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녀가 떠난 뒤에 남겨진 것 (6)화 (6/156)

#6

“나 태어나서 그렇게 큰 폭포는 처음 봤어.”

“템페스토 폭포는 글랜포드에서 가장 큰 폭포니까요.”

“그래도 책에서 본 거랑 실제로 보는 거랑 완전 다른 거 있지? 물 떨어지는 소리가 어찌나 큰지 스테피가 말하는 소리도 안 들리더라니까?”

마샤는 여행담을 주절주절 늘어놓는 캐롤라인을 흐뭇하게 바라봤다.

동부의 야시장을 시작해, 고래를 닮은 범선, 로즈힐 언덕의 장미 정원까지. 쉴새 없이 조잘거리는 캐롤라인의 뺨은 즐거움으로 발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에릭은요?”

“아, 요 근처에 있는 병원에서 대학 동기가 일하고 있다나 봐. 심부름도 시킬 겸 다녀오라고 했어.”

“그렇군요.”

마샤는 멀끔하게 잘생긴 에릭의 얼굴을 떠올리며 찻잔을 들었다.

그날 별채에 쓰러져 있던 마님을 발견했던 사람이 에릭이 아니었다면, 분명 큰일이 났겠지.

그때를 떠올리니 목구멍이 바짝 타들어 가는 것 같아 마샤는 급하게 찻물을 삼켰다.

“마님, 약 드실 시간이에요.”

때마침 스테파니가 테라스 문을 열며 들어왔다. 그녀가 든 트레이 위엔 커다란 물컵 하나와 여러 개의 알약이 담겨 있었다.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니? 수다 떠느라 시간 가는 줄도 몰랐네.”

“그래도 이렇게 즐거워하시는 걸 보니 기쁘네요.”

스테파니가 싱긋 웃으며 캐롤라인에게 약을 내밀었다.

캐롤라인은 제 엄지손톱만 한 알약 하나를 입에 털어 넣고 물컵을 들었다. 물컵이 어찌나 큰지 조막만 한 얼굴이 다 가려질 정도였다.

그렇게 반복해서 약을 먹길 다섯 번. 컵 가득 담겨 있던 물은 어느새 바닥을 보였다.

“물 좀 더 드릴까요?”

“응. 잘 안 넘어간 것 같아.”

캐롤라인이 목 언저리를 손으로 누르며 말했다. 그러자 스테파니가 얼른 주전자를 가져왔다.

캐롤라인은 물을 몇 모금 더 마시고 나서야 살 것 같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마샤는 울컥 치솟는 감정을 억누르느라 애를 먹었다.

야생의 짐승도 저렇게 큰 알약은 못 삼킬 것 같은데, 캐롤라인은 오죽할까.

“마님, 약이 너무 큰데. 부숴 먹으면 안 된대요?”

“응. 부수거나 씹어 먹지 말고 한 번에 꿀꺽 삼키래.”

“…다른 약은요?”

“마찬가지지 뭐.”

캐롤라인이 어설프게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그러곤 화두를 바꾸려는 듯 손을 휘휘 내저었다.

“참, 준비는 잘 돼 가?”

“네. 노르티움 병원에 미리 예약을 잡아 놨어요. 가면 대기 없이 바로 검사받을 수 있을 거래요.”

“다행이네.”

“병원 근처에 작은 집 한 채도 얻어 놨고요. 백작저보다는 훨씬 작긴 해도 지내시는 데 큰 문제는 없을 거예요.”

“그 저택이 지나치게 큰 거지, 뭘.”

“그렇긴 하죠.”

“…스테피?”

느닷없이 대화에 끼어든 스테파니를 본 마샤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대체 언제 자리에 앉은 건지. 마샤 옆에 의자를 바짝 당겨 앉은 스테파니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캐롤라인의 말에 동의를 표하고 있었다.

솔직히, 헌티드 백작저가 과하게 넓기는 했다. 물론 그만큼 봉급을 많이 주기도 했지만.

“거긴 진짜 과해. 본채는 처분하고 별채만 남겨 놓을 필요가 있어.”

공감해 주는 사람이 나타나자 캐롤라인의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그녀는 흔치 않게 목청을 높였다.

“아니, 별채도 반으로 쪼개야 해. 식당도 너무 과하게 넓어.”

캐롤라인은 썰렁한 저택에 홀로 남겨져 있던 시간을 회상하며 입을 열었다.

