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휴고는 덜 마른 머리를 대충 털어내고는 호텔을 나섰다.
“어이, 휴고!”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호텔 입구에 있는 기둥에 몸을 기댄 채 서 있는 로겐이 보였다.
“…왜 그렇게 죽상을 짓고 계십니까?”
“……누구, 나?”
“네. 고리대금업자를 피해 도망치고 있는 빚쟁이 같으신데요.”
“……왜인지는 너도 곧 알게 될 거다.”
로겐은 그늘진 눈가를 문지르며 대답했다. 안 그래도 푹 꺼진 눈이 퀭해져 더욱 초췌해 보였다.
그는 휴고를 마차가 있는 곳으로 이끌었다.
“얼른 타라.”
“……타도 되는 겁니까?”
“그게 뭔 소리야?”
휴고가 로겐과 마차를 번갈아 보며 말했다.
“아무래도 이거, 지옥행 급행 마차 같은데요.”
“……큼,”
쓸데없이 예리한 지적에 로겐은 파드득 몸을 떨며 난리를 쳤다.
“지, 지옥은 무슨. 실없는 소리 하지 말고 얼른 타기나 해!”
그러곤 자신보다 한 뼘은 더 큰 휴고를 마차에 욱여넣었다.
그래. 엄밀히 말하자면 지옥은 아니었다. 다만 지옥의 수장보다 더 잔악한, 제 상사가 있는 곳으로 향하는 것뿐이었으니.
* * *
프레져는 에드먼드에게서 넘겨받은 서류를 읽는 중이었다. 캐롤라인과 함께 도망친, 그 에릭 포스터라는 놈의 신상이 적힌 서류였다.
“포스터 남작의 친인척이 아니라고?”
종이 가장자리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러자 에드먼드가 머리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네. 포스터 남작도 알지 못하는 자라고 하더군요. 조사해 보니 포스터 남작의 증조 대에서 갈라져 나온, 방계 중에서도 아주 먼 방계라고 합니다. 사실상 남이나 다름없지요.”
“다른 건?”
“수도에 있는 의과 대학을 다니다 중퇴했다고 합니다.”
예상 밖의 이력에 프레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생각보다 머리가 좋은 놈인 모양이었다.
“중퇴 이유는?”
“학비가 문제였던 듯합니다. 그 외는 이렇다 할 정보가 없어…….”
“이 정도면 됐어. 나가 봐.”
“네.”
프레져는 에릭 포스터의 의과 대학 입학 허가서를 뚫어질 기세로 쳐다보았다. 자퇴 직전 학기를 제외하고는 모두 수석 혹은 차석이었다.
“돈 때문에 자퇴라…….”
프레저는 턱을 괸 채 중얼거렸다. 산허리쯤에 걸쳐 있던 노을은 벌써 붉은 핏빛으로 침몰하고 있었다.
“각하, 로겐입니다.”
문밖에서 들려온 숨 가쁜 목소리에 프레져는 고개를 들었다. 그는 들어오라고 명령하는 대신, 문 앞까지 걸어가 직접 문을 열었다.
“……깜짝아.”
“…….”
“왜 갑자기 안 하던 짓을 하고 그러십니까?”
놀란 게 사실인 듯, 문고리를 잡으려던 휴고의 손이 공중에 우뚝 멈춰 있었다. 작게 구시렁거리는 휴고의 팔뚝을 로겐이 찰싹 소리가 나게 내려쳤다.
프레져는 입을 여는 대신 문에서 살짝 비켜섰다. 그러자 로겐과 휴고가 뒤늦게 집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마차에서부터 쉼 없이 종알거리던 로겐 덕분에 눈치채긴 했지만, 지독히도 낮게 가라앉은 프레져를 눈앞에서 보니 숨이 턱 막히는 것 같았다. 휴고는 애써 담담한 척, 어깨를 펴고 소파에 앉았다.
머지않아 하녀 두 명이 차를 내왔다.
