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한심해.”
프레져는 대표실에 들어오자마자 거칠게 넥타이를 끌러 내렸다.
꼴에 무용수라고. 같지도 않은 변명을 당차게 늘어놓는 로잘린이 우습기 짝이 없었다.
본인의 나태함과 실력 부족을 만천하에 떠벌리는 꼴이라니. 조만간 그녀의 직함 앞에 있는 수석이라는 글자를 없애야겠다고 생각하는 그였다.
남이 안다면 기함할 생각을 아주 태평하게 하고 있는 프레져와 달리, 옆에 있는 휴고는 아주 당황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이신 거지?’
사실 그는 다짜고짜 지역 공연 일정을 잡으라는 프레져의 지시에 적잖이 놀란 참이었다.
프레져는 뼛속까지 고귀한 남자가 아니던가.
현대 사회에 와 신분 간의 격차가 모호해졌다고는 하나, 그래도 귀족은 귀족이었다. 게다가 프레져는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명문가, 헌티드 백작가의 주인이었다. 헌티드 백작가는 왕국이 건국된 이래 단 한 번도 쇠퇴한 적이 없는 대귀족이었다.
그리고 귀족들은 혈통이 고귀할수록 고리타분해지는 경향이 있었다. 그건 프레져에게도 어느 정도 해당되는 것이었다.
자존심 세고 보수적인 면모를 가진 프레져가 지방 공연은 절대 하지 않겠다던 고집을 이렇게 쉽게 꺾을 줄은 몰랐다.
그것도 캐롤라인이 사라진 와중에.
그날 로겐을 내보낸 뒤, 프레져가 휴고에게 따로 내린 명령은 지역 순회공연을 준비하라는 것이었다. 최대한 빨리 스케줄을 짜라는 말에 휴고는 몇 날 며칠을 정신없이 일만 했다.
그리고 그 결과를 보고하기가 무섭게, 프레져는 바로 공연 일정을 확정 지었다.
심지어 그 계획을 번복할 수 없게끔 모 신문사와 인터뷰까지 마친 참이었다. 헌티드하우스의 오페라를 수도 밖에서도 볼 수 있다는 소식은 왕국 전역에 빠르게 퍼져 나갔다.
‘하……. 생각을 여쭤볼 수나 있었으면 좋겠군.’
휴고는 다리를 꼰 채 의자에 앉아 있는 프레져를 보며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제 상사는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프레져가 이렇게 성급하게, 대책 없이 움직인 것은 전례 없는 일이었다. 물론 그라면 어떻게든 없는 대책을 만들어 낼 위인이 분명하지만.
제가 없는 동안 단원들과 충분히 이야기를 마쳤을 것이라 생각했다. 프레져는 그렇게 안하무인인 사람은 아니었으니.
하지만 단원들의 반응을 보니 그것도 아닌 것 같았다.
휴고는 어느 순간부터 프레져의 생각을 읽으려는 노력을 포기했다. 그저 이 급격한 변화의 중심에 캐롤라인이 있을 것이라는 점만 어렴풋이 짐작할 뿐이었다.
“보고 시작해.”
“네.”
맞은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휴고는 상념에서 벗어났다.
“서부의 로든웨스트를 시작으로 북부의 노르티움, 중부의 센그릭, 동부의 도킨스, 남부의 림홀 순서로 돌 예정입니다. 마차보다는 기차를 이용해 이동하고…….”
휴고는 각 지역들 중, 가장 인구가 많고 상권이 발달된 도시를 골랐다. 오페라 발레 공연을 올리기 위해선 그에 걸맞은 극장과 장비가 필수이기 때문이었다.
또한 공연 일정에 지장이 없게끔, 각 도시로 향하는 이동 경로까지 고려했다. 그렇게 해서 나온 결과물이 바로 이것이었다.
제가 짜 놓고도 ‘과연 이게 가능하려나’ 싶은 일정이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그의 선에서 내놓을 수 있는 최선책이기도 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보고를 듣는 프레져의 표정은 언짢아 보였다.
“대표님, 혹시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있으십니까?”
휴고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프레져는 손끝으로 종이를 툭툭 두드리다가 대답했다.
“있어.”
“…….”
“하지만 이게 최선인 것 같으니 별수 없지. 넘어가.”
“……네.”
정말이지 상대방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는 남자였다.
“공연 당일이 되면 지역 신문 기자들이 공연장 앞으로 몰려들 겁니다. 그때를 대비해 인터뷰 준비를…….”
