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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배의 꽃-94화 (완결) (93/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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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그녀가 자신의 어깨에 올려진 내 손을 부드럽게 잡았다. 마치 춤을 추는 것처럼 우아한 움직임으로 내 손을 가져가 손등에 입술을 눌렀다. 그냥 입술을 누른다고 생각한 순간 따끔해서 눈을 크게 떴다. 실리는 내 손등을 빨아들이고 있었다. 아주 세게. 남들이 보고 있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손등을 빨아들여 시퍼런 흔적을 남긴 실리가 부드럽게 웃었다.

“이 흔적이 완전히 사라지기 전에 돌아와 영광과 승리를 바치겠습니다.”

그리고 실리가 나에게서 등을 돌렸다. 그녀가 말에 훌쩍 올라타는 걸 본 순간 참을 수 없었다. 나는 달렸다. 누군가가 “전하!”라고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멈출 수 없었다. 광기, 혹은 바람. 그 어느 것인가가 나를 밀고 있었다. 아무것도 나를 막지 못할 것이다. 불이 타오르든, 물이 차오르든, 화살비가 쏟아지든 지금의 나를 막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사람들이 나를 불러 말을 탄 그녀가 뒤를 돌아보았다. 실리의 눈이 크게 열리는 걸 보면서 나는 그녀를 붙잡아 당겼다. 그녀가 순순히 나의 힘에 끌려 허리를 숙였다. 실리의 입술과 내 입술이 닿는 순간 그대로 그녀를 잡아먹었다. 그녀의 숨을 모조리 빼앗았다. 그러자 살 것 같았다.

그녀의 혀가 달았다. 그녀의 침을 모조리 빨아 마셨다. 아, 나는 너를 사랑하지. 너에게 모든 걸 주고 싶을 정도로. 그런데 나는 한편으로는 너에게서 모든 걸 갈취하고 싶지. 그렇게 너를 홀로 만들고 나 혼자 끌어안고 싶지. 나는 이렇게 양면적으로, 너를 사랑하지. 그래서 이 불안은 영원히 내 것이고.

하지만 이 불안이 너를 사랑하는 나의 증거라면 영원히 내가 끌어안을게. 이 불안과 전우가 될게.

실리가 작게 신음하는 것이 내 귀에만 들렸다. 그녀는 갑옷을 입은 채로 신음했다. 갑옷을 입어도 건틀릿을 껴도 그녀는 나의 여자였다. 나의 여자인 그녀는 기사였다. 기사면서 여자였고 나의 여자면서 실리는 모두의 영웅이었다. 이제 알 수 있었다. 마음으로, 알 수 있었다.

몸이 미친 듯이 달아올랐다. 너를 가졌어야 했는데! 밤새도록 너와 하나가 되었어야 했는데! 아쉬움에 미칠 것 같았다. 그녀를 못 본다는 게 아쉬웠다. 키스를 끝내는 건 죽기보다 어려웠다. 그녀를 겨우 놔주고 이마와 이마를 맞댄 채 속삭였다.

“돌아오면 아이를 가지자.”

“명령이십니까?”

실리가 웃어서 나도 웃었다.

“아니, 애원이야.”

실리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나는 이번엔 불안하지 않았다.

그녀가 떠나는 걸 보면서 내내 불안과 손을 붙잡고 있었다. 그래도 괜찮았다. 그녀의 온기는 내 입술에 남아 있었고 그녀가 남긴 흔적은 내 손등 위에서 욱신거리고 있었기에.

Epilogue

실리가 돌아왔다.

1년 만이었다. 내란은 생각보다 심각했다. 어쩌면 실리는 중간에 한두 번 돌아올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러지 않았다. 실리는 길드의 비리를 ‘완전히 뿌리 뽑겠다’고 공언했고, 자신의 말을 지켰다. 그녀는 어느 길드에게도 자비를 베풀지 않았다. 범죄에 연루된 길드는 철저히 파고들었다. 전쟁은 범죄 수사로 이어졌다. 땅 위로 나온 건 새싹처럼 보였는데 그 밑에 있는 건 거대한 뿌리였다. 그 뿌리를 그녀는 완전히 들어냈다.