프레져는 다기가 세팅되고 차가 우러나는 동안 단 한 번도 입을 열지 않았다. 오히려 여유롭게 향을 맡고, 찻물을 음미하기까지 했다.
“램필드 출장은 즐거웠나?”
프레져는 휴고와 로겐이 딱 죽어 나가기 직전이 돼서야 입을 열었다. 그마저도 일과 관련된 얘기라 휴고는 손바닥에 맺힌 땀을 티 나지 않게 닦아야 했다.
“네. 반응이 워낙 폭발적이었던지라, 보고만 있어도 웃음이 나더군요.”
“그렇다니 다행이군.”
“물론 즐거움보다는 힘든 게 더 컸지만요.”
“너도 그렇고 로겐도 그렇고, 둘 다 엄살이 심해.”
“하하.”
휴고는 어색하게 웃고는 다음에 나올 말을 기다렸다. 하지만 프레져는 얼굴에 미소를 띤 채 차만 마실 뿐이었다. 두 남자를 말려 죽이려는 속셈인 게 분명했다.
역시 그 마차를 타는 게 아니었다며 로겐을 원망하고 있을 즈음, 프레져가 봉투 하나를 꺼냈다. 두 사람은 테이블 위로 던져진 편지 봉투를 황망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이게 뭡니까?”
“읽어 봐.”
휴고의 물음에 프레져가 턱을 까딱이며 대답했다.
잠시 머뭇거리던 휴고는 로겐의 눈짓에 봉투에서 편지를 꺼냈다. 주인을 닮은 동글동글한 서체는 제법 눈에 익은 것이었다.
“마지막 줄 읽어 봐.”
“예? 예.”
빠르게 편지를 읽어 나가던 휴고의 눈이 편지에 적힌 마지막 문장으로 향했다.
“8월이 오기 전에 만나요, 내 사랑……?”
“다시.”
“……8월이 오기 전에 만나요, 내 사랑.”
프레져를 보며 사랑을 말하는 혀가 썼다. 캐롤라인이 쓴 걸 읽기만 하는 거라지만, 저 쌀쌀맞은 낯의 남자에겐 죽어도 사랑한다 말하고 싶지 않았다.
“오늘이 몇 월 며칠이지?”
“예? 8월… 아,”
아무 생각 없이 날짜를 말하려던 휴고의 입이 굳었다. 프레져가 그 모습을 보며 뒤틀린 미소를 지었다.
“그래. 내가 잘못 본 게 아니란 말이지.”
“…….”
“근데, 왜.”
글쎄요, 왜일까요? 라고 말하고 싶은 욕구가 로겐의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언젠 일과 사생활을 구분하라더니.
로겐은 죄 없는 직원 두 명을 앉혀 놓고 가정사를 읊으려는 프레져가 약간 괘씸하기도 했다. 하지만 모름지기 일류 일개미라면, 수그릴 때를 알아야 하는 법이었다.
그런 로겐의 속을 알 리 없는 휴고는 미간을 좁힌 채 살짝 목소리를 낮췄다.
“……마님께 무슨 일이 생긴 겁니까?”
“아니.”
“그럼…….”
“캐롤라인이 아니라, 나한테 무슨 일이 생긴 거지.”
“…….”
“그녀가 나를 속였잖아.”
프레져가 우아하게 찻잔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지극히 차분하고 귀족적인 몸짓이었다.
도망이라는 말에 눈이 커다래진 것은 휴고였다.
휴고는 로겐을 한 번 쳐다보다가, 편지에 적힌 문장을 읽다가, 다시 프레져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무슨 일이 난 줄은 알았는데, 도망이라니.
그런 일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 저지른 일이라 놀라웠고, 그걸 태연자약하게 말하는 제 상사 때문에 더욱 놀랐다.
“확실한 겁니까?”
휴고는 갈피를 잃고 헤매는 동공을 붙들며 입을 열었다.
“나한테 전한 날짜는 편지에 적힌 대로 7월. 사용인들에게 전한 날짜는 8월 중순.”
“…….”
