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녀가 떠난 뒤에 남겨진 것 (21)화 (21/156)

#21

나갈 채비를 마친 캐롤라인은 스테파니와 함께 마차에 올랐다.

“떨리세요?”

스테파니가 미약하게 진동하는 캐롤라인의 손을 보며 물었다. 이에 캐롤라인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응, 조금.”

오늘은 그녀가 임상 실험에 참여하는 첫날이었다. 마샤 대신 스테파니가 동행한 이유도 이 때문이었다. 마샤는 아직도 임상 실험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를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스테파니는 무어라 말을 잇는 대신 그녀의 손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맞닿은 피부로 온기가 흘러들어왔다.

“따뜻하네.”

“그렇죠?”

스테파니가 방싯 볼을 부풀리며  웃었다. 겨우 체온을 나눠 가졌을 뿐인데, 그것만으로도 가슴은 금세 안정을 되찾았다.

캐롤라인은 스테파니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눴다. 어째 속도가 점점 느려지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 찰나, 마부가 좌석과 연결된 창문을 열었다.

“손님, 실례가 안 된다면 길을 돌아가도 괜찮겠습니까?”

마부의 목소리엔 난감한 기색이 어려 있었다.

“무슨 일인데요?”

“광장에 사람이 너무 많아서 말입니다. 좀 돌아가더라도 안전한 길로 가는 게 나을 듯 싶어서요.”

캐롤라인은 커튼을 걷어 창밖을 내다봤다. 광장 중앙을 가로지르는 줄이 길게 늘어져 있었다.

“아침부터 사람이 왜 이렇게 많나 했더니, 오늘이 헌티드하우스의 공연 예매일이더군요.”

“…….”

“이렇게 사람이 많을 줄 알았으면 진작 돌아가는 거였는데 말이죠.”

“…….”

커튼을 쥔 캐롤라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헌티드하우스라는 말에 순간 사고회로가 정지한 것 같았다.

“저기, 손님?”

“아, 네. 돌아가 주세요.”

마부의 재촉에 캐롤라인은 다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가방에서 오늘 아침에 받은 신문을 꺼냈다. 세상 돌아가는 재미를 알아야 한다며 아크만이 쥐여 준 것이었다.

가방에 대충 욱여넣은 탓에 구겨진 첫 장을 넘기자 익숙한 건물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뽐내고 있는 돔 형태의 건물은 바로 헌티드하우스였다. 그 아래에는 전 지역 모두 같은 날 예매를 진행한다는 기사가 짤막하게 쓰여 있었다.

“오늘이 예매일이었구나.”

캐롤라인이 짧게 탄식했다.

“죄송해요. 제가 잘 알아봤어야 했는데…….”

“네 잘못이 아니야.”

캐롤라인은 자책하는 스테파니를 다독였다. 그러곤 잠시 창밖을 응시하다 걷어 두었던 커튼을 쳤다.

“공연이야 어찌 됐든, 난 내가 할 일을 하면 돼.”

“맞아요. 마님의 목표는 건강해지는 거니까요.”

“그래. 난 오로지 치료에만 집중하면 되는 거야.”

캐롤라인은 스스로에게 주문을 걸듯 같은 말을 끊임없이 반복했다. 그러나 그녀의 간절한 염원과는 달리, 두근거리는 가슴이 좀처럼 진정되질 않았다.

백작저에서든 밖에서든, 그 남자를 외면하고 사는 건 좀처럼 쉬운 일이 아닌 모양이었다.

캐롤라인은 가슴에 손을 얹은 채 조용히 다짐을 되새겼다.

“찾아온다 한들 달라지는 건 없을 거야.”

그녀의 나지막한 읊조림이 좁은 마차 안에 울려 퍼졌다.

* * *

「성공적인 티켓 오픈!」

프레져는 신문 2면을 장식한 문구를 빤히 쳐다보았다. 1면에는 진부하기 짝이 없는 인사말과 함께 국왕 로널드 험프리의 얼굴이 인쇄되어 있었다. 보아하니 새로이 공을 세운 평민에게 작위를 내린 모양이었다.

“…….”

이를 본 프레져의 얼굴이 더할 나위 없이 싸늘해졌다.

