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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떠난 뒤에 남겨진 것 (11)화 (11/156)

#11

마샤의 말이 사실인지 부부는 아주 친절했다. 특히 험상궂은 외모와 말투와는 어울리지 않게, 은근히 다정다감한 아크만의 모습이 인상 깊었다.

그들은 일행에게 사적인 질문도 하지 않았고, 그들이 성을 밝히지 않는 것에 대한 이유도 묻지 않았다.

병원에 간다고 하니 잘 다녀오라며 메리골드 한 송이를 캐롤라인의 가방에 꽂아 주기도 했다.

“정말 친절하시죠?”

“응, 그러네.”

캐롤라인이 메리골드 꽃잎을 만지작거리며 웃었다.

네 사람을 실은 마차는 덜컹거리며 도로를 지나고 있었다. 평범한 사설 마차를 빌려서 그런지 승차감이 썩 좋지는 못했다.

“와, 여긴 벌써 코스모스가 피었네요. 북부라 그런가.”

스테파니가 창문 너머를 보며 중얼거렸다. 그녀의 목소리를 따라 시선을 미끄러트리니, 도로 옆 풀숲에 옹기종기 피어 있는 코스모스 군락이 보였다.

“어머, 귀여워라.”

마샤 역시 스테파니의 어깨에 찰싹 붙어 코스모스를 구경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캐롤라인은 그런 마샤와 스테파니를 번갈아 쳐다보며 말했다.

“응. 정말 귀엽네.”

“그렇죠? 확실히 북부가 쌀쌀하긴 한가 봐요. 여름도 짧고. 내년 여름은 무조건 북부에서 보내야겠어요.”

스테파니가 결연한 표정까지 지으며 말했다. 유독 더위를 많이 타는 스테파니는 여름을 싫어했다.

“그럼 마님과 떨어져 지내야겠네?”

“응? 왜?”

“마님은 따뜻한 걸 좋아하시거든. 그렇죠?”

자신을 보며 묻는 마샤에 캐롤라인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몸이 약해서 그런가, 추위를 잘 타서.”

“아니에요. 마님께서는 원래 따뜻한 걸 좋아하셨어요.”

건강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자, 마샤가 단호하기까지 한 어조로 캐롤라인의 말을 부정했다.

캐롤라인은 알겠다는 듯, 픽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맞아. 난 남부 출신이라 그런가, 더위를 잘 안 타는 것 같긴 해. 거긴 겨울에도 따뜻하니까.”

캐롤라인의 고향인 로우밸리는 온화한 날씨가 특징인 고장이었다. 비가 오는 날도 적어서, 겨울엔 그 흔한 눈 한번 내리지 않는 곳이었다.

“그래서 어렸을 땐 함박눈을 보는 게 소원이었어.”

캐롤라인의 창밖을 보며 중얼거렸다.

“그럼 이곳에서 보시면 되겠네요.”

“응?”

갑자기 들리는 낮은 목소리에 캐롤라인이 고개를 오른쪽으로 획 돌렸다.

여태껏 말 한마디 없이 앉아 있던 에릭이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노르티움은 겨울이 아름다운 도시니까요. 석 달 정도만 기다리면 곧 눈을 불 수 있을 겁니다.”

“……정말?”

“그럼요.”

에릭이 입꼬리를 살짝 끌어 올리며 말했다.

‘저렇게 웃을 줄도 아네.’

늘 무표정, 혹은 웃음을 빙자한 사무적인 미소를 짓기만 했던 에릭이었다.

웃음이라 부르기도 민망할 정도의 작은 미소였지만, 그의 진솔한 표정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있잖아.”

상대의 진심은 자신까지 진솔하게 만드는 법이었다. 캐롤라인은 에릭의 미소에 힘입어 제 속에 숨겨 둔 진심을 고백했다. 캐롤라인은 에릭의 얼굴을 힐끔힐끔 곁눈질하다 입을 열었다.

“네. 말씀하세요.”

“사실 나, 눈사람 만들어 보는 게 소원이었어…….”

말해 놓고서 부끄러운 모양인지 캐롤라인은 고개를 푹 숙였다. 머리카락에 가려진 귀가 살짝 붉었다.

스테파니는 그런 캐롤라인을 보며 또 한 번 불경한 생각을 품었다.

‘귀여워!’

마샤가 듣는다면 놀라 자빠질 소리였다.

스테파니는 격앙되려는 목소리를 애써 다듬고서 입을 열었다.