“안젤라 세워.”
“……네?”
일을 이렇게 벌여 놓고, 인터뷰엔 안젤라 골드를 세우겠다고?
휴고는 기가 찼지만 애써 내색하지 않고 말했다.
“그래도 기자들은 대표님과의 인터뷰를 원할 겁니다.”
“인터뷰는 이미 잡아 놓은 것들로도 충분해.”
“…….”
“그리고 헌티드하우스의 상징은 내가 아닌 안젤라 골드이니, 그녀가 직접 인터뷰에 나선다면 기자들도 더 좋아하겠지.”
휴고는 오페라의 여왕이라 불리는 여자의 얼굴을 잠시 떠올렸다. 천사 같은 외모에 그에 무척이나 어울리는 목소리를 가진 여자.
그녀의 인기를 생각한다면 프레져가 말하는 대로 하는 것이 나을 터였다.
기자들은 무뚝뚝하고 거만한 대귀족과의 인터뷰보다는 아름답고 재능있는 스타와의 인터뷰를 더 선호할 테니.
“……그럼 안젤라 양께는 그리 전달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이제 가서 일 봐.”
“네.”
휴고는 대표실을 나가자마자 손수건을 꺼내 식은땀을 닦았다. 참았던 숨이 그제야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옆에서 온종일 우는소리를 하던 로겐의 마음이 십분 이해되었다.
휴고는 잠시 벽에 기대 숨을 고르며 처리해야 할 일들을 떠올렸다. 순회공연을 향한 여정은 멀고도 험난할 것이 분명해 보였다.
* * *
휴고가 나가자 대표실 안에는 적막이 가득 들어찼다. 방음이 잘되게 지어 놓은 건물이라 그런지, 단원들이 연습을 하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프레져는 보고서에 적힌 일정표를 내려다봤다. 두 달 안에 이 넓은 왕국을 순회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 쉽지 않은 일을 기어코 해내고야 마는 남자였다. 그가 시도했던 일 중, 실패했던 것은 없었다.
딱 하나, 캐롤라인 헌티드를 제외하곤.
“그 말간 얼굴에 방심했던 거지.”
변수는 늘 생각지 못한 곳에서 나타나는 법이었다. 그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던 자신의 안일함에 프레져는 조소를 지었다.
어떻게 된 게 그 여자는 친하게 지내는 귀부인 하나가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남들 다 하는 자수 모임이나 티파티에 참여하는 것도 아니었다.
당연히 그녀의 행방을 아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덕분에 아내의 행방을 타인에게 묻는, 꼴사나운 짓은 하지 않은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남부나 동부는 아닐 테고.”
오래전부터 계획을 짜 움직인 것이라면 눈에 보이는 뻔한 곳에 가 있진 않을 터였다. 그녀의 고향이 있는 남부라든지, 직접 편지를 부쳤던 플라이크 같은 곳 말이다.
그리 간이 크지 않은 여자이니 기세 좋게 수도에 숨어 있진 않을 테고.
남부와 동부를 제외한 다른 지역부터 샅샅이 뒤지기 시작하면 어떻게든 덜미를 잡을 수 있을 터였다.
단원들이 연습과 공연에 매진할 동안, 프레져는 사람을 풀어 도시를 이 잡듯 뒤질 계획이었다.
‘나를 철저히 속이고 도망간 이유가 뭔지, 정말 그 에릭이라는 집사 놈과 정분이라도 난 건지. 그 잘난 입으로 어떤 변명을 내뱉을지 들어 봐야겠어.’
물론 시골 깊숙한 곳까지 작정하고 숨어들었다면 찾을 수 없겠지만.
만일, 그녀를 찾지 못한다면.
“……어떻게 할까.”
제가 싫어 다른 놈과 도망친 여자를 굳이 붙잡을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감히 저를 속인 그 괘씸함은 벌해야 마땅했다.
게다가 그녀의 도주가 길어진다면 이를 의심하는 사람이 분명 나타날 것이었다.
지금은 제 측근을 비롯한 저택의 사용인 몇 명만 알고 있는 사실이라지만, 그녀의 부재를 언제까지 숨길 수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었다. 당장 부부 앞으로 온 초대장만 해도 한두 개가 아니었으니.
“……감히.”
고귀한 헌티드의 이름에 먹칠을 하는 이는 그 누구라도 용서할 수 없다. 그게 설령 제 부인일지라도.
