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녀가 떠난 뒤에 남겨진 것 (18)화 (18/156)

#18

프레져는 이가 갈리는 것을 참으며 남은 말을 이었다.

“그 외에 다른 사항은?”

“아직은 없습니다.”

결국 보고할 게 없어진 에드먼드는 상체를 직각으로 숙였다.

“죄송합니다. 그 외에는 따로 말씀드릴 게 없습니다.”

깊이 숙인 에드먼드의 상체가 미약하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프레져는 그에게 고개를 들라는 말 따윈 하지 않았다.

그의 관심은 제 앞에 허리를 굽히고 있는 노인이 아닌, 오로지 캐롤라인 헌티드에게만 있었으므로.

프레져는 창밖에 보이는 드넓은 정원을 내려다보다 무미건조하게 말했다.

“보고 다 했으면 나가. 새로 알아낸 게 있으면 바로 말하고.”

“알겠습니다.”

결국 노년의 집사는 수그린 허리를 펼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축객령을 맞아야 했다.

에드먼드가 뒷걸음질을 해 나가자, 집무실 안엔 다시금 정적이 찾아들었다.

“북부, 북부라…….”

프레져는 ‘북부’라는 단어를 끊임없이 되뇌며 생각에 잠겼다.

그 넓은 북부에서, 그 여자가 갈 만한 곳이 어디가 있을까.

사실 캐롤라인의 자취를 쫓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윗선에 뇌물을 조금 찔러주면 어렵지 않게 그녀의 행선지를 찾을 수 있을 터였다.

배 나온 경찰 놈들에게 굽신거리는 것 외에도 방법은 있었다. 모름지기 대귀족가의 수장쯤 되는 자리에 앉으면, 왕국에서 내로라하는 권력가들을 줄줄이 꿰게 되는 법이었다.

하지만 프레져는 그런 방법은 사용하지 않았다.

아름답고 고귀한 헌티드 가문의 이름. 그 이름에 오점을 남길 짓 따윈 절대로 할 수 없었다.

부패한 경찰 놈들의 유흥거리가 될 생각도, 권력가들에게 쉬이 약점을 내어줄 생각도, 프레져에겐 전혀 없었다.

가문 이름에 먹칠을 하면서까지 그 여자를 찾을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다행히 캐롤라인은 아직까진 그의 부인이었고, 프레져는 그녀의 법적 보호자로서 많은 권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캐롤라인은 그걸 모를 만큼 멍청하지 않았다. 거기에 왕국 전체를 순회하는 공연까지 잡혀 있었으니.

“……어쩌면 겁에 질려 먼저 모습을 드러낼지도 모르지.”

원체 타고나길 유약한 여자이니까.

프레져는 고개를 돌려 티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화병을 응시했다.

화병엔 캐롤라인이 꽂아 둔 아네모네가 시꺼멓게 시들어 있었다. 시든 것보다는 썩은 쪽에 가까웠다.

물도 몇 달째 갈아 주지 않아, 줄기엔 누런 물때와 함께 곰팡이가 가득 끼어 있었다. 하지만 프레져는 흉물스러운 꽃을 굳이 치우지 않았다.

프레져는 나날이 흉측해져 가는 꽃을 보며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자고로, 뿌리가 잘린 꽃은 오래 버틸 수 없는 법이었다.

* * *

“으아…….”

캐롤라인은 이른 아침부터 앓는 소리를 내며 눈을 떴다. 몸이 무거운 건 둘째치고, 팔다리가 저릿저릿해서 깊게 잠들 수가 없었다.

‘못 일어나겠어.’

침대에서 일어나기 위해 갖은 애를 쓰던 캐롤라인은, 결국 몸을 일으키려는 시도를 포기했다. 사지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기존에 드시던 약을 몇 가지 바꿨습니다. 몸이 붓거나 팔다리가 저리는 부작용이 종종 있긴 하지만, 지금 사용하는 약보단 덜 독한 약입니다.’

약에 대해 설명하던 의사의 말이 그제야 떠올랐다.

“부작용인가 보네. 별수 없지.”

캐롤라인은 멍하니 천장을 응시한 채 시간을 때우다 평소보다 부은 종아리를 주무르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마샤와 스테파니가 일찍이 외출한 탓에 집은 평소보다 조용했다. 두 사람 모두 근처에 새로운 일자리를 얻었기 때문이었다.

“둘 다 잘 적응하면 좋을 텐데.”

마샤는 일전의 경험을 살려 젠트리 집안의 출퇴근 하녀로 들어갔다. 헌티드 백작가를 그만둘 때 받았던 추천장을 보여 주니 생각보다 쉽게 일자리를 구할 수 있었다고 했다.

