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녀가 떠난 뒤에 남겨진 것 (17)화 (17/156)

#17

그 말을 끝으로, 캐롤라인은 여태껏 참아 왔던 숨을 크게 내쉬었다. 가슴속에서 서러움 한 줄기와 함께 형체를 알 수 없는 감정이 솟구쳐 올랐다.

시골 출신인 게 부끄러운 적은 있어도 억울한 적은 없었다. 남부의 자그마한 촌구석이라곤 하지만, 그녀는 제 고향인 로우밸리를 무척이나 사랑했다.

캐롤라인은 목이 메어 오는 걸 느끼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일찍 발견했다면 상황이 달라졌을 수도 있다는 말이네요?”

“그렇죠.”

한없이 평화롭기만 한 로우밸리의 풍경이 그녀의 가슴 속에서 산산조각 나고 있었다.

캐롤라인은 태어나 처음으로 제대로 된 병원 하나 없는, 아름다운 제 고향을 원망했다.

수도에서 태어났더라면. 하다못해 수도의 외곽, 지방 소도시에서라도 태어났더라면.

집이 아닌 병원에서 태어났더라면. 부모님이 조금만 더 다식한 사람들이었더라면. 그래서 어린 저를 병원에 데려가 줬더라면.

바꿀 수 없는 것들을 붙잡고 끝없이 늘어지면서, 캐롤라인은 복받치는 설움을 쏟아 냈다. 무언가를 탓하고 원망하지 않으면 도저히 버틸 자신이 없었다.

“그래도 치료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잖아요. 그렇죠?”

잠자코 앉아 있던 스테파니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마샤가 그녀의 성급한 행동을 나무라며 옷자락을 잡아당겼지만 굴하지 않았다.

“연약한 어린아이도 치료 가능한 병이랬잖아요. 성인은 아이보다 튼튼하니까 더 독한 약도 쓸 수 있을 거 아니에요!”

스테파니의 목소리 끝이 날카롭게 갈라졌다. 제 분을 못 이겨 버럭 언성을 높인 탓에 얼굴이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약물 치료는 어린아이들이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영유아의 신체는 성인과 달라서 성장을 거듭하며  심장이 제 기능을 되찾는 경우가 많지요. 그만큼 약물 치료도 효과적이고요. 하지만 환자분은 약물 치료를 하기엔…….”

“…….”

“때가 너무 늦었습니다.”

스테파니의 눈에서 굵은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울지 않으려 눈에 힘을 줬지만, 얼굴은 더욱 형편없이 구겨질 뿐이었다.

마샤는 더 이상 스테파니에게 자리에 앉으라 채근하지 않았다. 그저 입을 꾹 다물고 천장을 올려다보며, 어떻게든 차오르는 눈물을 삼키려 애를 쓸 뿐이었다.

의사는 착잡한 표정으로 자신의 바로 앞에 앉아 있는 캐롤라인을 바라봤다. 허공을 응시하고 있는 그녀의 눈엔 초점이 없었다.

“그래도 포기할 생각은 없으시죠?”

의사의 물음에 캐롤라인은 고개를 천천히 돌렸다. 그리곤 굳건한 눈으로 저를 보고 있는 의사와 시선을 마주했다.

제가 오래 살 수 없다는 것은 안다. 그렇다고 해서 쉽게 삶을 포기하고 싶진 않다.

“……네.”

이것이 그녀가 내린 결론이었다.

“그렇다면 됐습니다.”

숨소리처럼 작고 연약한 대답이었으나, 의사는 그 안에 있는 의지를 어렵지 않게 읽어 냈다.

“환자분의 의지가 공고하시니 다행이군요. 지금은 그거면 충분합니다.”

“……네.”

캐롤라인은 제게 희망을 주려 애쓰는 의사를 보며 쓰게 미소 지었다.

의사의 마음이 고맙긴 했지만 희망은 어디까지나 희망일 뿐, 현실은 쉽게 바뀌지 않는 법이다. 제 의지가 이리 공고함에도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게 캐롤라인을 더욱 슬프게 만들었다.

“사실, 환자분께 한 가지 권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분위기를 달리하는 의사의 말에 캐롤라인은 바닥을 보고 있던 시선을 들어 올렸다. 그녀의 뒤에 있던 세 사람의 눈동자 역시 일제히 의사를 향했다.

