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안젤라의 손이 프레져의 팔을 성마르게 쥐었다.
탁!
프레져는 안젤라에게 끌려가는 대신, 그녀의 손을 쳐 냈다. 그러곤 빈 소품실을 향해 앞장서 걸었다.
“허.”
안젤라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을 지은 채 프레져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사람이 없는 소품실은 조용했다. 옆방에서 나는 음악 소리만이 간간이 벽을 타고 들려올 뿐이었다. 불을 켜지 않은 방 안엔 옅은 햇빛만이 먼지처럼 뿌옇게 내려앉아 있었다.
“지금 뭐 하자는 거예요?”
문이 닫힘과 동시에, 안젤라의 입에서 노기 어린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평소에도 목 관리를 위해 큰소리를 내는 걸 자제하던 그녀였다. 그런 그녀의 입에서 이 정도의 고성이 나왔다는 건 꽤 많이 화가 났음을 뜻했다.
그러나 프레져는 안젤라에게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저 그녀의 발아래 떨어져 있는 나비 모양의 소품을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공연 날짜를 바꾸겠다고요? 이제 와서?”
날카로운 목소리에 프레져는 바닥에 고정하고 있던 시선을 들어 올렸다.
“당연히 합당한 이유가 있겠죠?”
납득 가능한 이유가 아니라면 가만있지 않을 기세였다.
프레져는 그런 안젤라를 무감한 눈으로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나비 부인의 작곡가가 어디서 자랐는 줄 압니까?”
난데없는 질문에 안젤라가 미간을 구겼다.
그레타 출신의 작곡가는 청소년기의 대부분을 노르티움에서 보냈다. 그 탓에 작품 속 대다수의 장면이 글랜포드 북부를 배경으로 하고 있었다.
“그가 태어나 처음 가 본 극장이 노르티움 오페라 극장이었죠.”
“그래서요?”
“다른 공연도 아닌 나비 부인입니다. 작곡가의 추억이 담긴 곳에서 초연을 올리는 것이 더욱 기념적이지 않겠습니까?”
“겨우 그런 이유로 공연 일정을 변경한다고요?”
이에 안젤라의 얼굴이 더욱 사납게 일그러졌다.
원래 귀족들이란 무언가를 기념하고 상징하는 것을 병적일 정도로 좋아하는 족속이었다. 그들은 프레져의 결정을 흔쾌히 받아들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평민들은 아니었다.
공연은 하나의 약속이었고, 자본과 실용주의를 토대로 움직이는 젠트리는 약속을 어기는 걸 몹시 싫어했다.
“대표님, 좀 솔직해져 봐요.”
안젤라의 얼굴에 싸늘한 비소가 걸렸다. 그녀는 밤의 여왕을 연기할 때보다 더 냉랭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대표님이 하려는 일에 단 한 점의 사감도 없다고 자부할 수 있나요?”
“…….”
“이 결정이 오롯이 헌티드하우스를 위해서라고 맹세할 수 있냐고요.”
안젤라의 물음에 프레져의 입이 다물렸다.
사실 프레져도 알고 있었다. 이제 와 공연 날짜를 변경하는 건 말도 안 되는 짓이라는 것을.
그러나 속에서 터져 나오는 감정은 좀처럼 억눌러지지가 않았다. 이성을 비집고 흘러나오는 감정은 꼭 방파제를 넘어오는 거센 파도 같았다.
그의 침묵에서 대답을 읽은 안젤라는 피식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녀는 부채를 제 손바닥에 내리치며 입을 열었다.
“당신의 사적인 일에 나와 헌티드하우스를, 오페라를 이용하는 것까진 참을 수 있어요. 어찌 됐든 결과만 좋으면 상관없으니까.”
“…….”
“하지만 당신이 하려는 일이 내 명예를 실추시키는 일이라면, 나는 가만있지 않을 거예요.”
“명예 실추라니, 비약이 지나치군요.”
프레져의 대꾸에 안젤라가 눈을 매섭게 치켜떴다.
“이봐요, 프레져 헌티드 백작님. 나는 헌티드하우스가 무너지든, 당신이 비평가의 욕받이가 되든 전혀 신경 쓰지 않아요.”
