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녀가 떠난 뒤에 남겨진 것 (10)화 (10/156)

#10

캐롤라인 일행은 마차와 기차를 번갈아 타며 도시를 이동했다. 최종 목적지는 당연히 종합병원이 있는 노르티움이었다.

바람이 선선하게 불어오는 계절이 되어서야 일행은 노르티움에 도착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그곳에 정착할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마샤가 얻은 집은 번화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자리한 3층짜리 건물이었다.

1층엔 작은 정원과 함께 주인 내외가 운영하는 꽃집이 있었고, 3층엔 4인 가족이 쓰는 방과 함께, 그들이 사용하는 사무실, 20대 여성이 혼자 묵는 방이 따로 있었다. 캐롤라인 일행은 2층 전체를 사용하기로 했다.

세 개의 방에 욕실 두 개, 거실 하나. 그리고 거실 옆에 작게 달려 있는 테라스까지. 전에 살던 곳에 비하면 한참 작은 곳이었지만 소박한 매력이 있는 집이었다.

가장 안쪽에 있는 큰 방을 캐롤라인이 쓰기로 했고, 나머지 방은 마샤와 스테파니가 하나씩 가져갔다. 그리고 에릭은 세 사람이 사용하는 곳과 분리되어 있는 작은방을 따로 쓰기로 했다.

‘예뻐…….’

캐롤라인은 새로 얻은 보금자리가 몹시 마음에 들었다.

창은 남쪽으로 나 있어 햇빛이 잘 들었고, 꽃집을 운영하는 주인 내외 덕에 정원엔 아름다운 꽃들이 잔뜩 피어 있었다. 그녀에겐 작은 낙원이나 다름없었다.

“마샤, 어떻게 이런 집을 구했어? 정말 대단해.”

캐롤라인이 푹신한 침대에 앉으며 말했다. 방 안엔 마샤가 미리 주문해 놓은 가구들이 깔끔하게 세팅되어 있었다.

“북부의 대도시라 세가 비쌀 줄 알았는데, 번화가에서 좀 벗어나니까 가격이 내려가더라고요.”

마샤가 창문을 열며 말했다. 햇빛에 투과된 뿌연 먼지들이 공중으로 떠올랐다.

“그래도. 내가 보내 준 돈으로 이 정도 되는 집을 구하기 쉽지 않았을 텐데.”

“한 층을 통째로 빌리고 싶다고 했더니 세를 많이 깎아 주셨어요.”

마샤는 쉰 살이 조금 넘어 보이던 주인 내외를 떠올렸다. 좀 수다스러운 점이 사람을 피곤하게 만들긴 했으나, 정 많고 인심 좋은 부부였다.

“고마워, 마샤.”

캐롤라인이 진심으로 감동한 표정을 지으며 마샤를 쳐다봤다. 그녀의 얼굴엔 형용할 수 없는 온갖 감정들이 뒤섞여 있었다.

마샤에 대한 고마움에서 시작해 일행에 대한 고마움, 미안함, 신뢰, 그리고 스스로에 대한 한심함까지.

투명한 눈으로 그녀의 해묵은 감정들이 흘러나오는 것 같았다.

“마님께서는 저를 너무 과소평가해서 문제라니까요. 유능한 하녀에겐 이 정돈 일도 아닌데 말이지요.”

마샤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그 과장된 리액션에 캐롤라인도 마샤도,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다.

그 덕에 캐롤라인은 마음의 무게가 조금 가벼워진 느낌이 들었다.

“마샤 언니, 어디 있어?”

문 너머로 스테파니의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님 방에 있는데, 왜?”

“재봉틀은 어디에 두면 돼?”

캐롤라인과 함께 있다는 말에 스테파니는 큰 방으로 향하던 걸음을 멈추고 물었다.

“어, 그건 테라스 옆 벽장에.”

“……테라스 옆에 벽장이 있다고?”

스테파니가 의아한 목소리로 말했다. 벽장이 어디에 있는지 찾지 못한 모양이었다.

“아무래도 나가 봐야 할 것 같아요.”

“응, 나는 신경 쓰지 말고 얼른 스테파니를 도와줘.”

“네.”

마샤는 구겨진 치마를 손으로 털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곤 문고리를 잡으려다 말고 캐롤라인을 쳐다봤다.

아니나 다를까, 캐롤라인은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려다가 마샤와 눈이 딱 마주쳤다.

“혹시라도 저 몰래 뭐 하려고 하지 마세요.”

“응, 안 해.”

“짐 정리는 저희가 알아서 할 테니 걱정 말고 푹 쉬세요. 알겠죠?”

“알겠어.”

‘마샤 언니!’하고 스테파니가 목청을 높일 때가 돼서야 마샤는 캐롤라인의 방에서 나갔다.