같은 평민 밑에서 일하는 게 자존심 상하지 않을까 걱정이었지만, 의외로 마샤는 그런 것에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오히려 마샤는 헌티드 백작저에 있을 때보다 더욱 즐거워 보였다. 일은 할 만하냐는 물음에 마샤는 아주 밝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젠트리는 노동의 가치를 아는 사람들이거든요.’

그들은 노동을 통해 부를 거머쥔 계층인 만큼, 노동자들을 함부로 대하지 않는다고 했다. 게다가 귀족 주인을 모실 때처럼 일일이 비위를 맞추지 않아도 되니.

‘오히려 마샤에겐 이쪽이 더 나을지도.’

한편, 스테파니는 근처에 있는 찻집에서 일을 시작했다. 까불까불해 보이는 겉모습과는 달리, 그녀는 손이 제법 야무졌다.

찻잎과 다기를 손질하고, 남는 시간에 틈틈이 빵을 굽는 것이 스테파니가 맡은 주된 업무였다.

‘그래도 저는 마님 옆에 있는 게 더 좋은데…….’

그녀는 일하기 싫다며 궁시렁거리면서도 착실하게 제가 맡은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반면, 에릭은 일을 구하지 않고 몇 주째 쉬는 중이었다. 캐롤라인을 홀로 내버려 둘 수 없다는 판단하에 결정한 일이었다.

마샤와 스테파니의 휴무일이 조율되는 대로 에릭 역시 새로운 직장을 구할 생각이었다.

에릭은 마샤와 스테파니와는 달리, 낮이 아닌 밤에 할 수 있는, 제법 돈이 되는 일을 찾을 것이라 했다.

‘세상에 그런 일도 있어?’

세상 물정이라곤 모르는 캐롤라인이 순진한 낯을 하고서 물었다.

‘물론입니다.’

모두가 잠든 새벽에 움직이는 시설은 하나밖에 없었다. 바로 공장이었다.

북부는 다른 지역에 비해 공장의 수가 적긴 했지만, 그래도 일을 구하기 어려울 만큼은 아니었다.

에릭의 유년 시절은 늘 지독한 가난과 함께였다. 그는 12살 때부터 방직 공장, 석탄 공장, 인쇄소 등 일해 보지 않은 곳이 없었고, 웬만한 고된 일은 별 감흥 없이 할 수 있는 지경에 이르렀다.

“마님, 주무시고 계십니까?”

“아니. 나 일어났어.”

문을 똑똑 두드리는 에릭에 캐롤라인은 대충 카디건을 걸쳐 입고 방을 나섰다.

처음엔 남편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게 껄끄러웠지만, 에릭과 함께 지낸 게 벌써 세 달째였다. 함께한 시간이 길어질수록 이런 사소한 것엔 신경 쓰지 않게 되었다.

“요 근처 공장에 이력서를 내고 올 생각입니다. 왕복 한 시간이 넘는 거리고 면접도 함께 볼 테니 어림잡아 두 시간은 걸리겠네요.”

“그래? 에릭은 길치니까 여유롭게 서너 시간은 잡아야겠네.”

“…….”

“……미안. 혼잣말이었어.”

“혼잣말치곤 좀 큰 것 같습니다만.”

캐롤라인은 괜히 헛기침을 하며 에릭의 시선을 회피했다.

“아무튼, 혼자 계실 수 있죠?”

“날 뭘로 보고.”

캐롤라인은 눈을 가늘게 뜬 채 장난스레 에릭을 노려봤다.

“겨우 두 시간이긴 하지만, 무슨 일이 일어나기에 부족한 시간은 아니라서요.”

“……그렇긴 하지.”

캐롤라인은 제가 별채에서 쓰러졌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떠올렸다. 그러자 유난을 떤다 소리치려던 입이 꾹 다물렸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에릭은 자신을 살려 준 은인이었으니.

“혹시 몰라서 힐롱 부인께 미리 말씀을 드려 놨습니다.”

“힐롱 부인이라면, 1층 꽃집의?”

“네. 제가 자리를 비우는 동안은 힐롱 부인과 1층에서 시간을 보내시면 됩니다. 마님을 혼자 두고 가려니 영 마음이 불안해서 어쩔 수 없었습니다.”

“이해해.”

“이왕 이해하신 김에 하나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뭘?”

“‘무언가 이상하다’ 싶을 땐 이미 늦은 겁니다.”

“…….”

“그러니 몸이 이상할 때 힐롱 부인을 찾아야겠다는 어리석은 생각은 하지 마시고 미리 1층에 내려가 계세요.”

마샤와 스테파니와는 달리 에릭은 말을 무섭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하지만 이만큼 효과가 좋은 화법은 없었다.