안젤라는 부채 끝으로 프레져의 가슴팍을 꾹 누르며 말을 이었다.
“예매일을 미루고, 공연 일정을 바꾼다고 해서 400년 역사의 헌티드하우스가 사라지진 않겠죠. 하지만 당신의 그 변덕이 헌티드하우스의 명예를 실추시키고 관객들의 냉대를 불러올 거라는 건 확실히 알아요.”
“…….”
“헌티드하우스의 명성은 곧 내 것이기도 해요. 헌티드하우스를 대륙 최고의 극단으로 만든 사람이 바로 나, 안젤라 골드니까.”
“…….”
헌티드하우스를 제 것처럼 말하는 안젤라에 프레져의 표정이 싸늘해졌다. 그러나 안젤라는 그의 기분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듯 말을 이었다.
“그리고 난 내 명성에, 내 음악 인생에 흠집이 생기는 걸 절대 허락할 생각이 없어요. 알아들어요?”
탁!
프레져의 대답 대신 울려 퍼진 것은 가벼운 마찰음이었다. 프레져가 제 가슴팍을 찌르는 부채를 손으로 쳐 낸 것이었다. 안젤라의 손을 떠난 부채는 어느새 먼지 쌓인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그러나 안젤라는 떨어진 부채 따위에 관심을 주지 않았다.
“왜요. 기분 나쁘세요?”
그저 프레져를 향해 조소를 지을 뿐이었다.
“그렇게 기분 나빠하실 필요 없어요. 당신한테 헌티드란 이름이 중요한 만큼, 나한텐 음악이 소중한 것뿐이니까요. 헌티드 백작가가 신문에 조롱거리로 등장한다면 당신도 불쾌하지 않겠어요?”
안젤라의 비아냥거림에 프레져의 눈동자가 빛을 달리했다.
“고결한 헌티드잖아요.”
저 남자가 고결한 헌티드라는 이름에 얼마나 집착하는지 알고 있기에 한 말이었다.
안젤라는 마지막 한 마디를 남기고 소품실을 빠져나갔다. 그녀가 사라진 자리에 이는 먼지를 보며 프레져는 헛웃음을 내뱉었다.
아무래도 공연 일정을 옮기는 것은 어려울 듯했다. 가수가 없는 오페라는 있을 수 없는 법이고, 저 여자는 수가 틀리면 어떻게든 여론을 끌어모을 위인이니.
프레져는 목을 꽉 조인 타이를 느슨하게 풀었다.
사실 불쾌한 것은 따로 있었다.
“고결한 헌티드라.”
안젤라에게서 저 말이 나왔다는 것이, 마치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는 태도가, 몹시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주 기고만장하군.”
저 여자가 무엇을 알고 있는지는 그닥 중요치 않았다. 그저 고귀한 역사를 가진 이름을 무기처럼 휘두르는 모습이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꼭 제 위에서 군림하려 드는 것 같지 않은가.
프레져는 살짝 열린 문을 보며 눈썹을 까딱였다. 문틈을 비집고 들어오는 빛이 스멀스멀, 제 영역을 넓혀 가고 있었다.
미리 손을 쓰지 않으면 분명, 천지 분간을 못 하고 날뛸 것이 자명했다.
* * *
헌티드하우스에서 나온 안젤라는 곧장 그녀의 본가인 레제브 후작저로 향했다.
레제브 후작저는 헌티드하우스에서 제법 거리가 있는 탓에 안젤라는 출퇴근이 용이한 곳에서 홀로 살고 있었다. 본가를 방문하는 건 꼬박 두 달 만이었다.
금지옥엽 막내딸이 찾아왔다는 말에 폴로를 즐기고 있던 레제브 후작은 허겁지겁 저택으로 돌아왔다.
“앤지!”
성년을 훨씬 넘긴 나이임에도, 레제브 후작은 여전히 그녀를 애칭으로 불렀다.
“이젠 안젤라라고 불러 달라니까요.”
“안젤라는 무슨. 내 눈에는 아직도 아기다. 백 년이 흘러도 너는 내 꼬맹이 앤지야.”
“아버지도 참.”
응접실에 부녀의 화기애애한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운동 중이신 걸 알았으면 나중에 찾아왔을 텐데요.”
