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캐롤라인!”
휘청거리는 캐롤라인의 몸을 아크만이 다급히 붙잡았다.
“여, 여보! 빨리!”
아크만의 재촉에 로렌이 가게 안에서 약통과 물을 가져왔다. 비상시를 대비해 놔둔 약이었다.
“캐롤라인, 괜찮아요?”
캐롤라인은 대답하는 대신 쇄골 부근을 손으로 눌렀다. 핏줄이 불거진 얼굴이 새빨갰다.
“이런, 숨을 못 쉬는구나!”
빠르게 상황을 파악한 아크만이 캐롤라인의 몸을 의자에 기대게 만들었다. 그러자 로렌이 그녀의 입에 빠르게 약을 넣었다.
“하나, 두울, 천천히…….”
로렌의 카운트에 맞춰 캐롤라인이 서서히 숨을 뱉었다. 숫자가 하나씩 늘어갈 때마다 가파르게 솟던 가슴팍이 가라앉았다.
“옳지, 다섯.”
침착한 목소리와는 달리, 로렌의 주름진 손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동안 아크만은 가게에 다른 사람이 들어올 수 없도록 문을 잠갔다. 모두 에릭에게 배워 둔 것이었다.
몇 번의 카운트를 반복한 끝에 캐롤라인의 숨이 원래의 박자를 되찾기 시작했다.
“괜찮소?”
까칠하지만 다정한 목소리에 캐롤라인은 감고 있던 눈을 떴다.
아크만의 투박한 손이 제 얼굴에 맺힌 땀을 닦고 있었다. 정작 본인들의 얼굴에 흐른 식은땀은 닦을 생각도 못 하고 있는 두 사람이었다.
“……죄송해요.”
간신히 열린 입에서 나온 말은 사과였다.
“죄송하긴 뭐가 죄송해. 그게 방금 죽다 살아난 사람 입에서 나올 말이야?”
“죄송-”
“그렇게 죄송하면 아프지나 말라고!”
환자 앞이라는 것도 잊고 언성을 높인 아크만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쌀쌀한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뒤돌아선 아크만의 등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로렌은 그런 아크만을 응시하다 다시 캐롤라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놀랐죠?”
캐롤라인은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저으려다 멈칫했다.
“……네.”
이번만큼은 부정하지 않았다. 대신 온 힘을 다해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요. 괜찮아.”
로렌은 그런 캐롤라인을 끌어안았다. 그러곤 아기 달래듯 그녀의 등을 토닥였다. 꼭 어머니가 생각나는 다정한 행동이었다.
“괜찮아질 거예요.”
의연한 척 말하는 로렌의 목소리엔 물기가 가득했다. 캐롤라인은 이를 애써 모른 척하며 로렌을 끌어안았다.
‘정말 다가오고 있구나.’
죽음이.
캐롤라인은 무거운 숨을 내뱉으며 눈을 감았다. 그나마 다행인 점이 있다면 예전만큼 등골이 서늘하진 않다는 것이었다.
건강해지고 말리라는 다짐과는 별개로, 그녀의 가슴은 천천히 죽음을 받아들이고 있던 모양이었다.
‘그래도 슬퍼하지 않을 거야. 나는 지금이 더 행복하니까.
지금 제 옆엔 아크만과 로렌이 있었다. 제 소식을 듣고 한달음에 찾아올 마샤와 스테파니, 에릭이 있었다.
이렇게 좋은 사람들이 옆에 있는데, 자신을 다독여 주는 따뜻한 품이 있는데. 어찌 이 삶을 불행하다 할 수 있겠는가.
결혼 생활은 아니었지만, 삶의 마지막은 분명 행복할 터였다. 캐롤라인은 그렇게 생각하며 주먹을 세게 말아 쥐었다.
* * *
다음 날 아침, 캐롤라인은 바로 병원으로 향했다.
이번 진료엔 마샤와 스테파니, 에릭 세 사람 모두가 함께했다. 캐롤라인이 쓰러졌다는 소식에 급히 휴가를 낸 것이었다. 휴가를 받지 못한 에릭은 새벽 근무가 끝나자마자 바로 병원으로 찾아왔다.
“다행히 큰일은 아니군요.”
진찰을 마친 홉킨스 박사가 무표정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응급 처치를 아주 잘하셨더군요. 앞으로도 이렇게만 하시면 됩니다.”
이에 얼굴이 일그러진 건 마샤였다.
“큰일이 아닌데 왜 쓰러진 거죠?”
“그야…….”
홉킨스 박사는 입을 달싹이다 말고 캐롤라인을 응시했다. 그의 눈빛엔 이전보다 짙어진 수심이 드리워졌다.
“쓰러지는 게 대수가 아니란 것을, 이제는 아셔야 하지 않습니까.”
