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원래 길이 이랬나?’
그 감정의 이름은 어색함이었다.
지난 2년간 프레져가 캐롤라인의 침실을 먼저 찾은 것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상대를 먼저 찾는 쪽은 늘 캐롤라인이었기에.
그녀는 항상 프레져의 시야가 닿는 곳에 있었고, 같은 곳에 서서 그를 기다렸다. 그런 주제에 또 가까이 다가오지는 않았다. 혹 프레져가 귀찮아하기라도 할까, 늘 일정한 거리를 유지했다.
눈을 돌리면 있지만, 잡히진 않는. 그런 애매한 거리가 그들 사이에 존재했다.
“…….”
프레져는 말없이 문고리를 쥐었다. 손아귀에 닿는 그립감이 몹시도 낯설었다.
달칵.
문을 열고 들어가자 깔끔하게 정돈된 방이 모습을 드러냈다. 주인이 자리를 비운 지 한 달이 넘었음에도, 방에서는 그녀의 향기가 옅게 풍겼다.
“그대로군.”
프레져가 제자리에 가지런히 놓인 물건들을 보며 중얼거렸다.
드레스 룸에 걸린 옷도, 침대 위의 이불도, 보석함 안의 장신구도. 모든 게 그대로였다.
아니, 사실 그대로라고 자신할 수 없었다. 들어와 본 적이 없으니 무엇이 바뀌고 무엇이 그대로인지 알 리가 만무했다. 그대로라 말한 건 순전히 그의 오기고 고집이었다.
‘저 목걸이는 언제 사 준 거였지.’
보석함을 가득 채운 장신구들이 휘황찬란했다. 그러나 정작 캐롤라인의 목에 걸려 있는 것을 본 적은 없었다.
“그렇게 기쁘게 받아 놓고서는.”
앞에서만 기쁜 척, 자신을 사랑하는 척하는 것은 그 여자의 특기인 모양이라 생각하며 프레져는 발코니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넓게 난 창문 옆엔 하늘색 안락의자 하나가 놓여 있었다. 다른 가구들과는 달리 손을 많이 탄 모양인지 보풀이 잔뜩 일어나 있었다.
“이런 물건은 왜 안 버리는 거지?”
프레져는 미미하게 인상을 찌푸렸다.
헌티드의 이름을 가진 자는 누구든 결벽에 가까울 정도로 완벽해야 하기에, 낡고 닳은 물건을 굳이 사용하는 캐롤라인의 습관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의자가 있는 위치에서는 모든 것이 다 보였다. 봄을 그대로 옮겨 둔 듯한 정원도, 수백 년의 역사가 살아 숨 쉬는 고택도, 저택을 둥글게 감싸 안고 있는 사시사철 푸르른 소나무 숲도.
“원하는 건 다 줄 수 있는데.”
남들이 그토록 원하는 것이 전부 그녀의 발아래 있는데.
대체 왜 도망친 거야?
“…….”
뒤의 문장은 차마 입 밖으로 뱉지 못했다. 억지로 삼킨 말 때문인지 목구멍이 까슬했다.
프레져는 소나무 숲 뒤편에 우뚝 솟아 있는 첨탑을 응시하다 방에서 나왔다.
“당신은 헌티드를 떠나서 절대 행복할 수 없어.”
성대를 쥐어짠 듯 뱉은 목소리가 낮았다.
안락의자에 앉으면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이 자신의 집무실이라는 사실을, 프레져가 알 리 없었다.
* * *
아름다운 갈대의 도시 세르겔.
그곳에서 휴고는 남들보다 바쁜 아침을 보내고 있었다. 헌티드하우스의 직원들은 그가 북부 공연 준비를 위해 노르티움으로 향했다 알고 있지만, 실은 아니었다.
그는 북부의 상업 도시 중 하나인 세르겔에 머물며 캐롤라인에 대한 정보를 찾고 있었다. 무역 도시인 세르겔엔 늘 많은 사람이 오갔고, 그래서 다양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통신망이 발달해 있었다.
그는 헌티드 가문에 공식적인 기록이 남지 않도록 다른 권한으로 사람을 풀었다. 권위와 명예를 중요시하는 제 대표를 위해서였다.
하지만 온갖 정보를 끌어모아도, 캐롤라인과 에릭에 대한 정보를 쉬이 찾아낼 수가 없었다.