평민들에게 작위를 내리는 것은 국왕 나름의 전략이었다.

대륙 끝에서부터 스멀스멀 계몽의 불길이 번지고 있었고, 의회 설립이나 입헌 군주제를 택한 나라가 다수 생겨나고 있었다. 왕위에 앉은 자라면 응당 불안해할 만한 변화였다.

왕에게 왕좌에서 물러나는 것보다 두려운 일은 없었고, 로널드 험프리는 민심이 저를 떠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는 민심을 붙잡을 방법으로 평민에게 작위를 내리는 것을 선택했다. 공을 쌓고 왕가에 헌신한다면 귀족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 주기 위함이었다.

귀족이라고 해 봤자 남작이나 준남작 정도의 하찮은 작위가 전부였으나 평민들은 열광했다. 풍요로운 삶과는 별개로, 그들의 가슴속엔 여전히 신분 상승을 향한 열망이 남아 있는 모양이었다.

캐롤라인의 가문인 웨즐 남작가 역시 이를 바탕으로 세워진 가문이었다. 물론 당사자들은 꿈에도 모르고 있겠지만.

“신분을 가지고 장사 놀음이나 하다니.”

왕권 유지를 위해 작위 수여를 남발하는 국왕도, 이를 좋다고 받아 드는 멍청한 평민도. 모두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짜증이 치밀었으나 굳이 입 밖으로 내뱉지는 않았다. 그는 어려서부터 왕가에 대한 존중을 배워 온 귀족이므로.

프레져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밖을 내다봤다. 건물 1층, 매표소 앞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줄을 지어 서 있었다.

“대표님.”

문밖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프레져는 사람들의 정수리를 내려다보고 있던 시선을 거뒀다.

“들어와.”

승낙과 함께 안으로 들어온 사람은 로겐이었다. 그의 옆구리엔 두툼한 서류철이 끼워져 있었다.

“헌티드하우스 앞으로 할당되어 있는 표가 전부 매진됐습니다! 겨우 두 시간 만에요!”

예매는 5개 지역의 극장과 헌티드하우스 매표소에서 진행됐다. 헌티드하우스 앞으로 배정된 몫은 전체 표의 3분의 1 정도였는데, 이 수량이 두 시간 만에 팔렸다는 것은 이번 공연이 엄청난 인기를 누리고 있다는 것을 뜻했다.

“정말 대단하지 않습니까?”

로겐이 싱글벙글 웃으며 말했다. 그러나 소식을 듣는 프레져의 얼굴은 무감하기만 했다. 그는 특유의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로겐을 쳐다보다 창문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럼 매표소 앞에 저 사람들은 뭐지? 아직도 줄을 서 있는데.”

“아, 저들은 구구절절한 사연을 가진 이들입니다.”

“사연?”

“예. 표를 구해 오지 못하면 주인에게 혼이 난다는 둥, 돈을 더 줄 테니 좋은 자리로 바꿔 달라는 둥……. 별 말도 안 되는 이유로 표를 얻으려는 이들 말이죠.”

“예상은 했지만, 한 무더기일 줄이야.”

프레져는 헛웃음을 터트렸다. 주인에게 혼이 난다는 것은 귀족 가문의 사용인쯤 되겠고, 돈을 더 얹어 주겠다며 흥정을 하는 이는 사업으로 재산을 불린 젠트리쯤 될 것이었다.

이번 공연이 역대 최고의 규모와 연출을 보여 주는 만큼 경쟁이 치열한 모양이었다.

“감히 내 예술을 흥정하려 들다니.”

이에 프레져의 미간이 구겨졌다. 젠트리들은 돈만 있으면 모든 게 해결될 줄 아는 모양이었다. 예술의 털끝만큼도 모르는 이들을 상대로 오페라를 공연한다는 것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다른 지역은?”

“서부와 중부도 방금 매진되었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나머지 지역은 거리가 있어 아직 소식을 듣진 못했지만, 이곳과 다르진 않을 거라 생각합니다.”

로겐이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그러나 기쁜 소식을 듣고서도 프레져의 표정은 좀처럼 펴질 줄을 몰랐다.

“암표가 도는 일이 없도록 관리 잘해. 직원들 컨디션도 잘 챙기고.”

