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녀가 떠난 뒤에 남겨진 것 (28)화 (28/156)

#28

가을의 수도는 몹시도 맑았다. 그러나 이 좋은 날에도, 로겐은 바깥 한번 나가지 못하고 실내에 갇혀 있어야만 했다.

“로든웨스트 공연을 마친 다음 날, 바로 노르티움으로 향할 계획입니다.”

예정된 업무량이 어마어마했기 때문이다.

“노르티움에 도착한 이튿날엔 샤를리즈 왕녀 전하와의 정찬이 예정되어 있습니다.”

“정찬?”

로겐이 읊는 일정을 듣는 프레져의 미간이 좁아졌다. 예정에 없던 계획이 갑작스레 추가됐기 때문이었다.

“왕녀 전하께서 꼭 만나 뵙고 싶다 하셔서요. 때마침 노르티움으로 오신다는데…….”

로겐은 살금살금 프레져의 눈치를 살폈다. 세르겔에 다녀온 대표는 신경 줄이 더할 나위 없이 예민해져서 돌아왔다.

첫 공연이 일주일 앞으로 다가와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가장 큰 요인은,

‘허탕을 치신 것 때문이겠지.’

세르겔까지 간 것도 모자라 그 먼 보타베르트까지 향했다. 역무원의 목격담 하나만 믿고.

‘감히 거짓 정보를 팔아?’

‘나, 나는 부탁받은 대로 했을 뿐이오!’

목격담이 거짓이었을 줄은, 그리고 그것이 모두 캐롤라인의 의도였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어디로 갔는지는 나도 모르오. 애초에 그런 걸 알려 줄 리가 있나.’

결국 다시 돌아 제자리였다. 캐롤라인의 행방을 알아낼 방법은 아무것도 없었다.

‘세르겔 역은 이런 뒷돈이나 받아먹는 자를 역무원으로 고용하나 보지?’

‘죄송합니다. 이 자는 오늘 바로 해고하겠습니다.’

‘해, 해고요?’

휴고의 말에 따르면, 해고 통보를 받던 남자의 표정이 몹시 괴이했다고 했다. 환희와 슬픔이 공존하는 얼굴이었다고.

덕분에 프레져의 분노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커졌지만.

거기에 안젤라와의 불화설까지 돌고 있으니, 지금 그를 잘못 건드렸다간 크게 깨질 것이 분명했다.

“다른 분도 아닌 왕녀 전하의 청이라 거절하기 어려웠습니다.”

왕녀 샤를리즈는 현왕 로널드 험프리의 동복누이로, 딸이 귀한 글랜포드 왕실의 유일한 왕녀이기도 했다.

“그 외에 다른 일정은.”

“없습니다. 왕녀 전하와의 약속이 워낙 특별한 경우라…….”

“그럼 됐어.”

예상보다 순순한 반응에 로겐은 조용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 인터뷰가 몇 시랬지?”

“오후 4시입니다. 내일 새벽 기차니 오늘은 일찍 쉬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내일은 첫 공연을 위해 단원 전체가 로든웨스트로 떠나는 날이었다.

“안젤라는?”

“어제 미리 출발하셨다고 합니다.”

소품실에서의 설전을 마지막으로 프레져는 안젤라의 얼굴을 본 적이 없었다.

‘보면 짜증만 날 텐데. 차라리 잘 됐군.’

프레져는 생각만 해도 피곤한 듯 손을 대충 휘저었다. 그 제스처에 로겐은 꾸벅 고개를 숙인 뒤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프레져는 의자를 빙글 돌려 창밖을 응시했다. 정원수를 손질하고 있는 정원사 몇 명이 보였다.

“돈으로 사람을 사는 건 어디서 배웠으려나.”

아마 백작가의 안주인으로 지내며 배운 거겠지. 제게 배운 방법을 그대로 사용하는 모습에, 그리고 그 손속에 제대로 놀아난 자신의 모습에 기가 찼다.

“이젠 화도 안 나는군.”

화도 나지 않는다는 말이 무색하게도, 화병엔 아직도 캐롤라인이 두고 간 꽃이 꽂혀 있었다.

한때 꽃이었다는 것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썩어 버린 아네모네가 화병 입구에 간신히 머리를 걸치고 있었다. 악취가 나지 않도록 투명한 유리병을 그 위에 덮어 놨을 뿐이었다.

