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녀가 떠난 뒤에 남겨진 것 (12)화 (12/156)

#12

“들었어?”

“응. 마님이래, 마님.”

“어디 부잣집 마나님인가? 귀부인?”

캐롤라인의 귀에 옆자리 환자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들의 시선은 캐롤라인이 입은 고급 카디건, 분주하게 움직이는 마샤와 스테파니를 향하고 있었다.

“입고 있는 옷도 그렇고 앉아 있는 자태도 그렇고. 딱 봐도 고상한 마나님 같은디.”

캐롤라인은 고개를 숙인 채 옷소매를 만지작거렸다. 노골적이지 않은 듯 노골적인 그들의 시선을 피하기 위함이었다.

소매 끝엔 왕국에서 단 하나뿐인 고급 부티크의 로고가 떡하니 새겨져 있었다. 프레져가 자주 가는 부티크이기도 했다.

“…….”

캐롤라인은 멍하니 입을 벌렸다. 그제야 제가 입은 옷이 어떤지 눈에 들어왔다.

최고급 실로 짜인 카디건은 보풀 하나 찾아볼 수 없었다. 올이 나간 부분은 당연히 없었고,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데다 보드랍기까지 했다. 화려한 디자인은 아니었지만 척 봐도 제법 값이 나가 보였다.

‘……민망해라. 차림새까진 생각을 못 했네.’

입던 옷 중 편하고 자주 입는 것들로만 골라 가져온 것이었는데, 이런 식으로 티가 날 줄은 몰랐다.

물론 평민들이 이를 알아볼 리는 없었다. 그러나 캐롤라인은 괜스레 민망해져 반대쪽 손으로 소매에 새겨진 로고를 가렸다.

“어느 집안 마나님인지 함 물어볼까?”

지척에서 들려오는 말에 캐롤라인은 저도 모르게 헛숨을 들이켰다. 낯선 손이 제 어깨를 톡톡 건드리기라도 할까 봐 겁이 났다.

“에이, 자기는 오지랖도 넓다. 뭘 그런 걸 물어보고 그래. 초면에 예의도 없이.”

“그래도. 궁금하잖어.”

“좀 참을 줄도 알아야지. 요즘 젊은 사람들은 그런 짓 하면 욕해. 귀족분들이면 더 그렇고.”

“……그려?”

“그래. 그리고 부잣집 마나님이 이렇게 복작복작한 6인실을 왜 써? 저 위에 1인실 쓰지.”

“그렇긴 허지.”

쩝, 입맛을 다시는 소리를 마지막으로 대화가 끊겼다.

캐롤라인은 조심스레 뒤를 돌아봤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신나게 수다를 떨던 두 여자는 언제 그랬냐는 듯 조용히 뜨개질을 하고 있었다.

이에 캐롤라인은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러곤 스테파니와 마샤를 이끌고 허겁지겁 병실을 나왔다.

그녀가 병실을 나서자마자 한 일은 병실 입구에 붙은 명패에서 ‘캐롤라인 헌티드’라는 이름을 떼어 내는 것이었다.

헌티드 가문의 마님.

이 세상에 헌티드라는 성을 가진 여자가 저 하나뿐인 것은 아니었지만, 사람들은 제 이름을 듣고 프레져를 떠올릴지도 몰랐다.

“마님, 왜 그러세요?”

평소답지 않은 행동에 마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의문스러운 시선을 보내는 건 스테파니 역시 마찬가지였다.

캐롤라인은 병실 앞에 서 있는 에릭과 마샤, 스테파니의 눈을 차례로 마주하다 입을 열었다.

“미리 말해 두는 걸 깜빡했는데, 여기선 되도록이면 마님이라고 부르지 않기로 하자.”

그녀가 꺼낸 말이 꽤 파격적인 모양이었는지, 세 사람은 커다란 눈을 꿈뻑꿈뻑 깜빡이기만 했다.

“마님이라고 부르면 사람들이 자꾸 이상하게 쳐다봐서 그래.”

호기심 가득한 눈동자가 그렇게 두렵게 느껴지긴 처음이었다.