벌써 가을이었다. 시한부인 캐롤라인에게 남은 계절은 몇 개 되지 않았다.
“…….”
이곳에 모인 이들 중 그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기에, 다들 침묵을 지킬 뿐이었다.
“이제 일 년인가요?”
적막을 깬 것은 캐롤라인의 담담한 목소리였다.
괜찮은 척 연기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제는 남은 시간 동안 담담히 죽음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는 게 옳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 정도까진 아닙니다.”
“정말요?”
“확실히 발견 초기보다는 많이 좋아졌으니까요.”
의외의 대답에 캐롤라인의 눈이 동그래졌다.
“흉통도 그렇고, 호흡 곤란도 많이 사라졌다 하셨죠?”
“네. 쓰러진 건 이번이 노르티움에 와서 처음이었어요.”
“제대로 된 치료를 시작하기도 했지만, 단기간에 이리 좋아진 걸 보니, 아무래도 심리적 변화가 가장 큰 요인으로 작용한 것 같군요.”
이에 캐롤라인의 얼굴에 숨길 수 없는 안도감이 스쳤다.
홉킨스 박사는 빈말을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에게 이런 말을 들으니 무거웠던 마음이 조금 가벼워진 기분이었다.
“그래도 안도하시면 안 됩니다. 상태가 썩 좋지 못한 건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니까요.”
“…….”
햇볕 아래 누워 있다 찬물에 처박힌 기분이었다. 그래도 예전처럼 우는 사람은 없어 다행이었다.
* * *
똑똑.
오전의 햇살이 내려앉은 연구실 안,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이에 클리브는 쓰고 있던 안경을 벗었다.
“들어오세요.”
이윽고 앳된 얼굴의 의사 한 명이 들어왔다. 가슴팍엔 록하드 슈티안이라는 명찰이 붙어 있었다.
“선생님 앞으로 선물이 도착했어요.”
“선물?”
클리브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록하드가 건넨 물건은 선물치고는 지극히 조촐했다.
“열어 보면 아실 거라던데요?”
“그래?”
클리브의 기다란 손가락이 흰 봉투를 열었다. 매끄러운 재질의 봉투엔 그 흔한 발신인 하나 적혀 있지 않았다.
“세상에!”
안에 든 물건을 보고 탄성을 터트린 건 클리브가 아니었다.
“이거 오페라 티켓 아니에요?”
봉투 안에는 먹색 도장이 찍힌 티켓과 함께 편지 하나가 동봉되어 있었다. 티켓 오른편에 찍힌 도장은 헌티드하우스의 외관을 본떠 만든 것이었다.
“와, 헌티드하우스! 게다가 초대석!”
티켓에 적힌 글씨를 본 록하드가 자리에서 방방 뛰었다. 그러나 편지를 읽는 클리브의 눈동자는 싸늘하기만 했다.
“초대석이면 맨 앞줄인 거예요? 아, 오페라는 다르려나? 전체적인 무대를 봐야 하니까…….”
“록하드.”
“네?”
“이거 가져온 사람, 지금 어디 있어?”
“1층에 있을 텐데, 아마 지금은 갔을… 어, 선생님?”
쉴 새 없이 쫑알대는 록하드의 옆을 클리브가 빠르게 지나갔다.
1층 로비까지 내려온 그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건물 밖으로 나갔다. 그러나 배달부는커녕, 그 비슷한 차림을 한 사람도 찾아볼 수 없었다.
이렇게 빠른 속도로 돌아간 것을 보니 평범한 배달부는 절대 아닐 텐데.
“늘 제멋대로시라니까.”
클리브가 이마를 짚으며 중얼거렸다. 얼떨결에 들고 온 편지 위로 유려한 필기체가 돋보였다. 손으로 관자놀이를 짚던 클리브는 연구실로 돌아가기 위해 다시 걸음을 옮겼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바람에 나부끼는 연갈색 머리칼을 보기 전까진.
“캐롤라인?”
이름을 입 밖에 뱉는 순간, 제비꽃처럼 연한 눈동자가 시야에 들어왔다. 클리브는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살금살금 걸어 캐롤라인의 뒤쪽으로 향했다.
“캐롤라인.”
그러곤 그녀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제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캐롤라인의 고개가 클리브의 손이 얹어진 방향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클리브 선생님?”
콕.
클리브의 긴 손가락이 캐롤라인의 말랑한 뺨에 닿았다. 손끝에 눌린 뺨이 오목하게 찌부러졌다.
“좋은 아침입니다, 캐롤라인.”
“…그레타식 아침 인사인가요, 이건?”
“하하하.”