“마, 마, 만들면 되죠. 저희 눈사람도 만들고 언덕에서 눈썰매도 타요.”

“눈썰매는 위험해서 안 돼.”

마샤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럼 눈싸움! 제가 눈덩이 단단하게 만드는 방법 알려 드릴게요.”

“너 또 눈 뭉치 안에 돌 넣을 생각하는 거니?”

“……아, 아닌데? 내가 언제 그랬다고.”

스테파니가 캐롤라인의 눈치를 살피며 말을 더듬었다. 마샤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으려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너 잘못하다 살인 미수로 감옥에 가는 수가 있어. 그러니까 마님께 이상한 거 알려 드릴 생각 말아.”

“그런 거 아니라고!”

“마님, 얘가 깡패예요, 깡패. 열 살 때 눈싸움에서 이겨 보겠다고 눈 뭉치에 돌을 넣고 던져서는, 옆집 사는 꼬마애 코가 깨졌잖아요.”

“꼬마라니, 그 오빠 나보다 두 살이나 많았어!”

“시끄러워. 마님 앞에서 언성을 높이다니, 혼나고 싶니?”

캐롤라인은 한참을 티격태격하는 스테파니와 마샤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두 사람은 사촌이라기보다는 친자매처럼 친밀해 보였다.

‘눈싸움이라…….’

캐롤라인은 귀마개를 하고 거리를 뛰어다니던 아이들을 떠올렸다.

수도에 있던 시절, 눈이 내리는 날이면 종종 신이 난 아이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런 날이면 캐롤라인은 별채의 가장 높은 층에 올라 눈 쌓인 정원을 내려다보곤 했다.

푸릇했던 잔디 위로 흰 눈이 내려앉고, 분수의 물줄기가 얼어붙는 광경은 봐도 봐도 신기했다.

구름처럼 푹신한 눈 위로 새겨진 고양이 발자국을 볼 때면, 그녀 역시 하얀 눈밭에 제 발자국을 새기고 싶었다.

뽀드득거리며 눈이 뭉개지는 소리는 언제 들어도 기분이 좋았기에 종종 설원 위를 뒹굴고 싶은 충동에 잡히곤 했다.

하지만 귀부인의 체통은 눈밭을 뒹구는 것을 허락해 주지 않았다.

‘양가죽 장갑에 눈을 묻혀 들어오는 귀부인이라니. 다른 사람들이 봤다면 기함했겠군.’

결혼 후 처음 맞은 겨울이었다. 망토와 장갑에 눈을 잔뜩 묻혀 들어온 저를 보던 프레져의 눈빛을, 캐롤라인은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발가락이 딱딱해질 정도로 내리는 눈은 차가운 축에도 끼지 못했다.

차게 얼어붙은 프레져의 시선이 함박눈보다 몇 배는 더 시리게 느껴졌으니까.

그날, 프레져는 그 쌀쌀맞은 말을 끝으로 제 앞에서 사라졌다. 그녀의 곁에는 호들갑을 떨며 그녀의 장갑을 벗기는 하녀 몇 명만이 남았을 뿐이었다.

“마님?”

“……응? 어.”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캐롤라인은 오래된 상념에서 벗어났다. 에릭이 그런 저를 걱정스럽게 쳐다보고 있었다.

“괜찮으니까 그런 눈으로 보지 않아도 돼.”

“……알겠습니다.”

에릭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캐롤라인은 멋쩍게 볼을 긁었다. 이 와중에도 프레져 생각을 하고 있었단 말은 절대로 할 수 없었다.

* * *

마차는 머지않아 노르티움 종합 병원에 도착했다. 마샤는 캐롤라인을 대신해 접수처로 향했고, 에릭은 병원 지도를 보며 흉부외과가 있는 병동을 찾는 중이었다.

“집사님, 지도 거꾸로 보고 계신 것 같은데요.”

“아,”

스테파니의 말에 에릭이 들고 있던 지도를 황급히 돌렸다. 그제야 뒤집혀 있던 글자들이 제자리를 찾았다.

“……설마 지도를 못 보시는 건 아니죠? 아 혹시, 길치라든지.”

“아닙니다.”

에릭은 단호하게 말하면서도 몇 번이나 헛기침을 했다.

캐롤라인은 웃음이 나오지 않게 입술을 꽉 깨물었다. 어깨가 살짝 떨렸지만, 지도를 보는데 집중하고 있던 에릭은 알아차리지 못했다.

