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프레져가 가장 먼저 찾은 사람은 저택의 하녀장, 조앤이었다. 그는 하인을 시켜 조앤을 제 방으로 호출했다.
갑작스러운 주인의 호출에 당황한 조앤은 표정을 갈무리하며 그의 방으로 들어섰다. 분위기가 평소 같지 않았다.
“부르셨습니….”
“캐롤라인이 돌아오기로 한 날이 언제지?”
“네? 아, 8월 15일이지요.”
불쑥 말을 끊는 행위에 당황할 법도 하건만, 조앤은 기분 나쁜 기색 없이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뭐라고?”
당황한 표정을 지은 건 오히려 프레져 쪽이었다.
“다시 말해.”
“8월 15일입니다만, 그건 갑자기 왜… 어머, 각하?”
프레져는 조앤의 말을 제대로 듣지도 않고서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문을 박차고 나서는 모습이 제법 성급해 보였다.
프레져는 지친 몸을 이끌고 침실로 향했다. 하루 종일 저택의 사용인들에게 캐롤라인이 돌아올 날을 캐묻고 다녔지만 그가 원했던 대답은 들을 수 없었다.
8월 15일. 저택의 모든 사용인들은 짜 맞추기라도 한 듯, 하나같이 입을 모아 같은 날짜를 말했다. 오히려 이상한 사람 취급을 당하는 것은 프레져였다. 주인의 성격을 알기에 다들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프레져는 침대에 모로 누워 캐롤라인이 보낸 편지를 펼쳤다. 곧게 뻗은 잘생긴 눈썹이 서서히 구겨지기 시작했다.
“…날 속인 거야?”
대체 왜?
프레져는 천장을 보고 똑바로 누웠다. 그리고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세상 물정 모르는 그 어리숙한 여자가 이런 깜찍한 일을 꾸몄을 리가 없었다. 중간에 무언가 착오가 생긴 게 분명했다.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
생각이 거기까지 이르자 프레져는 침대에서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러곤 설렁줄을 당겼다.
“플라이크로 사람을 보내. 지금 당장.”
* * *
플라이크로 보냈던 하인은 나흘 만에 수도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프레져에게 믿을 수 없는 소식을 전했다.
‘플라이크의 별장엔 아무도 없었습니다.’
심지어 별장의 사용인들은 캐롤라인의 방문 소식조차 모르고 있었다고 했다.
그녀가 떠나기 전, 프레져는 분명 플라이크 별장에 우편을 붙였었다. 며칠 후 캐롤라인이 도착할 테니 알아서들 준비해 놓으라고. 그러나 별장지기는 그런 우편은 받은 적도 없다는 식으로 말을 전했다.
사용인이 플라이크에 가 있던 나흘 동안 프레져는 더욱 충격적인 사실을 마주해야 했다.
“캐롤라인과 동행한 하녀를 모른다고?”
“알긴 하는데… 그 아이가 들어온 지 한 달도 안 된 아이라…….”
일을 시작한 지 겨우 2주밖에 안 된, 이제 갓 성인이 된 여자아이 하나.
스테파니라는 이름과 나이 외에는 아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럼 내 아내는, 이제 막 성인이 된 신참 하녀와 단둘이 여행을 떠났다는 소린가? 누가 봐도 수상한, 이 말도 안 되는 조합으로?”
프레져가 으르렁거리며 말했다. 그 기세가 누구 하나의 목을 뜯어 놓을 기세라 누구도 선뜻 나서지 못했다.
침묵 속에서 용기 있게 입을 연 사람은 집사장 에드먼드였다.
“……저택의 마부 하나와 별채의 집사 에릭도 함께 데리고 가셨습니다.”
“에릭?”
꽤나 익숙한 이름에 프레져는 인상을 찌푸렸다. 에릭이라는 남자의 얼굴을 떠올리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남자의 흐릿한 형체만 그려질 뿐, 뚜렷한 윤곽이 기억나지 않았다.
드넓은 백작저엔 집사만 여섯이었다. 저택의 모든 사용인들을 총괄하는 집사장 에드먼드 밑으로 본채와 별채를 담당하는 집사, 프레져와 캐롤라인의 전담 집사가 나뉘어 있었다.
게다가 프레져는 별채를 자주 찾지도 않았다. 그러니 그가 에릭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몰려드는 두통에 프레져는 낮은 침음을 흘렸다.
“그럼 내 아내가 호위도 없이 마부, 집사, 말단 하녀 하나와 여행 갈 채비를 하는 걸 다들 보고만 있었다는 뜻이군.”
“그게……. 마님께서 최소한의 인원만 꾸리고 싶다 하시어…….”
캐롤라인의 전담 하녀였던 마샤가 떠난 이후, 빈자리를 꿰차게 된 델이 웅얼거리며 대꾸했다. 그런 델의 옆구리를 조앤이 팔꿈치로 찔렀다. 눈치껏 입 다물고 있으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델의 말이 이미 화가 오를 대로 오른 프레져의 심기를 건드리고 만 것이었다.
“너는 지금, 그딴 게 변명이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나?”
“……죄송합니다.”
“내 아내의 전담 하녀인 주제에 주인이 어디를, 누구와 갔는지도 모르고. 일 한번 참 똑부러지게 잘하는군.”
델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입술을 꽉 깨물었다.
안 그래도 전담 하녀인 저를 두고 굴러 들어온 스테파니라는 아이를 데려간 게 마음에 들지 않던 터였다. 속으로만 삭이고 있던 서러움이 그만, 주제를 모르고 입 밖으로 나온 모양이었다.