“미치겠네.”
휴고는 벽면 한쪽에 걸려 있는 기차 노선도를 보며 중얼거렸다. 세르겔에서 캐롤라인의 목격담을 처음으로 들은 것이 바로 어제였다.
캐롤라인을 동부에 위치한 플라이크까지 데려갔던 마부의 말을 따라 움직인 끝에, 북부에 도착한 휴고는 그녀의 인상착의를 기억하는 유일한 목격자인 역무원을 만날 수 있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캐롤라인은 세르겔보다 아래 위치한 도시인 보타베르트로 떠났다고 했다. 세르겔에 방문한 것은 환승을 위해서인 모양이었다.
“이 소식을 대표님께 전해야 하는데.”
정보의 양이 지나치게 소소했다.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나았기에, 휴고는 프레져에게 소식을 전하기 위해 펜을 들었다.
똑똑.
“휴고, 편지가 왔는데.”
문밖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휴고는 들고 있던 펜을 내려놓았다.
문을 열고 들어온 이는 고아원에서부터 함께 해 온 친우인 빌이었다. 그는 프레져가 귀족의 도리에 맞지 않는 일을 시킬 때마다 빌과 함께 움직이곤 했다. 이번 일도 마찬가지였다.
“편지?”
“봉투에 찍힌 문양이 제법 익숙하긴 한데.”
빌이 손에 들린 편지를 흔들어 보이며 말했다. 이에 휴고는 자리에서 튀어 오르듯 벌떡 일어섰다. 빌의 손에 있는 편지는 보지 않아도 누가 보냈는지 예측 가능한 것이었다.
은가루를 섞은 푸른 왁스로 봉한 편지는 그의 상사이자 은인, 프레져 헌티드로부터 온 것이었다.
“줘 봐. 얼른.”
빌에게서 빼앗듯 편지를 낚아챈 휴고는 안에 적힌 내용을 빠르게 읽어 가기 시작했다.
“뭐라셔?”
“하아…….”
휴고는 대답하는 대신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에 좋지 않은 소식임을 직감한 빌은 짧게 혀를 찼다.
“이쪽으로 오시겠대. 직접.”
“언제?”
“이미 출발하신 모양이야.”
“뭐?”
휴고의 말을 들은 빌의 눈이 커다래졌다. 책상 위에 떨어진 편지지엔 단 한 줄의 문장이 적혀 있을 뿐이었다.
「편지를 부친 다음 날 바로 출발할 예정이니 대기하고 있도록.」
“허.”
짧고 굵은 한 마디에 빌은 탄식을 터트렸다.
수도에서 세르겔까지는 꼬박 나흘이 걸렸다. 지도상으로 그리 먼 거리는 아니었으나, 글랜포드의 젖줄이라 불리는 강인 레닐 강을 끼고 있기 때문이었다.
“우편 소인을 보니… 늦어도 오늘 저녁 즈음엔 도착하시겠네.”
“그러게. 아직 알아낸 게 없지 않아?”
“그렇지.”
휴고는 초점 없는 눈을 하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빌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일단 대표님 쓰실 호텔부터 예약해야겠다.”
“그건 내가 할게. 넌 급한 일 먼저 봐.”
대충 손을 휘적거린 빌은 빠르게 걸어 문 쪽으로 향했다.
“근데.”
“음?”
빌이 문고리를 잡으려다 말고 입을 열었다.
“그런데 우리가 찾고 있는 사람이 대체 누구길래 이러는 거냐?”
이에 책상 위에 널브러진 서류를 정리하던 휴고가 힘없이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비밀이다.”
* * *
이른 저녁, 호텔 안으로 두 남자가 들어섰다. 프레져와 그의 수행원을 맡은 청년 알프레도였다.
장시간 이동에 지쳤을 게 분명함에도 프레져는 흐트러짐 없이 완벽한 모습을 자랑했다. 포마드를 발라 깔끔하게 넘긴 머리와 행커치프를 가슴에 단정히 꽂은 프레져는 대리석을 깎아 만든 석상처럼 아름다웠다.
“대표님, 오셨습니까.”
미리 마중 나와 있던 휴고가 프레져를 향해 공손히 인사했다.
“먼 길 오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사족은 됐고, 들어가서 본론부터 이야기하도록 하지.”