“노르티움 종합 병원이 그레타 왕국과 협진 진료를 하고 있다는 건 아시죠?”

“네. 기계도 모두 그레타에서 들여온 걸 사용한다고 들었어요.”

“잘 알고 계시네요. 이번에 저희 병원이 그레타 왕국에 있는 마리아 병원과 자매결연을 맺었습니다.”

“마리아 병원이요?”

마리아 병원은 그레타 왕국에서 권위 있는 병원 중 하나였다.

최고의 병원이라 할 수는 없었지만, 그레타 왕국 내에서 마리아 병원이 행사하는 영향력은 대단했다. 2주에 한 번씩 실시하는 의료 봉사 때문이었다.

마리아 병원의 전신은 빈민가의 작은 치료소에서부터 시작했다. 병원의 초대 설립자인 마리아 박사는 돈이 없어 치료를 받지 못하는 사람들을 너무도 많이 봐 왔다.

더 나은 세상. 약자의 생명이 경시되지 않는 세상. 그것은 병원의 초대 설립자인 마리아 박사가 가장 원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뜻을 이어받은 이들이 지금의 마리아 병원을 이끌어가고 있었다. 그곳의 의사들은 희생, 봉사, 헌신 정신에 의거하여 움직이고 있었다.

“이걸 한번 봐 주시겠습니까?”

의사는 제 오른편에 있는 책꽂이에서 팜플렛 하나를 꺼내 내밀었다. 팜플렛에는 임상 실험 대상자를 구한다는 문구가 큼지막하게 쓰여 있었다.

캐롤라인은 그 밑으로 깨알같이 적힌 글자들을 읽다 고개를 들어 올렸다.

“난치성 질환 환자라면…….”

“환자분도 포함이죠.”

더 나은 세상. 캐롤라인은 팸플릿 위에 인쇄된 글자를 손으로 쓸어내렸다.

「이 임상 실험은 희귀 질환을 앓고 있는 난치성 질환 환자들을 대상으로 진행합니다. 마리아 병원과 노르티움 종합 병원은 환자들이 더 나은 세상을 살아가길 희망합니다.」

“마리아 병원의 신념다운 프로젝트네요.”

캐롤라인이 중얼거렸다.

“지금의 의학 기술로 난치병 환자들을 낫게 하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그래서 임상 실험을 실시하는 겁니다. 다양한 실험을 통해 병에 가장 특화된 치료 방법을 찾는 거죠.”

“실험이라면, 구체적으로 어떤 걸 이야기하는 거죠?”

“방법은 다양합니다. 복용하는 약을 바꾸는 것부터 시작해 약물을 혈관에 직접 투여하는 방법, 기계를 이용한 전기 치료까지. 질환을 낫게 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판단되면 모두 실험해 보겠죠.”

“뭐라고요?”

의사의 말을 듣던 마샤가 목청을 높였다.

“지금 저희 마님, 아니, 캐롤라인보고 실험용 쥐가 되라는 소린가요?”

그녀의 표정은 매우 불쾌해 보였다.

치료에 도움이 될 수도 있다길래 기대했더니, 사실상 실험용 쥐가 될 인간을 구한다는 소리였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실험의 부정적인 면만 보지 마세요.”

“그럼 대체 이걸 어떻게 긍정적으로 보라는 거죠? 실험 중에 잘못되기라도 하면요? 큰 부작용이라도 생기면 어떻게 할 건데요?”

“심각한 부작용이 예상되는 약물은 절대 투여하지 않습니다.”

“그럼 작은 부작용은 허용한다는, 읍!”

마샤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스테파니가 마샤의 입을 손으로 막았기 때문이었다.

“언니는 일단 좀 진정해야 할 필요가 있어.”

“읍읍!”

“저흰 나가 있을 테니 계속 말씀 나누세요.”

스테파니는 버둥거리는 마샤를 질질 끌고 진료실을 빠져나갔다. 의사는 문이 닫히는 것을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마저 설명하겠습니다.”

의사는 임상 실험에 대해 아주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평범한 사람들은 대부분 아까 나가신 분과 비슷한 생각을 합니다. 살아 있는 사람을 가지고 실험을 한다고요. 하지만 환자분도 아시다시피, 난치병 환자들에겐 길이 없습니다.”