의과 대학을 수석으로 입학한 엘리트라더니, 은근 이런 부분에서 맹한 구석이 있는 그였다.

“우리가 지금 있는 곳이 1병동이니, 3병동으로 가려면…….”

“우리가 지금 1병동에 있긴 한데, 현재 위치는 그쪽이 아니거든요?”

스테파니가 지도 위를 짚은 에릭의 검지 손가락을 아래로 잡아당겼다.

“지금 우리가 있는 곳이 정형외과 앞이잖아요. 그러니까 위치를 이쪽으로 잡고 시작해야죠.”

“아,”

에릭은 외마디 탄성을 뱉으며 제 손가락을 거둬들였다. 어지간히 멋쩍은 모양이었다. 스테파니는 그런 에릭을 초점 없는 눈으로 응시했다. 혀를 차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기도 했다.

“어휴, 됐어요. 그냥 제가 가서 물어보고 올게요.”

스테파니는 에릭에게서 지도를 낚아채고는 앞서 걸어갔다. 그러곤 지나가던 간호사 한 명을 붙잡았다.

다행히 간호사는 친절하게 3병동으로 가는 길을 알려 주었고, 일행은 무사히 흉부외과 진료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어머, 이제 오시는 거예요?”

먼저 도착해 있던 마샤가 눈을 커다랗게 뜨고 물었다. 마샤는 세 사람이 접수처를 떠나고 10분쯤 뒤에 출발했지만, 일행보다 5분이나 일찍 진료소에 도착했다.

“으응.”

캐롤라인은 에릭을 슬쩍 쳐다본 뒤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어쩌다가요? 1병동에서 흉부외과까지는 그닥 멀지도 않은데…….”

“집사님께서 지도를 잘못 보셔서.”

“어?”

“글쎄 지도를 거꾸로 들고 보고 계시던 거 있지? 그래서 길 찾느라 좀 늦었어.”

“아…….”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 스테파니에 마샤의 입이 꽉 다물렸다. 정작 스테파니는 어깨를 한 번 으쓱이고는 쿨하게 세 사람을 지나쳐 걸었다.

스테파니의 뒤통수에 꽂혀 있던 마샤의 시선이 스르륵 움직여 에릭에게 닿았다.

“그, 그럴 수도 있죠.”

“맞아. 이렇게 넓은 곳에서 한 번에 길을 찾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 그래.”

캐롤라인과 마샤가 애써 위로했지만, 에릭에겐 통하지 않는 듯했다.

타이밍 좋게 캐롤라인을 부른 간호사가 아니었다면 에릭의 얼굴은 붉게 달아올랐을 것이 분명했다.

* * *

캐롤라인은 가져온 짐을 병실에 가져다 놓고 옷을 갈아입었다. 마샤와 스테파니는 캐롤라인이 쓸 물건들을 정리했고 에릭은 병실 밖에서 세 사람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캐롤라인의 병실은 6인용 입원실이었기에 남자가 들어올 수 없었다. 혼자 쓰는 병실이라면 모를까, 여성 환자 6명만 모여 있는 병실에 마음대로 남자를 들이는 민폐를 저지를 수는 없었다.

마샤는 무조건 1인실을 빌려야 한다며 고집을 부렸지만, 그 뜻을 거부한 건 캐롤라인이었다.

‘입원이라고 해 봤자 겨우 이틀뿐인데…….’

검사만 끝나면 바로 집으로 돌아갈 예정이고, 앞으로 치료에 쓰일 돈을 생각한다면 한 푼이라도 아껴야 했다.

물론 헌티드 가문의 안주인에게 남아도는 것이 돈이었다. 치료비는 넉넉히 챙겨 왔으니 돈 걱정에 허덕일 일은 절대로 없을 것이었다.

‘하지만 세 사람을 위해서라면…….’

저를 위해 먼 길을 따라와 준 고마운 이들이었다. 훗날 자신이 세상을 떴을 때, 삶의 마지막을 함께해 준 이들을 위해 최대한 많은 것을 남겨 주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선 무조건 돈을 아껴야 했다.

“마님, 준비 다 되셨나요?”

“응.”

“그럼 2층으로 내려가요. 이건 제가 들게요.”

스테파니가 약봉지와 물병이 든 가방을 챙기며 말했다. 상념에서 벗어난 캐롤라인은 얇은 카디건을 걸친 뒤 침대에서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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