제 볼을 가리키며 말하는 캐롤라인에 클리브가 웃음을 터트렸다. 손을 거둔 그는 꽉 말고 있던 주먹을 펼쳤다. 그러자 불투명한 종이에 포장된 초콜릿 세 알이 모습을 드러냈다.
“무설탕 초콜릿입니다. 걱정 안 하고 드셔도 되는 몇 안 되는 간식 중 하나죠.”
“초콜릿이 아니었다면 안 받아 줬을 거예요.”
캐롤라인이 밉지 않게 눈을 흘기며 입을 열었다. 에릭에게 설탕과 버터 제한령을 받은 그녀에겐 간식 하나하나가 너무도 귀했다.
“그거 참 다행이네요.”
능청스럽게 대꾸한 클리브는 주섬주섬 포장지를 뜯는 손을 응시했다. 가느다란 손끝에 달린 손톱이 자그마했다.
“오늘 진료 있는 날이에요?”
“아마…도요?”
캐롤라인이 말허리를 늘였다. 쓰러져서 왔노라 말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아마도가 뭐예요.”
하지만 클리브가 그 간극을 읽어 내지 못할 리는 없었다.
캐롤라인에게 남자는 프레져와 그녀의 오빠뿐이었으나, 세상 모든 남자들이 그들 같은 것은 아니었으므로.
“무슨 일 있었어요?”
클리브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이내 자초지종을 들은 그의 미간이 점점 좁아졌다.
“무슨 일이 있으면 바로 내 연구실에 찾아오라니까요.”
“실험에서 받은 약 때문은 아니니까요. 홉킨스 박사님도 스트레스 때문이라 하셨는걸요.”
괜찮다는 의미를 담아 캐롤라인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나 클리브의 미간에 팬 주름은 도통 펴질 줄을 몰랐다.
“그래도 일 년은 아니래요.”
“뭐가요?”
“남은 시간 말이에요.”
굳은 분위기를 풀기 위해 캐롤라인이 싱긋 웃었다.
하지만 효과는 없었다. 클리브의 낯빛은 여전히 어둡기만 했다.
“빨리 방법을 찾아야 할 텐데요.”
캐롤라인이 시한부 선고를 받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임상 실험실에선 클리브뿐이었다. 희망을 찾기 위해 모인 사람들인데, 괜히 암울한 말을 해서 기운을 뺄 필요가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수술로 해결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클리브가 턱을 문지르며 중얼거렸다.
의료 기술이 발달한 그레타에서는 수술을 통한 치료 사례가 많았다. 종종 수술을 통해 손상된 장기를 복구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외상에 의한 경우였다.
캐롤라인처럼 선천적인 기형을 타고난 사람에게는 소용이 없었다.
‘다른 곳도 아닌 심장인데. 장기를 대체할 물질을, 대체 어디서 찾는다고.’
게다가 글랜포드 사람들은 그레타인들보다 보수적이었다. 종교적 색채가 그레타보다 짙기 때문이었다. 가슴을 갈라 장기를 들추는 것은 상상조차 해 보지 못했을 터였다.
클리브는 캐롤라인의 가슴팍을 보며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저기, 선생님?”
“…….”
“시선이, 조금…….”
“…아,”
제 잘못을 깨달은 클리브가 황급히 시선을 거뒀다. 민망함과 미안함에 순식간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죄, 죄송합니다.”
“괜찮아요. 고의가 아니었잖아요.”
“그래도…….”
연구할 대상을 뚫어져라 응시하는 건 그의 오랜 습관이기도 했다.
‘숙녀분께 이게 무슨 추태람.’
클리브는 옷깃을 세운 뒤 그 뒤에 제 얼굴을 숨겼다.
“어떻습니까.”
“……뭐가요?”
클리브의 모습을 훑은 캐롤라인이 미간을 좁히며 되물었다.
“해군 같지 않습니까?”
“…….”
“해군들은 거센 바닷바람 속에서 소리를 잘 듣기 위해 이렇게 깃을 세운다고 하더군요. 소리를 모으려고요.”
능청을 떠는 것처럼 보였으나, 이는 일종의 꼼수였다. 쥐구멍이 있다면 숨고 싶은 마음을 옷깃 뒤에 숨긴 것이었기에.
당황하면 쉽게 붉어지곤 하는 얼굴을 숨기려는 수작이기도 했다.
“오… 정말 유익한 정보네요.”
캐롤라인이 어색하게 맞장구를 쳤다.
의사를 상대로 정색은 못 하겠고. 그나마 자연스럽게 보일 수 있는 유일한 반응이었다.
“그렇죠?”
그때 미지근한 듯 선선한 바람이 불어왔다. 가볍게 스치는 바람에 클리브의 밀빛 머리카락이 살랑살랑 흔들렸다.
바람이 꽤 오래 불었음에도 그의 얼굴은 좀처럼 식을 줄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