“내가 거기서 얼마나 외로웠는지 알면 그 사람도 아마…….”

캐롤라인은 무어라 말을 이으려다가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포기했다.

“아마는 무슨.”

“…….”

“그 사람은 죽었다 깨어나도 모를 텐데. 내가 그 저택에서 2년 동안, 어떤 심정으로 자길 기다렸는지.”

그녀가 말을 멈추자 테라스엔 침묵이 흘렀다. 스테파니와 마샤는 말없이 찻잔 손잡이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알고는 있을까? 내가 사라졌다는 거?”

“마님…….”

“하긴. 알아도 문제고, 몰라도 문제겠네.”

캐롤라인은 힘없이 웃으며 차를 들이켰다.

‘오히려 혹 하나 뗐다고 좋아할지도.’

혀끝에 닿는 찻물이 유독 씁쓸했다.

* * *

에릭은 이제 막 병원에서 나오는 참이었다.

'이아네스의 집’이라는 간판을 단 3층짜리 건물은 대학 동기인 필립이 소아과 전문의로 근무하는 병원이었다. 필립은 에릭이 대학을 다니며 사귄 몇 안 되는 친구 중 한 명이기도 했다.

의과 대학을 다니는 대부분의 학생이 그렇듯, 필립 역시 돈 좀 있는 가문의 자제였다. 그는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고향으로 돌아가 아버지가 운영하는 병원에 성공적으로 취업했다.

“예나 지금이나…….”

…돈 많은 거 하나는 참 부럽군.

에릭은 뒷말을 목구멍으로 삼키며 빠르게 건물에서 멀어졌다. 일부러 뒤돌아보지 않았다.

에릭에겐 필립을 뛰어넘는 비상한 머리와 들끓는 학구열이 있었지만, 이를 받쳐 줄 만한 재력이 없었다. 장학금을 놓치지 않는다고 해도, 다른 전공보다 월등히 긴 과정을 공부해야 하는 의과 대학을 다니기엔 여유가 없었다.

자퇴 이후 몇 년을 방황하다가 정착한 곳이 헌티드 백작저였고, 뒤늦게 정신을 차려 보니 집사라는 직책까지 달고 있었다.

철부지 어린 시절엔 가난뱅이라는 사실이 못내 서러웠고, 의과 대학에 입학했을 땐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행복했다. 그리고 제 손으로 자퇴서를 냈을 땐 인생의 밑바닥과 같은 깊은 나락을 맛봤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 유명한 헌티드 백작 몰래, 그의 안주인과 도망을 치고 있다니.

“인생 참 웃기지.”

에릭은 파들파들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던 그때의 캐롤라인을 떠올렸다. 목소리는 가냘팠지만 보랏빛 눈동자만은 또렷하게 빛나고 있었다.

‘날 따라와 줘. 그럼 내 유산의 3할을 줄게.’

평생을 가난하게 자란 그에게 돈을 준다는 것만큼 매력적인 제안은 없었다.

겨우 유산의 3할이라곤 하지만, 그녀는 헌티드 가문의 안주인이었다. 그녀 몫으로 되어 있는 재산은 평범한 귀족의 것에 비할 수 없을 정도로 어마어마할 터였다.

어차피 그에겐 집사장이 되고자 하는 욕심도, 헌티드 백작가에 평생을 바칠 충성심도 없었다. 그렇다면 돈을 따라 움직이는 게 정답이었다.

“신문이요! 신문사세요!”

광장 중앙 쪽으로 나오자 뉴스보이 캡을 눌러쓴 채 신문을 파는 남자아이가 보였다.

옷을 몇 번이나 기워 입은 건지, 바지 밑단엔 색이 전혀 다른 천이 이어 붙어 있었다. 그 밑으로 살짝 드러난 발목이 앙상했다.

에릭은 긴 다리로 휘적휘적 걸어 아이에게 다가갔다.

“한 부 주겠니?”

“네! 3파드예요!”

에릭은 지갑에서 5파드짜리 동전을 꺼내 아이에게 건넸다.

“잔돈은 너 가지렴.”

“우와, 감사합니다!”

“천만에.”

에릭은 아이의 어깨를 무겁지 않게 두드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곤 신문 1면을 대충 눈으로 훑었다.

“허…….”

