐 도망친 것도 모자라, 거짓 정보를 흘려 자신을 희롱하기까지 했다. 이런 상황에서 캐롤라인이 순순히 돌아올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어쩌면 제발 자신을 놓아 달라며 무릎을 꿇고 빌지도 몰랐다.

‘하지만 애런의 편지를 들먹인다면.’

지금 같은 상황에 이디나의 실명은 차라리 희소식에 가까웠다.

프레져는 봉투 모서리를 만지작거리며 캐롤라인이 보일 반응을 상상했다.

‘눈물을 흘릴까? 아니면 당장 로우밸리로 가겠다며 난리를 칠까?’

어쩌면 충격을 받고 그 자리에서 쓰러질지도 몰랐다.

자신을 버리고 도망을 칠 만큼 단단히 독기를 품은 여자였다. 그런 사람이 과연 어디까지 무너질지 상상하자 피가 끓는 기분이 들었다. 미친 사람처럼 웃음이 나오기까지 했다.

“저, 대표님……?”

그 섬뜩함을 이기지 못한 로겐이 프레져를 불렀다. 어느덧 프레져의 얼굴에는 오래전 잃어버린 여유가 걸려 있었다.

“걱정 말고 내가 시키는 대로 해.”

“…….”

“부모와 자식의 상봉을 방해할 순 없으니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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