공기가 통하지 않는 탓에 꽃은 더욱 흉물스럽게 썩어 갔다.

“내 옆에서 사는 게 그렇게도 끔찍했어?”

가짜 목격자를 만들어 나를 우롱할 만큼?

프레져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그러곤 앞으로 해야 할 일들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일단은 당장 있을 인터뷰가 먼저였다.

“작품 소개부터였나.”

프레져는 며칠 전 우편으로 받은 종이를 꺼내 들었다. 인터뷰 질문을 미리 받아 둔 것이었다.

「나비 부인은 어떤 인물?」

프레져는 질문에 대한 답을 곰곰이 생각하다 입을 열었다.

“사랑에 목숨을 건 어리석은 여인. 그 어리석음 때문에 스스로 파멸의 길로 들어선…….”

나비 같은 나의 부인.

* * *

헌티드하우스의 단원들은 꼬박 하루를 이동해 로든웨스트에 도착했다. 로든웨스트는 비교적 수도와 가까운 덕에 일찍 도착할 수 있었다.

단원들은 2인 1실을 사용하기로 했고, 극단의 간판인 안젤라와 임원진들만이 1인실을 사용할 수 있었다.

여독을 푼 직원들은 날이 밝자마자 바로 극장으로 향했다.

“여기야?”

극장엔 이미 온갖 무대 장치와 조명들이 설치되어 있었다. 서부엔 오페라 극장이 없는 탓에 규모가 가장 큰 공연장을 개조해서 사용하기로 한 것이었다.

단원들은 상기된 표정으로 무대에 달려갔다. 그러곤 각자 사용하게 될 물품을 살폈다.

“바퀴에 기름칠이 잘됐나? 엄청 부드럽게 움직이네.”

“조명도 새 걸로 달았나 봐!”

“역시 우리 대표님.”

사실 대표가 아니라 돈이 좋은 거였지만.

“리허설은 점심 이후에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그동안 각자 맡은 부분에 문제가 없는지 꼼꼼히 확인해 주세요.”

“네.”

그때 문이 열리고 눈에 익은 실루엣의 여자가 들어섰다.

“다들 도착했나 보군요.”

구슬을 굴리는 듯한 맑은 목소리는 단원들에겐 퍽 익숙한 것이었다.

“안젤라 양, 일찍 도착하셨네요?”

“전 어제 도착했는걸요.”

남들보다 하루 일찍 공연장에 도착하는 건 안젤라의 오랜 습관이었다.

공연장의 구조와 넓이, 객석의 위치를 확인하고, 목소리를 어떻게 내어야 할지 끊임없이 연구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자신의 일에 대한 애착만은 대단했기에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대표님은요?”

“극장주와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계십니다.”

“나를 찾나?”

때마침 들어온 프레져에 주위가 물을 끼얹은 듯 고요해졌다. 프레져가 안젤라의 초대를 의도적으로 거절했다는 기사 때문이었다.

“그, 그럼 식사를 마친 뒤 모이도록 하죠.”

로겐이 손을 휘저으며 다급히 해산 지시를 내렸다. 눈동자만 굴리고 있던 단원들은 삼삼오오 짝을 지어 공연장을 나가기 시작했다.

썰물처럼 사람이 빠져나간 자리엔 프레져와 안젤라 두 사람만이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 * *

“분위기 너무 살벌하다.”

릴리가 어깨를 부르르 떨며 말했다. 눈가에 서글서글한 주름이 진 그녀는 헌티드하우스의 플룻 연주자였다.

“그러니까요. 두 분 사이가 틀어졌다는 말이 아주 거짓은 아닌가 봐요.”

바순 연주를 맡은 로베만이 말을 덧붙였다. 그의 시선은 아직도 공연장 입구를 향해 있었다.

“공연이 코앞인데, 설마 싸우시진 않겠죠?”

“에이, 얼마나 점잖은 분들이신데요. 체통 없이 그러진 않으실 거야.”

그렇게 말하면서도 걱정이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체통은 무슨. 순 이기적이기만 한데.”

비아냥거리는 목소리에 릴리와 로베만이 고개를 돌렸다. 그들의 시선이 닿은 곳엔 뚱한 얼굴을 한 로잘린이 있었다.