주요 길드를 잃은 도시들이 반발하기도 했고 보호를 요청하기도 했다. 실리는 몇 번이나 편지로 체계를 바꿔야 한다고 주장했다. 군사와 치안이 좀 더 유기적으로 연결되어야 하며, 중앙에서 각 영지의 치안이 관리되어야만 이런 일을 피할 수 있다고 강경하게 발언했다. 격렬한 영주들의 반발 때문에 실리의 주장은 아마 당장은 이루어지기 어려울 것 같았다. 그리고 학자들 역시 실리의 주장에 고개를 저었다. 중앙 집권적 형태는 왕의 재량에 너무 많은 것이 좌우되는 문제가 있다는 것이었다. 한 번 고치면 다시는 고칠 수 없기에 충분히 고민해야 한다는 학자들의 의견에 손을 들어 줄 수밖에 없었다. 실리도 그 의견을 듣고 나서는 한발 물러났다.

하지만 학자들이 탁자 위에서 말하는 것과 실리가 보내오는 지방의 참혹함을 정리한 보고서를 보는 건 다른 문제였다. 20년 뒤, 30년 뒤를 생각해야 한다는 학자들과 당장 이 사람들을 구해야 한다는 실리의 말 중 어느 것을 더 중요히 여겨야 하는가. 이 사람들은 당장 구할 수 있지만 20년 뒤는 어차피 내가 지금 무슨 결정을 내리든 결과를 보장할 수 없다. 그럼에도 20년 뒤를 바라봐야 하는가. 왕의 자리는 때로 고독했다.

그래도 실리는 언제나 나의 편이었다. 그녀는 늘 그렇듯 내게 긴 편지를 보내지는 않았다. 애초에 그런 성격이 아니었다. 하지만.

길거리에서 보았습니다. 예뻐서 보내 봅니다.

실리는 가끔씩 이상한 물건들을 선물로 보내왔다. 장신구라든가, 아이들의 장난감, 혹은 어떤 꽃을 말린 것. 그런 것들을 그녀는 긴 편지 대신 보냈다. 그것이 실리의 마음이었고, 나는 그런 것들을 내 서재 서랍에 잘 넣어 두었다. 마음이 외로울 때 그것들을 꺼내어 하나하나 만지면서 그녀를 생각했다. 이걸 고르고 있었을 실리를 상상하면 모든 게 다 조금쯤은 괜찮아졌다.

실리는 모든 걸 해결하고 1년 만에 돌아왔고, 돌아오자마자 사흘을 내리 잤다. 과거와 마찬가지로 그녀는 가장 말을 잘 다루는 몇몇의 부하와 함께 밤낮을 가리지 않고 옌선으로 먼저 돌아왔다. 그 탓에 부하들은 탈진했고, 그녀의 말 산드라도 제 주인처럼 사흘간 퍼져 버렸다. 용의 피를 받은 명마가 죽을까 봐 마구간지기들은 사흘간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며 산드라의 곁을 지켰고, 나 또한 시간이 날 때마다 실리의 방을 들락거렸다. 그녀가 여기에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그녀는 작은 소리를 내며 잤다. 후우, 후우. 아주 힘들었던 듯 앓는 것처럼 자서 나는 그녀의 베개도 바꿔 보고 이불도 바꿔 줘 봤으나 소용이 없었다. 시녀들은 그녀를 가만히 두라고 말했다. 실리는 지금 휴식, 정확히는 잠이 필요하다고. 그래도 일어나서 가끔 물은 마시고 식사도 하는 모양이었다. 그거면 됐지. 사흘간 자는 얼굴밖에 보지 못했으나 그래도 행복했다.

사흘 뒤 깨어난 실리는 왕비다운 완벽한 드레스 차림으로 나를 맞았다.

“전하를 뵙습니다.”

드레스 차림을 한 실리는 이제 더 이상 황금 조롱 안의 야생 독수리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편안해 보였다. 물론 그녀가 자주 입는 흰 셔츠와 검은 가죽 바지가 더 편안하기야 하겠지만 지금 이 모습도 불편해 보이지 않았다. 내가 “예뻐.”라고 별생각 없이 중얼거리자 실리가 웃었다.

그녀는 손을 뻗어 내 손을 잡았다. 그리고 내 손등을 보더니 눈을 크게 떴다.

“아직 남아 있었습니까.”

그녀가 남긴 흔적이 내 손등에서 없어지려고 할 때마다 나는 스스로 그 흔적을 만들었다. 실리는 흔적이 사라지기 전에 돌아온다고 했다. 그녀가 약속을 지킬 수 없다면 내가 지키게 하면 그만이었다. 내가 웃자 실리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따라 웃었다. 그녀는 내 허리를 안으려 품에 답삭 파고들었다.