“플라이크에 가 있기는커녕, 별장지기에게 보낸 우편은 쥐도 새도 모르게 빼돌렸고.”
“…….”
“들어온 지 겨우 2주 된 하녀 아이 하나와 스물여덟이나 먹은, 멀끔한 집사 하나를 데리고 떠났어.”
어떻게 생각해? 라고 덧붙여 묻는 프레져는 대답을 바라는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지 않았다.
본인은 억누르고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캐롤라인을 향한 분노, 증오, 원망, 우스움, 그 모든 감정이 한데 뒤섞여 흘러나오고 있었다. 휴고는 그 감정의 무게에 어깨가 짓눌리는 기분이었다.
“……마님은 그러실 분이 아니…….”
“그걸 네가 어떻게 알지?”
프레져의 지적에 휴고는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이 세상에 믿을 놈 하나 없다. 이것은 그가 프레져 밑에서 일하며 온몸으로 깨우친 사실이기도 했다.
“그래, 네 말대로 캐롤이 그럴 사람이 아니라고 치자.”
“…….”
“그렇게 순진한 얼굴을 하고서, 내 귀에 온갖 감언이설을 속삭이면서, 뒤에선 나 몰래 이렇게 일을 꾸미고 있었다고 치자.”
“…….”
“그게 더 괘씸하지, 나는.”
프레져가 찻잔을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담긴 찻물이 중심을 잃으며 잔을 범람했다. 프레져는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 올려 웃었다. 온몸에 소름이 돋을 만큼 서늘한 미소였다.
고요가 풍랑처럼 요동쳤다.
“……찾을까요?”
침묵을 깬 건 휴고의 조심스러운 목소리였다. 그의 말에 로겐도 가방에서 만년필과 수첩을 꺼냈다.
“글쎄, 어떻게 할까.”
프레져는 테이블 위로 넓게 퍼져 가는 찻물을 응시했다. 찻잔을 벗어난 찻물은 큰 원을 그리며 그 영역을 넓혀 가고 있었다. 물에 비친 제 얼굴이 꽤 봐 줄 만하게 일그러져 있어 다행이었다.
“저, 혹시 몰라서 로우밸리에 사람을 보냈었습니다만…….”
로겐의 목소리에 프레져와 휴고는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로겐은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미리 손을 써놓은 참이었다.
그는 수첩을 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웨즐 저택은 물론, 로우밸리 인근엔 아예 방문조차 하지 않으셨다고 합니다.”
로우밸리는 왕국 남부에 있는 작은 촌마을이자, 캐롤라인의 친정이 있는 곳이기도 했다.
“우편 소인이 찍힌 플라이크 우체국에도 사람을 보내 놓았고, 에릭 포스터의 본가도 찾아내는 데 성공했습니다. 무언가 발견하면 바로 연락을 취해 올 겁니다.”
“……시키지도 않은 일을 하다니. 칭찬을 해야 할지, 욕을 해 줘야 할지 모르겠군.”
“뭐가 됐든 긍정적인 의미로 받아들이겠습니다.”
로겐의 가벼운 농담에 프레져가 픽 실소를 흘렸다. 얍삽한 게 꼴 보기는 싫어도, 나름 쓸 만한 구석이 있는 녀석이었다.
“그래, 그럼 로겐 넌 나가서 일 봐.”
“……예? 또요?”
“램필드 공연이 끝났으니, 이제 다른 일 해야지.”
“지금 저녁 8시인데…….”
“대신 돈 더 주잖아.”
“그렇긴 하죠…….”
로겐은 구시렁거리면서도 착실하게 제 가방을 챙겼다.
로겐이 나간 집무실엔 프레져와 휴고, 두 사람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휴고.”
프레져가 휴고를 진득하게 응시하다 입을 열었다.
“너에겐 시킬 일이 있다.”
“시키실 일이라면…….”
휴고는 프레져의 눈을 마주하며 마른침을 삼켰다. 이 상황에서 그가 예측할 수 있는 것은 한 가지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