“알겠습니다.”

인사를 마친 로겐은 다시 일을 하기 위해 밖으로 나섰다.

프레져는 다시금 자리에 앉아 신문을 펼쳐 들었다. 그러나 한 면을 다 읽지도 못한 채 종이를 구겨 버리고 말았다.

* * *

캐롤라인은 담당의인 홉킨스 박사에게 진료를 받았다. 문진과 피 검사를 하다 보니 시간이 훌쩍 지나있었다.

“오늘이 임상 실험에 참여하는 첫날이군요.”

“네.”

캐롤라인이 어딘가 비장해보이기까지 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홉킨스 박사는 부드러운 미소로 답했다.

“긴장하실 필요 없습니다. 건강에 해가 되는 실험은 절대 이뤄지지 않으니까요.”

그는 자신을 따라 어색한 미소를 짓고 있는 캐롤라인에게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임상 실험실 위치를 표시해 둔 지도였다.

캐롤라인과 스테파니는 진료실에서 나와 1병동으로 향했다. 간호사의 안내를 받아 이동하자 ‘임상 치료실’이라는 팻말이 달린 진료실이 나타났다.

“임상 실험실이 아니라 치료실이네요?”

“네. 실험실이라고 하면 환자들이 꺼려 하는 경향이 있어서요.”

간호사의 대답에 두 사람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실험실보다는 치료실이라는 단어가 어감이 부드러웠다.

“그럼 전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응. 시간 좀 걸릴 테니까 식사라도 하고 와.”

“네.”

치료실 문 앞에 선 캐롤라인은 크게 심호흡을 했다. 환자를 대상으로 하는 실험. 그 실험이라는 단어가 그녀의 가슴을 선득하게 했다.

“해야지. 할 수 있어. 밑져야 본전인데.”

캐롤라인은 주먹을 세게 말아 쥔 채 치료실 안으로 들어갔다. 의료진들의 딱딱한 얼굴과 엄숙한 분위기를 상상하며.

그러나 펼쳐진 광경은 그녀가 예상했던 것과는 사뭇 달랐다.

“야! 너 자꾸 내 거 훔쳐 먹을래?”

“훔쳐 먹은 거 아니거든? 대놓고 먹은 거거든!”

밤톨만 한 아이들이 말다툼을 벌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품에는 빵 봉지를 끌어안은 채였다.

“…….”

잠시 놓았던 넋을 다시 챙겨 넣은 캐롤라인은 주위를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잘못 찾아온 게 아닌가 하는 의문은 둘째치고, 이 싸움을 말리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환자분?”

그때 웬 남자 하나가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네, 네?”

예상치 못한 곳에서 들린 목소리에 캐롤라인은 화들짝 놀라 남자를 돌아봤다. 흰 가운을 입고 있는 걸 보니 의사가 맞는 것 같긴 한데.

‘의사가 이렇게 생겨도 되는 건가?’

캐롤라인은 순간 제 눈을 의심했다. 제가 있는 곳이 병원이 아닌, 극장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눈앞의 남자는 그 정도로 아름다웠다.

배우를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아까울 정도로.

가을 햇빛을 녹여낸 듯한 밝은 금발과 그에 대비되는 하늘빛 눈동자가 무척이나 눈부신 사내였다.

‘프레져만큼은 아니지만.’

남자는 프레져와 분명 달랐다. 유한 느낌을 주는 눈매도, 부드럽게 휘어 있는 입꼬리도. 키가 크다는 것만 빼면 무엇 하나 비슷한 점이 없는데.

무의식적으로 떠오르는 프레져의 얼굴을 지울 수는 없었다.

“성함이?”

남자는 줄에 걸어 둔 안경을 고쳐 쓰며 입을 열었다.

“캐롤라인 헌티드인데, 아무래도 제가 잘못 찾아온…….”

“아, 잘 찾아오셨네요.”

입으로 만년필 뚜껑을 여는 행동이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남자의 손끝에 자리한 펜촉이 그녀의 이름이 있는 곳에 가 닿았다.

“…….”

종이 위에 그어지는 선명한 동그라미를 보며, 캐롤라인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명단 맨 아래에 적힌 것은 분명 자신의 이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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