캐롤라인은 벙쪄 있는 세 사람에게 대충 상황을 설명했다. 그러자 다들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마님을 마님이라 부르지 못하면… 어떻게 부르죠?”

스테파니가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아가씨? 주인님? 아니면…….”

“그냥 캐롤이라고 불러.”

모든 고민을 단번에 해결해 주는 명쾌한 답안이었다.

“네?!”

하지만 세 사람은 경악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스테파니는 제가 말을 잘못 들었다고 생각하는 듯, 제 귀를 툭툭 치기까지 했다. 그야말로 대경실색이었다.

마샤는 절대로 그런 짓은 할 수 없다며 손사래를 쳤다. 세 사람 중 가장 이성적인 에릭마저 ‘그건 좀…….’이라며 난감한 기색을 비쳤다.

“어쩔 수 없잖아. 달리 부를 호칭도 없고. 여기선 귀족 행세를 하고 다니지도 않을 건데. 괜히 존칭을 썼다간 사람들 눈에 더 띌 거야.”

“하지만…….”

“방금 병실에 있던 사람들 봤지? 대체 어느 가문 마나님인지 궁금해 하던 거. 난 저 사람들한테 시달리고 싶지 않아.”

“…….”

“어차피 입원하는 건 이틀이고, 곧 집으로 돌아갈 거잖아. 그러니까 다들 이해해 줘.”

“……알겠습니다.”

완강한 캐롤라인의 태도에 에릭은 겨우 무거운 입을 뗐다.

그녀의 말이 맞았다. 겨우 예의 좀 차리자고 그런 곤란한 일을 겪을 수는 없었다.

“이해해 줘서 고마워.”

캐롤라인은 에릭을 향해 산뜻하게 웃어 보이고는, 마샤와 스테파니에게로 몸을 돌렸다.

“마샤랑 스테파니도 꼭 협조해 줘? 에릭은 몰라도 두 사람은 계속 내 옆에 붙어 있을 거잖아.”

“그렇죠…….”

결국엔 스테파니도 체념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습관처럼 입에 붙은 마님이라는 소리를 떼려면 꽤 고생을 할 것 같아서였다.

두 사람에게서 긍정의 대답을 받아 낸 캐롤라인은 마지막으로 마샤를 바라보았다. 마샤는 선뜻 대답하지 못한 채 어두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적응하려면 시간이 필요하겠지.’

현대에 와 신분의 경계가 모호해진 만큼, 주인에게 충성을 바치는 사용인은 몇 없었다. 산업의 발전과 국민 소득의 증가가 가져온 변화 중 하나였다.

말 그대로 고용주와 고용인, 딱 그 정도의 관계였다. 헌티드 백작가 같은 대귀족 가문은 예외였지만.

세상에서 돈이 가장 중요한 에릭같은 이도 많았지만 백작저에서 오래 일한 사용인의 대부분은 유서 깊은 제 직장에 큰 자부심을 느끼고 있다.

그러니 마샤가 이를 곤란해하는 것도 충분히 이해가 갔다. 게다가 마샤는 캐롤라인을 진정한 제 주인으로 모시고 있었다. 모든 것을 버리고 노르티움까지 따라올 만큼.

캐롤라인은 마샤를 독촉하는 대신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 그리곤 다 알고 있다는 듯, 햇살처럼 따사로운 미소를 지었다.

“……딱 병원에서만이에요. 여기서 나가는 순간 바로 마님이라고 부르겠어요.”

“얼마든지.”

그 상냥하고 포근한 미소에 마샤는 결국, 고개를 끄덕이고야 말았다.

* * *

캐롤라인은 간단한 본인 확인 절차를 마친 뒤 진료실로 향했다.

구름처럼 풍성한 고수머리를 한 중년의 의사는 캐롤라인에게 몇 가지 질문을 하고 정밀 검사에 대해 설명해 준 뒤, 간호사를 시켜 그녀를 검사실로 안내했다.

캐롤라인은 거대한 기계 아래 누워 몸을 움츠렸다.

움찔.

‘차가워…….’

이렇게 커다란 기계는 태어나 처음 보는 것이었다. 공장에나 가야 볼 수 있을 법한 기계들은 수도의 병원에선 보지 못했던 것들이었다.