“검을 들고 드레스를 입고 사람을 구하고 사랑을 주고받는 이런 삶….”

실리는 속삭이듯 말하다 말고 잠시 스스로의 입술을 핥았다. 난처한 듯, 말을 잇지 못했다. 뭐라고 말을 이어야 할지 잘 모르는 얼굴이었다. 고맙다고 하고 싶은 것 같기도 했지만 그녀는 뭔가 말문이 막힌 것 같았다. 나는 그녀가 삶을 선택하지 못했다는 걸 안다. 많은 사람들이 그녀에게 엄청나게 많은 짐을 억지로 실었다는 걸 안다. 그녀는 태어난 순간부터 ‘감히’ 자신이 원하는 건 상상할 수 없는 삶을 지속해 왔다.

하지만 나는 그녀에게 고맙다는 말은 듣고 싶지 않았다. 우리는 고맙다는 말을 너무 많이 했고, 그 말은 사랑하는 사이에는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보다는 더 열정적인 말, 더 음란한 말, 더 직설적인 말을 듣고 싶었다. 내가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고 고개를 숙여 키스하려는데 그녀가 머리를 조금 뒤로 뺐다. 키스를 거절당한 걸까, 마음이 철렁하던 때 그녀가 내 입술을 핥았다.

“아이를 가지기 좋은 인생이네요.”

내가 눈을 휘둥그레 뜨자 실리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가 이렇게 크게 웃는 건 처음 봐서 놀랐는데 그녀는 상관없다는 듯 더 크게 웃었다. 마법에서 풀린 사람처럼 경쾌하게 웃는 그녀의 웃음소리가 창밖으로 흘러 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세상의 축복처럼.

***

“아라야. 그리로 달리지 마.”

세 살이 된 아라는 아장아장 잘도 뛰어다녔다.

나는 아라가 걱정이 되는데 실리는 늘 웃기만 했다. 그녀는 아라가 넘어져 으앙, 하고 울어도 저벅저벅 걸어가서 아이를 안아 올려 토닥이기만 했다. 아라가 아무리 울어도 딱히 달래 주거나 하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아라는 제 엄마를 좋아했다. 너무나 좋아해서 언제나 같이 있고 싶어 했다. 내가 곤란할 정도로.

“마마, 마마.”

아라가 꽃밭에서 실리를 불렀다. 꽃에 파묻힌 아라는 잘 보이지도 않았지만 실리는 금세 아이를 찾아내 안아 올렸다. 아이는 실리의 목덜미에 뽀얀 뺨을 비비며 즐거워했다.

아이는 실리와 늘 함께 있었다. 실리는 귀족들의 방식을 하나도 따르지 않았다. 그녀는 아이를 곁에 두고 직접 키웠다. 전장에 나갈 때는 한 번은 데리고 나가고 한 번은 두고 나갔다. 아라는 엄마와 떨어지는 것도 아빠와 떨어지는 것도 익숙해졌다.

“아라를 뛰게 하지 마.”

내 말에 실리가 아라를 안고 다가왔다. 그녀는 오늘 하얀 셔츠에 검은 가죽 바지 차림이었다. 목에는 여전히 어머니의 유품인 목걸이. 바람에 나부끼는 붉은 머리카락.

“저는 아라가 자기 하고 싶은 건 다 했으면 좋겠어요.”

실리가 말했다. 언젠가부터 그녀의 말버릇이었다. 실리는 아라에게 아무것도 시키지 않았다. 아라가 하고 싶은 대로 둘 생각인 듯했다. 유모들은 세 살인 아라에게 이런저런 것들을 시켜야 한다며 말들이 많았지만 실리는 생각이 없었다. 아이를 더 낳을 생각도 없어 보였다. 실리는 그저 아라가 귀여워서, 너무 귀여워서 어쩔 줄 몰라 했다.

“저는 전하를 만나서 이룰 수 있었던 삶이었지만 아라는 처음부터 그 삶을 제대로 걸었으면 해요.”

실리의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내가 이룬 것들을 생각한다.

왕위를 되찾은 것, 살아남은 것, 그러나 그중에서 내가 가장 자랑스러운 것은 실리에 대한 것이었다. 그녀를 만난 것. 그녀에게 구해진 것. 그녀를 구한 것. 그리고 아라.

나의 가장 빛나는 두 사람이 반짝반짝 햇살 아래에서 웃고 있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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