“알겠어. 씻고 바로 내려갈게.”

* * *

캐롤라인은 1층으로 내려가 저택을 나서는 에릭을 배웅했다. 그러곤 쭈뼛거리며 주인 내외가 운영하는 꽃집으로 들어갔다.

“어머, 안 그래도 지금 부르려고 했는데.”

캐롤라인을 본 힐롱 부인이 반갑게 웃으며 그녀를 맞이했다. 부르려고 했다는 게 사실인 듯, 그녀는 문 바로 앞에 서 있었다.

“안녕하세요.”

“좋은 아침이에요, 캐롤라인.”

쭈뼛거리는 캐롤라인과는 달리, 힐롱 부인의 인사는 부드럽고 유연하기만 했다.

‘이름으로 불리는 거, 되게 오랜만이네.’

결혼 전에는 웨즐 남작 영애, 결혼 후에는 헌티드 백작 부인 혹은 마님. 프레져를 제외한 다른 이의 입에서 제 이름이 불린다는 게 퍽 생소했다.

“아침은 먹었어요?”

“아직요.”

“잘됐네. 마침 블루베리 주스를 만들어 놨거든요.”

힐롱 부인은 캐롤라인을 가게 안쪽으로 이끌었다.

“가게 안을 개조해서 생활 공간으로 쓰고 있거든요. 좁긴 해도 있을 건 다 있답니다.”

꽃에 둘러싸인 자그마한 문을 열자 고소한 냄새가 흘러나왔다. 이윽고 평범한 가정집과 다를 바 없는 소담한 공간이 나타났다.

“왔구만.”

4인용 식탁에는 중년의 남자가 앉아 토스트를 먹고 있었다. 얼마 전 보았던 힐롱 씨였다.

“아유, 냄새야. 내가 토스트 먹을 땐 창문 열라고 했죠?”

힐롱 부인은 남편의 등을 찰싹 때린 뒤 안으로 들어가 창문을 열었다. 그러곤 캐롤을 불러들였다.

“미안해요. 베이컨 냄새가 진동을 하죠?”

“괜찮아요. 저 베이컨 좋아해요.”

“다리 아프게 서 있지 말고 얼른 앉아요. 금방 주스 가져다줄게요.”

캐롤라인은 눈을 도르륵 굴리며 힐롱의 맞은편에 앉았다.

“좀 드시겠소?”

“네?”

“베이컨, 아까 좋아한다며.”

힐롱이 내민 토스트 안엔 베이컨이 들어 있었다. 따끈따끈한 빵 사이에 낀 반지르르한 고기가 제법 맛있어 보였다.

“호의는 감사하지만, 제가 몸이 안 좋아서요. 기름진 음식을 먹으면 안 되거든요.”

“아, 그렇군.”

힐롱은 고개를 끄덕거리고는 제 입에 토스트를 마저 집어넣었다. 몸이 아픈 이후로 통 식욕을 못 느꼈는데. 어째서인지 그가 먹는 토스트는 매우 맛있어 보였다.

“맞다. 에릭한테 들었어요. 몸이 안 좋다고. 블루베리 주스는 괜찮은 거죠?”

“네. 설탕만 많이 안 들어간 거면 괜찮아요.”

“다행이네요.”

힐롱 부인은 가슴을 쓸어내리는 시늉을 하며 캐롤라인의 앞에 컵을 놔 주었다.

“얼른 들어요.”

캐롤라인은 두 사람의 눈치를 살피다 조심스럽게 컵에 입을 대었다.

‘맛있어!’

맛을 본 캐롤라인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녀는 힐롱 부인에게 감사의 말을 하는 것도 잊고 꿀꺽꿀꺽 주스를 삼켰다.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잔이 비어 있었다.

“맛있죠?”

고개를 들자 저를 보며 흐뭇하게 웃고 있는 힐롱 부인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네. 정말 맛있어요.”

“내 아내의 블루베리 주스가 일품이긴 하지. 맛있으면 내 것도 먹겠소?”

힐롱이 제 몫의 주스를 캐롤라인에게 내밀며 물었다. 캐롤라인의 민망함에 손사래를 치며 대답했다.

“아니에요. 괜찮아요.”

“사양 말고 먹어요. 많이 남아 있으니까요.”

“우리 둘이 먹기엔 좀 많이 만들긴 했지.”

힐롱 부인이 딴지를 거는 제 남편을 째려봤다. 힐롱은 그런 아내를 보며 쿡쿡 웃음을 흘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캐롤라인의 얼굴에도 옅은 미소가 걸렸다.

“……그럼 사양하지 않고 먹을게요.”

왠지 모르게 가슴이 간질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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