“이렇게 될 줄, 정말 몰랐어요?”

“…….”

로잘린의 물음에 두 사람은 조용히 입을 닫았다. 사실 굴삭기 같은 프레져의 추진력에 불만을 가진 단원들은 한둘이 아니었다.

한 달 동안 왕국 전체를 도는 살인적인 일정을, 공연 한 달 전에 알려 주는 대표는 이 세상 어디에도 없을 테니까.

게다가 그들의 대표는 오만하기까지 했다. 단원들에게 무리한 요구를 하고도 사과 한마디조차 없었다.

“그래도 이번엔 공연비를 두둑하게 챙겨 주시기로 했잖아요.”

로베만이 프레져를 두둔하며 나섰다.

로베만은 헌티드 가문의 지원을 받아 음악 학교에 입학한 평민 출신 인재였다.

헌티드 백작가의 장학금과 호의가 없었다면 그가 고가의 악기인 바순을 잡아 볼 일은 평생 없었을 터였다. 그런 그가 프레져에게 감사한 마음을 갖는 것은 당연했다.

“로베만, 그래서 당신이 안 된다는 거예요.”

로잘린이 쯧쯧, 혀를 차며 말했다.

“돈 몇 푼에 홀라당 넘어가 버리면 어떡해요?”

“돈 몇 푼이라니요?”

자존심을 긁는 말에 릴리가 로베만을 밀치고 앞으로 나섰다.

“로잘린, 무슨 말을 그렇게 해요? 이 중에 돈에 연연하지 않고 일하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

헌티드 가문의 지원을 받은 건 그녀 역시 마찬가지였기에, 자연히 언성을 높일 수밖에 없었다.

“내 말은, 돈에 놀아나는 모습을 보이니까 대표가 우리를 우습게 아는 거라고요.”

릴리의 기세에 눌린 로잘린이 슬쩍 몸을 물리며 대답했다.

“다들 돈 말고도 중요한 게 있다는 걸 좀 알아야 해요.”

“돈보다 중요한 게 뭔데요? 그게 아니었으면 난 극장은커녕 학교 근처에도 못 갔을 텐데.”

“그러니까……!”

소란을 피우는 두 사람에 어느덧 구경꾼들이 모여들었다.

“됐어요! 이래서 평민들이랑은 심도 있는 대화를 나누면 안 된다니까!”

“뭐?”

꽥 소리를 지르는 로잘린에 릴리가 옷소매를 걷어붙였다. 이를 본 로잘린이 질겁하며 외쳤다.

“거 봐요. 무슨 일만 있으면 주먹으로 해결하려 하잖아! 우리 귀족들은 안 그런다고요!”

“그러는 로잘린은, 그렇게 잘 배우고 똑똑해서 입으로 똥을 싸고 다녀요?”

“뭐, 뭐요?”

“우리 귀족들 어쩌구 해 놓고. 틈만 나면 안젤라 씹고 다니는 거, 모를 줄 알았어요?”

릴리의 표현엔 필터가 없었다. 이에 로잘린의 얼굴이 순식간에 새빨개졌다.

“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에요! 별꼴이야, 정말!”

열심히 손부채질을 하던 로잘린은 휙 몸을 돌렸다. 그러곤 제 무리와 함께 황급히 자리를 떴다.

“릴리, 진정해요.”

“맞소. 보는 눈이 많아.”

다른 단원들은 성을 내는 릴리를 말리느라 진땀을 빼야 했다. 귀족 단원들은 전부 로잘린을 따라가고, 릴리의 주변에 남은 단원들은 모두 평민 출신이었다.

여기엔 누구의 입김도 작용하지 않았다. 몇 번의 설전 끝에 자연스레 집단이 나뉜 것이었다.

“뭐야. 안젤라랑 헌티드 백작의 사이가 안 좋다더니, 단원들 쪽도 마찬가지인 거 같은데?”

“이러다 진짜 와해되는 거 아니야?”

소동을 지켜보던 구경꾼들이 쑥덕였다. 개중에는 안젤라를 보기 위해 찾아온 극성팬도 몇 있었다.

“조만간 기사 하나 더 나겠네.”

안젤라가 낸 흠집은 어느새 극단 전체에 선명한 균열을 일으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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