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녀가 떠난 뒤에 남겨진 것 (19)화 (19/156)

#19

“고향이 로우밸리란 말이오? 멀리서도 왔네.”

“그래도 성인이 된 후에는 쭉 수도에 있었는걸요.”

“여보, 당신은 아예 다른 나라에서 왔잖아요. 지금 누구보고 멀리서 왔대?”

꽃집은 어느 때보다 소란스러웠다. 캐롤라인과 힐롱 부부가 장미를 다듬으며 수다를 나누는 중이기 때문이었다.

고작 한 사람이 늘어났을 뿐인데, 가게 안에는 이전과는 다른 생기가 흘렀다.

캐롤라인은 가게에 들어온 지 한 시간도 되지 않아 부부와 친해졌다. 여기엔 힐롱 부인의 친화력이 크게 작용했다.

그녀는 힐롱 부인이라는 호칭 대신 로렌이라는 제 이름을 불러 주길 원했다.

“무슨 무슨 부인이라고 부르는 거 너무 정 없게 느껴지지 않아요?”

“그런가?”

“난 이름으로 불러 주는 게 좋아요. 다정하고 얼마나 좋아.”

“……그럼 나도 아크만이라 불러 주게. 누가 정 없는 건 싫다고 하니.”

“알겠어요.”

캐롤라인은 아크만을 보며 싱긋 미소를 지었다. 툭툭 뱉는 듯한 말투 때문에 그렇지, 아크만은 무척이나 다정한 사람이었다. 아내를 대하는 태도만 봐도 알 수 있었다.

‘프레져를 보는 내 눈빛이 저랬을까?’

사랑에 푹 빠진 사람의 눈빛은 아름다웠다. 호수를 담아 놓은 것처럼 맑기도 하고 보석을 박은 듯 반짝이기도 했다.

‘프레져는 날 어떤 눈으로 봤을까?’

그의 눈동자에선 다정함이라곤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짙푸른 빛을 내는 눈동자는 심해의 차가움을 끄집어 색을 낸 것이라 해도 믿을 정도로 냉랭했다.

“어머, 가시를 깔끔하게 잘 자르네.”

“취미로 꽃꽂이를 배웠거든요.”

“어쩐지. 솜씨가 좋다 했어요.”

장미 가시를 깔끔하게 자르는 솜씨에 로렌이 과장되게 혀를 내둘렀다.

“야무지긴 하군.”

아크만도 한 소리 거들었다. 이에 캐롤라인의 볼이 발갛게 물들었다. 별것 아닌 일에도 칭찬을 받는 이 상황이 부끄러우면서도 못내 행복했다.

“그런데 이상하군.”

“뭐가요?”

“보통 취미를 배운다고 하나?”

걸걸한 목소리에 두 사람의 시선이 일제히 아크만을 향했다.

“취미는 말 그대로 즐기려고 하는 거잖소. 그런데 즐기는 것도 배워서 해야 하나? 취미가 학습으로 바뀌면 그건 공부지.”

“그냥 말을 그렇게 하는 거죠. 당신은 별 이상한 걸 다 트집 잡네요.”

“늘 하던 생각이었어. 내가 외국인이라서 그런가. 내가 있던 나라에서는 취미에 배운다는 말을 쓰지 않았거든. 글랜포드에 와서 처음 안 표현이었지.”

아크만은 그것 말고도 글랜포드에 와 처음 접하게 된 것들에 대해 늘어놓았다. 그러나 캐롤라인의 귀에 다른 말은 들어오지 않았다.

“……생각해 보니 그렇네요.”

“응? 뭐가요?”

“하다못해 취미까지 배워서 해야 한다는 게요.”

캐롤라인은 장미 잎을 툭툭 뜯으며 입을 열었다.

“사실 저는 꽃꽂이에 관심도 없었어요. 꽃 이름은커녕, 장미의 색이 이렇게 다양하다는 것도 모르고 살았거든요.”

캐롤라인의 취미는 기껏해야 그네 타기, 노래 부르기, 헝겊 인형 만들기가 전부였다. 귀부인이 가지기에는 심각하게 소탈한 취미였다.

“그런데 왜 배웠어요?”