“그렇긴 하죠…….”

캐롤라인은 의사의 말에 긍정했다. 그녀는 난치병 환자들의 결말을 아주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죽는다.’

캐롤라인은 죽음을 떠올리며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죽음은 애쓴다고 해서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특히 저 같은 시한부 환자라면 더더욱.

‘어차피 죽게 될 거라면, 살기 위해 발버둥이라도 쳐 보는 편이 낫지 않을까?’

캐롤라인은 몸을 돌려 에릭을 쳐다봤다. 그에게 의견을 구하기 위함이었다.

“에릭 생각은 어때?”

“저는 의사 선생님과 같은 생각입니다. 더 이상 물러나실 곳 없으니까요.”

“…….”

“제 말은, 밑져야 본전이라는 겁니다.”

에릭의 말이 맞았다. 어차피 죽는다면 조금이라도 덜 아프게, 한 달이라도 더 살다 가는 게 나았다.

“아무튼 생각이 있으면 한번 고민해 보세요. 강요하는 건 아니니까요.”

“알겠어요.”

“그럼 다음 진료일에 뵙겠습니다.”

캐롤라인과 에릭은 의사에게 작별 인사를 한 뒤 진료실을 빠져나갔다. 길길이 날뛰는 마샤와는 달리, 그녀의 머릿속은 이미 임상 실험에 관한 생각들로 가득했다.

* * *

“각하, 에드먼드입니다.”

“들어와.”

머지않아 문이 열리고, 빈틈없이 단정한 차림새의 에드먼드가 모습을 드러냈다.

“상황은?”

프레져는 에드먼드가 들어오기가 무섭게 입을 열었다. 좀처럼 먼저 입을 여는 법이 없는 프레져에게서 찾아보기 힘든 성급한 행동이었다.

“북부로 향하셨다는 정황을 찾았습니다.”

“북부?”

생각지도 못했던 장소에 프레져는 미간을 설핏 찌푸렸다.

“예.”

“동행한 사람은?”

“그…….”

에드먼드는 등허리를 타고 흐르는 식은땀을 느끼며 말을 골랐다. 그리고 마침내, 용기를 내어 그를 입 밖으로 꺼냈다.

“……남자 하나에 여자 하나와 동행하셨다고 합니다.”

“허,”

프레져가 들고 있던 만년필을 소리가 나게 내려놓았다. 어찌나 세게 내려놓았는지, 만년필 뚜껑에 실금이 갈 정도였다.

“마부는 플라이크에 도착한 이후 해고했다고 합니다. 갑작스러운 해고에 대한 사과로 꽤 큰 금액을 챙겨 주셨고요.”

플라이크에 사람을 푼 건 휴고였다. 그는 프레져를 대신해 사람을 풀어 캐롤라인의 흔적이 마지막으로 발견된 플라이크를 샅샅이 뒤졌다.

그 결과, 플라이크로 향하는 마차를 몰았던 마부를 찾아내는 데 성공했다. 마부는 입을 다무는 대가로 캐롤라인에게서 거액의 돈을 받은 모양이었다.

그러나 캐롤라인과 나눴던 약속은 두려움 앞에서 효력을 잃었다. 휴양지에서의 평화를 만끽하고 있던 마부는 갑자기 들이닥친 사내들에게 벌벌 떨며 사실을 고했다.

‘부, 북부로 간다는 말을 얼핏 들었습니다!’

마부가 토로한 정보를 단서 삼아 움직인 끝에 휴고는 캐롤라인이 북동부의 한 기차역에 들렀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늘 그렇듯 프레져는 움직이지 않았다. 고귀한 헌티드의 이름을 이런 조잡한 일을 처리하는 데 쓸 수는 없었다.

“남자 하나에 여자 하나라…….”

프레져는 에드먼드가 전한 말을 곱씹으며 생각에 잠겼다.

여자는 몇 명이 됐든 상관없었다. 그래도 나름 귀부인이니 수발들 사람이 한둘은 필요했겠지.

그러나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에릭 포스터.’

도대체 얼마나 진득한 사이길래. 그놈을 끼고 북부까지 도망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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