큼지막한 글자를 보던 에릭의 동공이 단숨에 확장되었다. 그는 숙소 쪽으로 향하던 걸음을 옮겨 시계탑 아래의 벤치에 앉았다. 그리곤 조급한 손길로 신문을 펼쳐 들었다.

「오페라의 여왕 안젤라 골드, 글랜포드 5개 지역 공연 확정!」

캐롤라인이 듣는다면 기함할 소식이 신문 1면에 찍혀 있었다.

에릭은 서둘러 호텔로 돌아갔다. 지금은 벤치에서 신문이나 읽을 때가 아니었다.

급한 마음에 벌컥 문을 열고 들어가니 테라스에 앉아 하녀들과 담소를 나누고 있는 캐롤라인이 보였다.

잠깐 나갔다 온 사이에 사람 하나가 늘어 있었다. 에릭은 그제야 제가 마샤를 맞이할 준비를 하기 위해 밖에 나갔다 왔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어머, 에릭?”

가장 먼저 에릭을 발견한 건 마샤였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우두커니 서 있는 에릭에게로 다가갔다.

“에릭, 이게 대체 얼마 만이에요!”

“아, 예. 오랜만에 뵙는군요.”

“반응이 그게 뭐예요? 섭섭하게.”

마샤가 입을 뚱하게 내밀곤 장난스럽게 말했다. 평소의 그였다면 적당히 그녀의 장단에 맞춰 줬겠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었다.

에릭은 제 앞에 있는 마샤를 뒤로하고 캐롤라인이 있는 테라스로 향했다. 그리곤 그녀에게 조금 전에 산 신문을 내밀었다.

“마님, 이거 보십시오.”

“응? 이게 뭔데…….”

에릭에게서 신문을 받아 들던 캐롤라인의 얼굴이 순식간에 새하얗게 질렸다. 그녀는 제가 본 게 헛것이라도 되는 것처럼, 수차례 눈을 깜빡였다.

“마님, 왜 그러세요?”

옆에서 신문을 기웃거리며 스테파니 역시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오페라 전국 공연이라고?”

“네.”

“…하필 지금?”

캐롤라인은 주먹을 말아쥐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 탓에 뒤로 넘어간 의자가 바닥에 부딪혔다. 요란한 소음이 들렸다.

“하, 하…….”

흥분한 탓에 캐롤라인의 호흡이 거칠어졌다. 그녀는 마른 손으로 제 가슴께를 부여잡았다.

“마님, 심호흡하세요. 심호흡!”

스테파니가 다급히 그녀의 어깨를 붙들었다.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마샤 역시 다급히 테라스로 돌아왔다.

“천천히 들이쉬고, 내쉬고……. 잘하고 계세요.”

스테파니가 캐롤라인의 호흡을 유도했다. 그녀가 세는 박자에 맞춰 캐롤라인의 가슴팍이 크게 부풀었다 가라앉았다.

그렇게 몇 번을 더 반복한 끝에 캐롤라인은 간신히 원래의 호흡을 되찾을 수 있었다.

“마님, 침실로 가시겠어요?”

“아니, 괜찮아.”

캐롤라인은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신문 1면에 인쇄된 기사를 들여다보았다.

오페라의 여왕이라는 글씨 아래 화려한 화장을 한 안젤라 골드의 사진이 크게 걸려 있었다.

이 세상에서 골드라는 이름이 가장 잘 어울리는 여자.

태양보다 눈부신 금발과 황금을 녹여 놓은 듯한 눈동자는 흑백 사진 속에서도 색깔을 입은 것처럼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만큼 아름다운 여자였다.

“역시 알아채신 거겠죠?”

“……알아채도 이런 식으로 나올 줄은 몰랐지.”

캐롤라인이 나직하게 한숨을 뱉으며 말했다.

“저, 마님,”

“응?”

“저희는 밖에 나가 있을게요. 혹시라도 불편한 게 있으면 바로 불러 주세요.”

“……그래. 고마워.”

눈치 빠른 마샤가 스테파니와 에릭을 데리고 테라스를 빠져나갔다.

심약한 캐롤라인을 혼자 두는 게 조금 걱정되긴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지금의 캐롤라인에겐 혼자만의 시간이 절실해 보였으므로.

“설마 했는데, 이렇게 대대적으로 나올 줄이야…….”

세 사람이 나가는 것을 확인한 캐롤라인은 의자 위에 그대로 몸을 늘어뜨렸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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