“마님께서는 이동하는 데 불편하지 않도록, 적은 인원으로만 짐을 꾸리라 하셨습니다. 플라이크의 별장에도 사용인들은 있으니 괜찮다고 말씀하셨고요.”
조앤은 델의 앞을 슬쩍 막아서며 말했다. 그 모습을 보니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왔다.
남편을 속이고 도망친 아내와 그 사실을 조금도 눈치채지 못한 사용인들이라니.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프레져는 언성을 높이는 데 에너지를 소비하는 대신, 좀 더 합리적인 방법을 선택하기로 했다.
“알아서 입단속들 잘해. 괜히 말 새어 나가게 하지 말고.”
“네.”
프레져는 꾸벅 고개를 숙이는 세 명의 사용인들을 내버려 둔 채 집무실로 걸음을 옮겼다.
집무실 안에서 잔업을 처리 중이던 로겐은 프레져를 보곤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됐으니까 하던 일이나 마저 해.”
“하지만…….”
“보좌관은 그러라고 있는 자리야.”
프레져의 단호한 목소리에 로겐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다시 자리에 앉았다.
사실 로겐은 알고 있었다. 프레져가 저런 태도를 보일 때는 무슨 말을 해도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후…….”
거친 손길로 넥타이와 커프스를 풀어낸 프레져는 책상 앞에 앉아 가만히 심호흡을 했다. 그러곤 옆으로 치워 둔 서류들을 꺼내 업무를 보기 시작했다.
그 장면을 지켜보던 로겐은 질린다는 표정을 지었다. 제아무리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이라지만, 이런 상황에서까지 일을 하려 들 줄은 몰랐다.
“일…하시게요?”
“그럼, 내가 일 말고 해야 할 게 따로 있나?”
“…….”
“일은 일이고, 사생활은 사생활이지. 내 집안에서 일어난 문제는 내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 넌 신경 끄고 네 할 일 해.”
“예…….”
프레져는 로겐의 시선을 무시한 채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낯으로 서류를 보기 시작했다. 로겐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서는 제가 보고 있던 서류로 시선을 돌렸다.
프레져는 서류 위에 서명을 하고, 달력을 보며 스케줄을 조정했다. 중간중간 책장으로 걸어가 참고 자료를 가져오기도 했다.
겉으로 보이는 그의 모습은 평소와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러나 그의 정신은 온통 다른 곳에 팔려 있었다. 일에 집중하려고 해도 도저히 집중할 수가 없었다.
이게 다 캐롤라인, 빌어먹을 제 아내 때문이었다.
프레져는 한참 동안 펜 뚜껑을 만지작거리다가 서랍 맨 아래 칸에서 종이 뭉텅이를 꺼냈다. 사용인 계약서를 모아 둔 것이었다.
빠르게 계약서를 넘기는 그의 눈은 에릭과 스테파니라는 이름을 찾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머지않아 그는 저택의 집사들만을 따로 분류해 놓은 카테고리에서 에릭이라는 이름을 찾아냈다.
「에릭 포스터」
나이는 스물여덟. 경력 5년 차의 별채 담당 집사. 2년 동안 하인으로 일하다 그 유능함이 눈에 띄어 집사로 차출된 예의 바른 인재.
프레져의 시선이 서류 좌측에 있는 에릭의 증명사진에 머물렀다. 흑백 사진이었지만 생김새를 확인하는 데 어려움이 있지는 않았다.
‘이렇게 보니 생각날 것도 같군.’
이마와 콧대가 반듯한, 전체적으로 깔끔한 인상을 풍기는 남자였다. 별채에 갔을 때 몇 번 마주쳤던 기억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포스터 가문이면 딜런 포스터 남작의 먼 친척쯤 되겠군.’
프레져는 긴 콧수염을 둥그렇게 말고 다니는 포스터 남작의 얼굴을 떠올렸다. 사진 속의 남자는 포스터 남작과는 닮은 구석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종이를 쥔 프레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이 세상에 남자라곤 자신밖에 없는 것처럼 굴더니. 이렇게 생긴 남자가 취향이었나.
프레져는 입꼬리를 삐뚜름하게 끌어 올리며 하녀들의 계약서를 모아 둔 종이 꾸러미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스테파니 아든이라는 이름을 찾아냈다.
스테파니 아든의 계약서엔 사진이 붙어 있지 않았다. 별다른 이력이나 특이사항 역시 없었다.
‘아주 작정을 했군.’
다른 가문의 추천장을 들고 와도 채용되기 어려운 곳이 헌티드 백작저였다. 그런데 별다른 이력도, 추천장도 없는 열여덟짜리 애송이를 하녀로 채용했다.
사용인들을 관리하는 건 전적으로 안주인의 몫이다. 그리고 캐롤라인은 이 수상쩍은 하녀를 제 손으로 직접 뽑은 후 데리고 떠났다.
생각이 여기까지 이르고 나니 오히려 머리가 차분해지는 느낌이었다.
딱히 속이 뒤틀리진 않았다. 그저 우스웠다.
“로겐,”
“예?”
“휴고는 어디 있지?”
“지금쯤이면 아마…….”
로겐이 손목시계를 들여다봤다.
“호텔 오킥스에 있겠군요.”
휴고는 며칠 전, 프레져를 대신해 외국으로 출장을 다녀왔다. 지금쯤이면 아마 호텔 침대에 누워 느긋하게 휴식을 취하고 있을 터였다.
“데려와.”
“…네? 이렇게 갑자기요?”
갑작스러운 명령에 로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프레져의 입에서 나온 말은 휴고의 평화를 깨부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프레져가 의자에 느슨히 몸을 기대며 입을 열었다.
“시킬 일이 따로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