“네가 왔는데 그깟 폴로가 대수라고. 안 그래도 네 얼굴 좀 보여 달라고 난리를 치는 걸 떼어 놓고 오느라 애먹었다.”
안젤라와 후작이 담소를 나누는 동안 사용인들이 다과를 내왔다. 접시엔 안젤라가 어린 시절부터 즐겨 먹었던 아몬드 쿠키가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오랜만에 얼굴을 보니 좋긴 한데,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니지?”
후작이 안젤라의 얼굴을 살피며 물었다. 연락도 없이 갑자기 찾아온 게 걱정된 모양이었다.
“아무 일 없으니 염려 마세요. 그냥 표도 드릴 겸, 보고 싶어서 온 거니까요.”
안젤라가 핸드백에서 봉투 하나를 꺼냈다. 테두리에 금을 칠한 봉투 안에는 귀빈석 티켓 몇 장이 들어 있었다.
“역대 최대 규모의 공연이잖아요. 잘 안 보이실까 봐 가장 좋은 자리로 준비했어요.”
“세상에.”
“첫 공연을 로든웨스트에서 올리긴 하지만, 거긴 수도에서 너무 멀잖아요. 제일 가까운 지역인 센그릭 공연으로 준비했는데 괜찮으세요?”
“서부든 중부든, 나는 상관없다! 장소가 뭐가 중요하다고…….”
표를 받아 든 레제브 후작의 눈이 커다래졌다. 귀빈석을 얻었다는 기쁨이 아닌, 저를 위한 딸의 마음에 감동한 것이었다.
“두 분 건 물론이고 오빠랑 언니, 형부 몫까지 챙겼어요. 꼭 와 주셔야 해요?”
“당연한 소릴. 당장 나가서 자랑부터 해야겠구나.”
딸의 애교 섞인 목소리에 레제브 후작은 껄껄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안젤라는 기뻐하는 아버지의 얼굴을 보다 슬슬 본론을 꺼냈다.
“이왕 자랑하기로 하신 거 연회라도 여는 게 어때요?”
“연회?”
“왕국 순회공연을 하는 건 처음이잖아요. 좋은 일인데 다른 사람들과 함께 기념하고 싶어요.”
“기념 좋지. 우리 앤지가 주역인 공연인데, 당연히 해야지!”
“감사해요.”
“안 그래도 얼마 전에 샹들리에를 바꿨는데, 첫 개시를 네가 하면 딱이겠구나. 과수원에 사과가 많이 열렸으니 그걸로…….”
레제브 후작이 자세를 고쳐 앉으며 파티 계획을 장황하게 읊기 시작했다. 딸을 자랑할 생각에 신이 난 모양이었다.
“그럼 제일 먼저 초대장부터 써야겠네요.”
안젤라는 후작의 말에 적당히 대꾸해 주다 무언가 생각난 듯 짝, 하고 손뼉을 치며 말했다.
“그래. 집사를 시켜 명단을 가져오라 하마.”
“그러지 않으셔도 돼요.”
“미리 생각해 둔 사람들이 있는 게냐?”
“그럼요.”
안젤라는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초대장을 보낼 사람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
“사실 이번 연회는 이 사람들을 위해 여는 거나 마찬가지니까요.”
애초에 이 파티는 헌티드 백작가의 가주 부부, 프레져 헌티드와 캐롤라인 헌티드를 위해 여는 것이니.
딸의 속내를 눈치챈 후작의 얼굴에 언짢은 기색이 떠올랐다.
“백작이 또 네 심기를 건드렸나 보구나. 감사해하진 못할 망정.”
“꼭 그런 건 아니고요.”
안젤라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초대장을 써 내려갔다.
“설마 거절하진 않겠죠?”
“다른 사람도 아닌 네 초대인데, 특별한 일이 없고서야 거절할 리가 없지.”
“특별한 일이라…….”
안젤라가 깃펜을 입술에 대며 중얼거렸다. 이내 그녀의 얼굴에 아이처럼 천진해 보이는 미소가 걸렸다.
“거절당하는 쪽이 재밌을 것 같긴 한데 말이지.”
그 남자의 부인은 이걸 알고 있으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