“움직이시면 안 됩니다!”

“앗, 네.”

“목소리도 내시면 안 되고요.”

“…….”

기이한 소음과 차가운 금속의 감촉에 어깨를 움츠리던 캐롤라인은 몸에 힘을 빼라는 의료진의 호통을 몇 번이나 듣고 나서야 자세를 바로 할 수 있었다.

그동안 에릭은 검사실 앞에서 그녀를 기다렸다. 마지막 검사를 마친 캐롤라인이 검사실을 나섰을 때는 사방에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

피곤한 기색을 감추지 못한 캐롤라인은 비척비척 걸으며 보호자 대기실 문을 열었다.

캐롤라인을 발견한 에릭은 신문을 접어 의자에 내려놨다. 그는 긴 다리를 성큼성큼 뻗어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많이 피곤하십니까? 안색이 안 좋습니다.”

“난 괜찮아. 어제부터 계속 굶었더니 배가 고파서 그래.”

캐롤라인은 그렇게 말하며 천천히 걸음을 뗐다. 그녀는 저를 부축하려는 에릭의 손을 살며시 떼어 내며 입을 열었다.

“부축해 줄 필요 없어. 괜찮아.”

“지금 안색이 얼마나 안 좋은지 알고 하시는 말씀입니까?”

“…….”

“편하게 기대세요. 저는 그러라고 있는 사람입니다.”

“……응.”

에릭의 말에 이기지 못한 캐롤라인은 그에게 조심스럽게 몸을 기댔다. 평소였다면 절대 하지 않을 행동이었으나, 오늘만큼은 예외였다.

이에 에릭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지어졌다. 스스로는 인지하지 못한 변화였지만.

에릭의 부축을 받아 의자가 있는 곳까지 향한 온 캐롤라인은 냉큼 자리에 앉았다. 에릭과는 세 뼘 정도의 거리를 벌린 채였다.

캐롤라인은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다 입을 열었다.

“마샤랑 스테피는?”

“필요한 물건을 사러 잠시 나갔습니다. 나간 지 좀 됐으니 곧 돌아올 겁니다.”

“그렇구나.”

캐롤라인은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볼을 긁적였다.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에릭과 단둘이 있는 건 그녀에게 있어 고문이나 다름없었다.

어떻게 된 게 에릭과의 심리적 거리는 좀처럼 좁혀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정말이지 어색해 죽을 것만 같았다.

‘이 어색함을 어쩌면 좋아, 정말.’

“배가 고프진 않으십니까?”

갑자기 고개를 제 쪽으로 획 돌리는 에릭에 캐롤라인은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아… 아직까진 참을 만해. 물을 못 먹는 게 좀 힘들긴 하지만.”

놀란 기색을 감추려 애쓰며 고개를 휘휘 저었다. 말은 좀 더듬었지만.

“한 시간 뒤부터는 물을 포함한 음식물 섭취가 가능하다고 하는군요.”

에릭이 제 손목에 걸린 시계를 들여다보며 대답했다.

캐롤라인은 품에서 수첩을 꺼내 일정을 기록하는 에릭을 보며 해묵은 상념에 잠겼다.

‘그날 에릭이 나를 발견하지 못했다면, 난 어떻게 됐을까?’

캐롤라인은 남자치곤 선이 부드러운 얼굴을 들여다보며 과거의 일을 떠올렸다. 에릭이 별채에 쓰러져 있던 자신을 발견했던 그날을.

* * *

별채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닿지 않는 곳이었다. 웬만한 시설들이 다 본채에 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저택의 주인인 프레져가 별채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이유가 가장 컸다.

프레져는 특별한 일이 있을 때가 아니면 별채를 찾지 않았고, 하인들에게 먼지가 쌓이지 않을 정도로만 적당히 관리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렇기에 별채 앞으로 배정된 사용인의 수 역시 많지 않았고, 별채는 자연스럽게 사람들이 찾지 않는 공간이 되었다.

사실상 관리를 담당하는 사용인을 제외하곤 드나드는 사람이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하지만 그런 별채를 꽤나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다.

헌티드 백작가의 안주인, 캐롤라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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