그것이 프레져가 내린 결론이었다.
* * *
햇살이 눈부시게 쏟아지는 오후, 고급스러운 마차 한 대가 헌티드하우스 앞에 멈춰섰다.
“아가씨, 도착했습니다.”
“고마워요.”
에스코트를 받은 여자가 살짝 미소 지었다. 그러자 그녀의 손을 잡고 있던 남자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게 달아올랐다.
여자는 남자를 향해 가볍게 눈인사를 하고는 몸을 돌렸다. 오후의 햇빛을 머금은 금발은 더욱 찬란해 보였다. 그녀는 굽이치는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직원 전용 출입구로 향했다.
“안젤라 양, 오셨군요!”
그녀를 발견한 로겐이 밝은 목소리로 인사했다.
“로겐, 오랜만이에요.”
그녀는 여명의 천사, 황금으로 빚은 인간이라는 찬사가 썩 잘 어울리는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휴가는 잘 보내셨나요?”
“신경 써 주신 덕분에요. 서부에 있는 별장에서 편히 쉬다 왔어요.”
“멋진 휴가를 보내고 오셨군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한 안젤라는 음악 소리가 흘러나오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살짝 열린 문틈으로 발레 연습에 한창인 무용수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 모습을 보자 새삼 지방 공연을 하기로 했다는 사실이 피부로 와닿았다.
“대표님이 계신 곳으로 안내해드릴까요?”
“그럼 저야 고맙지요.”
로겐은 안젤라를 대표실이 아닌, 하우스 3층에 있는 귀빈실로 이끌었다.
“오늘은 중요한 손님이 오신 모양이네요? 귀빈실에 계신 걸 보니.”
“네. 그 손님은 조금 전에 가셨으니 지금 들어가시면 됩니다.”
로겐은 안젤라를 대신해 문을 두드렸다.
“대표님, 안젤라 골드 양께서 오셨습니다.”
안에서 허락이 떨어지자 로겐이 문을 열었다. 프레져는 소파 위에 다리를 꼬고 앉아 술잔을 들고 있었다.
안젤라는 안으로 들어서며 미간을 좁혔다.
“대낮부터 술이라뇨.”
“중요한 손님이라 어쩔 수 없었어요. 워낙 술을 좋아하는 분이라.”
프레져는 그렇게 말하고서 술잔에 담긴 위스키를 한입에 털어 넣었다. 그러곤 빈 잔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이를 응시하는 안젤라의 눈이 가늘어졌다. 안젤라가 아는 프레져는 공과 사를 명확히 구분할 줄 아는 남자였다. 적어도 그는 일터에서 술을 들이마시는 안하무인은 아니었다.
“그럼 저는 나가 보겠습니다.”
“고마워요, 로겐.”
로겐의 인사에 안젤라는 언제 인상을 썼냐는 듯, 상냥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 안젤라의 표정이 빠르게 변화했다.
순식간에 무표정이 된 안젤라는 프레져의 맞은편에 가 앉았다. 그러곤 그의 앞에 놓인 술잔을 빠르게 낚아챘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일을 친 거예요?”
안젤라는 프레져에게 시선을 주는 대신, 술잔에 위스키를 가득 따랐다. 그리고 마치 냉수를 들이켜는 듯, 벌컥벌컥 술을 마셨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프레져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장관이로군.”
“말 돌리지 말고 묻는 말에 대답이나 하시죠?”
안젤라가 술잔을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이야기는 충분히 된 걸로 알고 있는데요.”
“휴고 씨와는 충분히 됐죠. 하지만 대표님과는 이야기하지 않았잖아요?”
안젤라가 팔짱을 끼며 허리를 꼿꼿하게 세웠다. 프레져를 보는 그녀의 시선이 불퉁했다.
5개 지역 공연. 그것은 안젤라와의 협의 없이 프레져가 독단적으로 내린 결정이었다. 휴고와 이야기가 끝난 부분이라고는 하나, 제대로 짚고 넘어가야 할 필요가 있었다.
“대체 무슨 바람이 불었길래 순회공연을 한다는 거예요? 그런 거 싫어하잖아요.”
“아직도 싫어하죠.”
“그런데 왜 갑자기 그런 결정을 내린 거예요?”
안젤라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비어 버린 술잔을 바라보던 프레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하기 싫어도 해야만 하는 일들이 있죠.”
“…….”
“내 생각엔 지금이 그런 경우인 것 같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