캐롤라인은 굳게 닫힌 문을 바라보다 침대에 털썩 몸을 뉘었다.

“미안한데…….”

캐롤라인의 건강이 악화된 이후로 마샤는 심각할 정도로 그녀를 과보호했다.

하지만 저 때문에 생고생을 하는 사람들을 내버려 두고 혼자서만 빈둥거리고 싶지 않았다.

“뭐라도 도와주고 싶어…….”

하지만 돕는답시고 나서는 게 오히려 저들을 더 불편하게 할 것이라는 걸, 캐롤라인은 잘 알고 있었다. 어찌 됐든 자신은 저들의 고용주였으니. 그걸 알면서도 마음이 편치 못한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생각해 보니 결혼 초엔 프레져와도 이 문제로 자주 다퉜었지.

캐롤라인은 시골에서 태어나 15년을 평민으로 살아왔다.

또한 그녀의 고향엔 하인을 부리는 사람이 없을 뿐더러, 하인을 고용할 만큼 부유한 사람도 없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사람을 부리는 일이 너무나도 불편했다. 잔에 물을 따르는 사소한 일마저 하인에게 시켜야 한다는 것은 그녀를 몹시 피곤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평생을 대귀족으로 살아온 프레져는 달랐다. 그에게 있어 캐롤라인의 행동은 모두 궁상맞은 짓으로 여겨질 뿐이었다.

‘귀족이면 귀족이라는 신분에 맞게 행동해. 괜히 궁상떨다 아랫것들한테 책잡히지 말고.’

그러고 보니 이런 말도 했었다.

“와, 진짜 나쁜 놈이었네.”

캐롤라인은 피식 웃으며 중얼거렸다. 다시 생각해 봐도 뭐 하나 다정한 구석이 없는 남자였다.

그렇게 싸늘한 인간을 뭐가 좋다고 따라다녔는지.

“…….”

그리고 왜 자신은 지금 이 순간에도 그를 떠올리고 있는 건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 * *

노르티움에 정착한 이후, 캐롤라인은 꼬박 사흘을 앓아누웠다.

그동안의 유랑 생활로 피곤이 누적되기도 했고, 이제 마음 편하게 쉴 수 있다는 생각에 긴장이 풀린 탓도 있었다.

정작 환자인 캐롤라인은 아무렇지 않아 했지만, 주변에서 그녀를 가만두지 않았다.

“어떡해요, 에릭. 당장 병원에 모셔 가야 하는 것 아니에요?”

“마샤, 병원엔 어제 다녀왔잖아…….”

캐롤라인이 갈라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것 보세요! 목이 다 쉬어서 제대로 말씀도 못 하시잖아요!”

하지만 마샤를 진정시키기 위해 한 말은 오히려 그녀에게 악영향을 끼친 듯했다.

캐롤라인은 체념한 듯 숨을 내쉬며 두 눈을 감았다.

“마샤, 가만히 좀 있어요.”

“마님이 저렇게 누워 계시는데 제가 어떻게 가만히 있어요!”

“당신이 그렇게 소리를 지르면 마님께서도 편히 못 쉬십니다.”

에릭의 무게 있는 목소리에 마샤는 마지못해 입을 다물었다.

캐롤라인은 마음속으로 에릭에게 감사를 표했다. 그가 아니었다면 머지않아 청력을 상실했을 거였다.

그렇다고 해서 마샤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마샤는 하녀 일을 그만둔 지 꽤 되었고, 꼬박 세 달 만에 자신과 조우했다. 그사이 몸이 더욱 안 좋아졌으니 마샤가 난리를 치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했다.

“마님, 묽은 수프를 가져왔어요.”

때마침 스테파니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트레이 위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수프와 함께 물컵과 약 봉투가 올려져 있었다.

“벌써 시간이 됐나 보네.”

캐롤라인이 무거운 몸을 힘들게 일으켰다. 조금 전에 아침을 먹었던 것 같은데, 벌써 점심때가 된 모양이었다.

제 몸의 상태를 깨달은 이래로 캐롤라인은 매우 건강한 생활을 하는 중이었다.

약 때문이라도 하루 세끼를 꼬박 챙겨 먹었고, 체력 향상을 위해 하루 30분씩 걷기 운동을 했으며, 심박수의 안정을 위해 명상과 심호흡을 하는 시간을 늘렸다.

이렇게 건강한 생활을 하는데도, 병든 몸은 습관적으로 끼니를 걸렀던 때보다 더욱 약해져 있었다.

“마님, 누워 계세요.”

“언니, 누워서 식사를 어떻게 해.”

스테파니가 난리를 치는 마샤에게 핀잔했다.

“어떻게 잘 흘려서 입에 넣어 드리면 되지 않을까?”

“……말도 안 되는 소리 할 거면 밖으로 나가.”