“네.”
휴고는 티가 나지 않도록 바지춤에 손바닥을 닦았다. 그러곤 알프레도를 향해 먼저 들어가라는 제스처를 보냈다.
그는 프레져를 호텔 꼭대기 층으로 이끌었다. 도시 전경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곳엔 오직 귀빈들만을 위한 프라이빗 룸이 있었다.
“시간을 끄는 걸 보니 알아낸 게 없는 모양이군.”
아니나 다를까, 가장 우려했던 말이 프레져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
정곡을 찔린 휴고는 마른침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음료를 내오던 직원마저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분위기에 멈칫했다. 휴고는 우아하게 잔을 드는 프레져의 눈치를 살피다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래도 정보가 전혀 없진 않았습니다.”
휴고가 가방에서 서류 하나를 꺼내 프레져에게 건넸다.
“다행히도 당시 마님의 행색을 기억하는 역무원이 한 명 있더군요.”
서류에는 역무원의 목격담과 함께, 왕국 북동쪽으로 향하는 기차 노선 몇 개가 그려져 있었다.
“마님과 동행한 사람은 총 세 명이라고 합니다.”
“남자 하나는 당연 에릭 포스터일 테고.”
여자 하나는 스테파니라는 하녀일 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남은 한 사람은 누구지?”
캐롤라인을 동부까지 데리고 갔던 마부는 분명 캐롤라인과 동행한 인원이 두 명이라고 했다.
“미리 대기 중이던 사람이 합류하지 않았나, 하는 게 제 추측입니다.”
“영악하기도 하지.”
서류를 내려놓은 프레져의 얼굴에 비소가 걸렸다.
그녀는 대체 언제부터 이 일을 계획했던 걸까?
맑은 낯으로 웃던 캐롤라인을 떠올리자 입 안이 쓴 휴고였다.
‘이렇게 치밀하신 분인지는 미처 몰랐는데.’
“마님이 탑승하신 기차는 왕국 북동부의 보타베르트로 향하는 기차였습니다. 노선을 보면 아시겠지만, 보타베르트에서 갈아탈 수 있는 노선은 세 개고요.”
보타베르트는 세르겔보다 남쪽에 있는 도시였다. 그리고 보타베르트에서 갈라지는 세 개의 노선은 각각 왕국 동부와 북동부에 있는 지역을 향해 뻗어 있었다.
“결국엔 다시… 동부입니다.”
죄인처럼 고개를 숙이는 휴고에 프레져가 들고 있던 종이를 내던졌다. 언성을 높이지 않으려 이를 꽉 깨물었지만 소용없었다. 턱에 힘줄만 불거질 뿐이었다.
“사람을 갖고 놀아도 유분수지.”
동부는 이미 그녀의 발이 닿은 곳이었다. 그녀가 자신을 속이면서 휴양을 가겠다던 별장이 바로 동부에 있었으니까.
갔던 곳엔 들르지 않을 거라 생각해 동부 공연을 제일 마지막으로 계획했다.
그런데 보란 듯이 다시 동부로 향하다니.
“나를 기만해?”
캐롤라인이 제 머리 꼭대기를 지근지근 밟고 있는 느낌이었다.
“일단 보타베르트와 이 세 개의 도시부터 뒤져.”
프레져가 노선을 손으로 짚으며 말했다. 그의 기다란 검지 아래에는 보타베르트 역이라고 적힌 글자가 깔려 있었다.
“내일 아침 바로 보타베르트로 향해. 아니, 지금 당장.”
“알겠습니다.”
어차피 막차는 끊겼다. 그러나 프레져의 면전에 대고 그리 말할 자신은 없었다.
“이번엔 나도 직접 보타베르트로 가지.”
용건을 마친 프레져는 미련 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주 짧은 시간이었으나 술이 가득 담겨 있던 잔은 텅 비어 있었다.
휴고는 어딘가 성급해 보이는 발걸음으로 자리를 뜨는 프레져의 뒷모습을 눈으로 쫓았다.
“결국 직접 움직이시는구나.”
예외를 모르는 남자가 본격적으로 선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견고한 벽 안에 웅크려 있던 것은 용암처럼 뜨거운 감정이었다.
까딱 잘못했다가는 모든 것을 녹여 버리고 마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