“고상한 취미를 갖고 싶었거든요.”

더욱 기품 있고 우아한 귀족으로, 헌티드 백작가에 어울리는 사람으로 거듭나기 위해. 그것이 캐롤라인이 꽃꽂이를 배우기 시작한 이유였다.

“그래도 꽃을 꽤 좋아하는 편이라 자신 있었거든요. 그런데 풀꽃이랑 관상용 꽃이랑 완전 다르게 생긴 거 있죠? 작은 꽃은 어디에 꽂아야 하고 큰 꽃은 어디에 꽂아야 하고. 또 장식이랍시고 놔둬야 하는 풀은 얼마나 많던지…….”

주절주절 말을 뱉던 캐롤라인은 무심코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당황스러워 보이는 부부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죄송해요. 제가 너무 쓸데없는 말이 많았네요.”

“쓸데없긴요. 난 재밌게 들었는데.”

“원래 속에 담아 둔 말은 한 번씩 뱉어 줘야 해. 그래야 가슴이 뻥 뚫린다고.”

“암, 그렇고말고요.”

좋은 사람들. 캐롤라인은 저를 두둔해 주는 부부를 보며 옅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래도 배우는 게 싫진 않았어요.”

캐롤라인은 손질된 꽃을 놔둔 바구니에서 종류가 다른 꽃 몇 송이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길이에 맞춰 줄기를 자른 다음 옆에 놓인 흰 리본으로 꽃다발을 만들었다.

“어머, 예뻐라.”

흰색과 노란색이 적절히 섞인 꽃다발은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은은한 색깔이 봄날의 햇살만큼이나 따사로워 보였다.

“보고 있으면 기분이 좋아지잖아요.”

“정말 그러네요.”

로렌이 감탄스러운 듯 중얼거렸다.

“확실히 잘 만들긴 했군. 팔아도 되겠어.”

꽃다발을 중심으로 과분한 칭찬이 쏟아졌다. 그 지나친 칭찬 폭격에 캐롤라인은 결국 웃음을 터트렸다.

“어, 손님 왔다. 잠시만요.”

손님이 들어온 것을 본 로렌이 허둥지둥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크만도 앞치마에 손을 닦곤 로렌을 따라 움직였다.

혼자만 앉아 있긴 그래서, 캐롤라인은 제가 만든 꽃다발을 든 채 어정쩡하게 서 있었다.

손님은 꽃이 가득한 가게를 둘러보며 걷다 캐롤라인을 발견하곤 멈춰 섰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녀의 품에 안긴 꽃다발을 발견한 것이었다.

“저걸로 할게요.”

“…….”

“색깔이 화사하니 예쁘네요. 선물하기 딱 좋겠어요.”

캐롤라인은 제 꽃다발을 가리키는 손님을 멍하니 바라보다 로렌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녀 역시 이 상황이 당황스러운지 볼을 긁적이고 있었다. 앞치마에 장갑까지 낀 탓에 캐롤라인을 직원으로 착각한 모양이었다.

그런 두 사람을 대신해 나선 건 아크만이었다. 그는 캐롤라인의 손에서 꽃다발을 빼 손님의 품에 안겨 주었다.

“얼마가 좋겠소?”

“네? 지금 저한테 물으시는……?”

“그럼 자기가 만든 꽃다발인데 자기가 값을 매겨야지.”

“어, 그럼 한 3파엠 정도……?”

“3파엠이오.”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한 캐롤라인 대신, 아크만이 손님에게 가격을 알려 주었다. 손님은 값을 지불하곤 기분 좋은 얼굴로 가게를 빠져나갔다.

“3파엠이라니, 너무 싸게 팔았네.”

“어, 아? 그게…….”

당황함이 가시지 않은 탓에 캐롤라인은 계속해서 어버버거렸다. 아크만은 그런 캐롤라인을 보며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농담이오, 농담.”

그의 말에 캐롤라인은 그제야 어깨에 잔뜩 주고 있던 힘을 뺐다.

“그래도 꽃꽂이를 배운 게 영 쓸모없던 건 아니지? 이런 일도 다 생기고 말이오.”

“……그러게요.”

캐롤라인은 손님이 나간 문 너머를 오랫동안 응시하다 시선을 돌렸다.