스테파니가 마샤의 등을 떠밀며 말했다. 나가지 않으려 어떻게든 버티는 마샤를 보며 에릭이 말을 보탰다.

“누워서 식사하면 체합니다. 사람이 너무 많아도 문제니, 마샤는 방에서 나가 주세요. 식사 시중은 스테파니가 들도록 하는 게 낫겠습니다.”

“에릭…….”

마샤가 촉촉해진 눈망울로 그를 응시했다. 하지만 에릭은 매몰차게 고개를 돌렸다.

“충분히 오래 계셨지 않습니까. 마님께서도 피곤해하십니다.”

“……알겠어요.”

마샤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밖으로 나갔다. 마샤에겐 미안하지만, 캐롤라인은 뒤늦게 찾아온 정적이 못내 반가웠다.

스테파니는 수프를 후후 불어서 캐롤라인의 입에 넣어주었다. 캐롤라인은 새끼 새처럼 열심히 스테파니가 주는 음식을 받아먹었다. 마샤의 과보호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빨리 나아야 했다.

“다행히 열은 많이 내렸군요.”

캐롤라인이 야무지게 약을 삼키는 모습을 지켜보던 에릭이 그녀의 이마에 손을 짚으며 말했다.

애초에 심장 발작이 아닌 피로로 인한 몸살감기였기에 며칠 푹 쉬면 금방 나을 터였다.

하지만 몸이 약한 환자에게 몸살은 쥐약과도 같았기에 그들은 조금 긴장한 상태였다.

캐롤라인은 잠기운이 솔솔 도는 것을 느끼며 다시 침대에 몸을 뉘었다. 그녀가 눕기 쉽도록 스테파니 상체를 받쳐 주었다.

“아까보다 많이 나아진 거 같아.”

“다행이네요.”

캐롤라인의 말에 스테파니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얼른 나아야지. 얼른 나아야 마샤도 덜 걱정할 테니까…….”

몰려드는 졸음에 캐롤라인의 발음이 뭉개졌다.

스테파니는 그런 그녀를 위해 이불을 목 끝까지 올려 주었다.

“나으면 우리 다 같이… 호수에 가자. 도시락도 싸서…….”

“네. 마님이 좋아하시는 연어 샌드위치도 만들어서 가요.”

“으응…….”

한참을 웅얼거리던 목소리가 멎고, 이내 규칙적인 숨소리가 방 안을 가득 메웠다. 에릭과 스테파니는 커튼을 치고 조심스럽게 방을 빠져 나갔다.

* * *

다행히 얼마 지나지 않아 캐롤라인은 기력을 되찾았다. 그리고 네 사람은 노르티움 종합 병원으로 향할 준비를 했다. 캐롤라인이 몸살을 앓는 바람에 검사 일정이 뒤로 밀린 참이었다.

정밀 검사를 하기 위해 캐롤라인은 이틀간 병원에 입원할 예정이었고, 세 사람은 그녀의 병실을 번갈아 지키기로 했다.

“마님, 30분 후면 마차가 도착할 거예요.”

“알겠어.”

고개를 끄덕인 캐롤라인은 서둘러 머리를 정리했다. 원래 그녀의 머리는 마샤가 만져 주곤 했지만, 자신의 입원 준비로 정신이 없는 그녀에게 이런 하찮은 일을 맡길 순 없었다.

머지않아 긴 머리를 하나로 땋은 캐롤라인이 1층으로 내려왔다.

그녀의 손엔 작은 손가방 하나만 달랑 들려 있었다. 애초에 챙길 짐이 많지 않기도 했고, 웬만큼 무거운 물건들은 다 에릭이 들고 있었다.

정원을 지나 건물 입구에서 마차를 기다리고 있는데, 일행을 발견한 주인 내외가 말을 걸어왔다.

“아하, 일주일 전에 이사 왔다던 분들이 이분들이구만.”

턱수염을 수더분하게 기른 남자가 너털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집을 정리하느라 인사가 늦었네요. 죄송해요.”

“아니에요.”

마샤가 살갑게 인사를 하자 회색 머리를 단정하게 묶은 여자가 미소로 화답했다.

“안녕하세요. 캐롤라인이라고 합니다.”

“스테파니예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에릭이라고 합니다.”

캐롤라인이 먼저 인사하자 나머지 두 사람도 그녀를 따라 고개를 숙였다.

“난 로렌이에요. 이 사람은 내 남편인….”

“아크만 힐롱이요. 힐롱이라고 불러 주시오.”

남자가 캐롤라인에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독특한 이름과 악센트가 강한 말씨로 보건대, 타국에서 이주해 온 사람인 듯했다.

“반가워요. 힐롱 씨, 힐롱 부인.”

캐롤라인은 투박한 그의 손을 마주 잡으며 미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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