지금까지 제가 해 왔던 게 쓸모없는 일이 아니라 다행이었다.

* * *

헌티드하우스의 대표실엔 오늘도 냉기가 흘렀다. 그러나 오늘은 평소보다 그 정도가 심했다.

“대표님, 이건 좀 아닌 것 같은데요…….”

“뭐가.”

그걸 몰라서 물어보시는 겁니까?

로겐은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울분을 삭이느라 애를 먹는 중이었다. 그런 로겐을 대신해 휴고가 입을 열었다.

“이제 와서 갑자기 공연 일정을 변경할 순 없습니다.”

“어째서?”

“그야…….”

그걸 몰라서 물어보시는 겁니까?

휴고 역시 로겐이 생각했던 것과 똑같은 말을 떠올렸다. 하지만 이내 침착함을 되찾고 차분히 입을 뗐다.

“당장 나흘 뒤가 예매 시작입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공연 날짜를 바꾸면 분명 관객들의 원성을 살 겁니다.”

그들의 대표는 신문에 고지까지 해 놓은 공연 일정을 바꾸겠다 말하고 있었다.

분명 시작은 서부였다. 서부의 로든웨스트에서 공연을 하고 일주일 뒤인 북부의 노르티움으로 향하는 것. 이것이 그들이 세상에 공표한 공식적인 일정이었다.

하지만 프레져는 로든웨스트가 아닌, 노르티움에서 먼저 공연을 올리겠다는 충격적인 의사를 전했다. 그것도 전 지역 티켓 오픈을 나흘 앞둔 이 시점에.

“대표님. 위약금도 위약금이지만, 그보다는 대중들의 반응이 어떨지 미지수입니다.”

다른 것도 아닌 오페라라는 값비싼 취미로 장사를 하면서 이런 짓을 벌이다니.

이건 오페라 산업의 실권을 쥐고 있는 고위 귀족들과 비평가들의 심기마저 건들 수 있는 문제였다.

평화의 시대가 도래한 지금, 펜이 가진 힘은 칼보다 강했다.

비평가들의 칼럼 한 페이지와 고위 귀족이 보낸 서신 하나에 그들이 오랜 세월 일궈 온 것들이 뒤집힐 수도 있었다.

“이례적인 일이 많으니 언론이 기회를 놓치지 않을 겁니다. 부디 재고 부탁드립니다.”

휴고까지 나서서 프레져를 말렸다.

물론 이 정도 논란 가지고 무너질 헌티드하우스가 아니긴 하지만, 공들여 지은 성을 무너뜨리는 건 낙뢰가 아니었다. 이런 일이 차츰차츰 쌓여 간다면 헌티드하우스의 명성은 머지않아 빛을 잃게 될 것이 뻔했다.

다른 건 차치하더라도, 공연 날짜를 바꾸는 것은 저지해야만 했다.

로겐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으며 프레져에게 매달렸다. 대표의 뜻이라면 잠자코 따르던 휴고 역시 이번만은 그 뜻을 굽히지 않았다.

“다들 모여 계시네요?”

그때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귓바퀴를 타고 부드럽게 흐르는 음성은 마치 천사의 속삭임만큼이나 황홀했다.

휴고는 땅에 처박고 있던 고개를 들어 목소리의 주인을 확인했다.

사실 얼굴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이 땅에 이런 목소리를 가진 사람은 한 사람밖에 없으니.

“안젤라 골드 양.”

안젤라는 그 부름에 응하는 것처럼, 그린 듯한 고운 미소를 지어보았다.

그녀가 한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길게 풀어 내린 금발이 탐스럽게 넘실거렸다.

휴고와 로겐은 천사가 행진하는 듯한 그 장면을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성격이 개차반인 것을 감안하고 보더라도, 그녀는 참 아름다운 인간이었다.

세 사람의 시야에 황금빛으로 굽이치는 풍성한 머리칼이 들어찼다.

무용수처럼 꼿꼿한 걸음걸이로 걸어온 안젤라는 프레져의 옆에 다가서며 입을 열었다.

“잠시 이야기 좀 할까요?”

상냥한 듯 날이 선 미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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