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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처럼 헤실거리며 폴이 말하자 누군가가 “히옌, 그만두게!”라고 그를 황급히 만류하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폴은 멈추지 않았다.
“전하. 길드 따위보다 훨씬 인망이 높으며 백성들이 잘 따르고 전투 경험도 풍부한 이가 한 명 이 궁에 존재합니다.”
또르르.
내 가슴에 어딘가에서 돌이 굴어 들어온다. 또르르, 또르르. 이 돌 굴러오는 소리가 어느 순간 우르릉하는 소리로 변해 갔다. 지진이 난 것처럼 엄청난 소리가 난다. 내 가슴속이 부서지는 소리라는 걸 알았다.
사막에서 굴러온 모래 알갱이가 아니라 내 가슴이 폐허가 되어 생긴 모래 알갱이였구나.
내가 폴을 노려보아도 그는 태연했다. 그는 내 사나운 시선에 우아한 궁중 절로 화답하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왕비 전하를 추천합니다.”
“히옌!”
모두가 그에게 고함을 쳤지만 폴은 멈추지 않았다. 그는 불손한 눈으로 나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의 눈이 묻고 있었다. ‘좋아? 그 빛나던 사람을 그렇게 묶어 놓으니까 좋든?’ 그제야 나는 내 죄책감, 내 걱정, 내 위화감의 정체와 마주했다. 이게 문제였다.
실리는 나의 검이 되겠다고 했었다.
그런데 나는 그녀를 내 왕비로 만들었다. 그건 그녀에게 정당한 일이었던가?
폴은 소피아의 아들이었다. 그는 평생 어머니가 검으로서 살아온 모습을 본 사람이었다. 폴은 어머니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에 진저리를 쳤지만 그녀의 능력을 의심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리고 폴은 지금 내가 실리를 주저앉힌 것을 노골적으로 비난하고 있었다.
폴이 회의실의 모두를 쳐다보았다. 그의 눈이 기세등등하게 묻고 있었다. 진짜 적임자가 누군지 몰라서 아무도 말을 못 했어? 그의 눈이 그렇게 묻자 사람들이 시선을 슬슬 피하기 시작했다. 그제야 알 것 같았다.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 이 회의실에 들어와서 보고를 듣는 그 순간부터 이들은 모두 누가 적임자인지 누가 거기를 가야 하는지 알았다.
하지만 그들은 말할 수 없었다. 그녀가 없을 때 무너지는 나를 보았으니까.
“좋은 왕이 되어 주세요.”
실리는 그렇게 말했던가.
좋은 왕. 실리. 나의 검이 되겠다던 그녀. 그리고 지금의 나.
그녀가 죽으면 어떡하지.
다치면 어떡하지.
사라지면.
그녀가 잘못되면.
수많은 걱정들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머리가 아팠다. 심장이 지끈거렸다. 손이 저렸다. 뭔가가 잘못될 것만 같은 걱정과 그녀를 잃을 것 같은 공포가 나를 뒤흔들었다. 나는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갈기갈기 찢기고 있었다. 표정을 숨길 수가 없었다. 너무 무섭고 싫었다. 실리를 내 검으로 쓴다고? 아니, 나는 그녀를 내 왕비로 삼고 싶지도 않았다. 그녀를 다만 어딘가에 숨겨 놓고 싶었다. 그냥 실리와 어딘가에 처박혀서 영원히 단둘이 있고 싶었다. 그녀가 내 것이 아닐까 봐 무서웠고 누군가가 훔쳐 갈까 두려웠다.
폴이 있는 쪽을 쳐다보자 할 말 있으면 해 보라는 듯한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너는 모른다. 사랑을 해 보지 않은 너는 몰라. 나는 피식 웃었다. 내 웃음에 폴이 의외였는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그런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한순간에 시선을 거두었다. 너는 알 수 없다.
“세실리아 사리안을 불러라.”
내가 이 말 한마디를 하기 위해 속으로 얼마나 많은 고통을 참는지 너는 모른다. 하지만 알지 못해도 상관없다.
네가 알아 달라고 하는 짓이 아니니까.
실리, 너는 나의 검이 되겠다고 했다. 그리고 나는 네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들어주겠다고 했다. 그래, 약속을 지킬 시간이다.
실리가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화려한 드레스, 길고 느슨하게 땋아 내린 풍성한 머리카락, 그 머리카락을 장식하고 있는 생화와 보석들, 흰 피부를 가리고 있는 레이스와 장신구들. 그녀는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그래, 그런데 나의 실리 같진 않았다. 이렇게 아름다운 그녀도 좋았다. 하지만 하얀 셔츠에 검은 바지, 검을 다루고 있는 모습이 가장 그녀다웠다. 무시무시한 갑옷을 착용하고 철거덕거리는 소리를 내며 움직이는 그녀가 더 자연스러웠다. 지금 실리의 모습은 금과 보석으로 치장된 조롱 안에 있는 야생의 독수리를 보는 기분이 들었다. 내가 그녀를 저렇게 만든 것인가 생각하니 씁쓸해졌다.
나는 그녀에게 분명히 모든 걸 이루게 해 주겠노라 약속했는데.
“세실리아 사리안.”
내 부름에 그녀가 의아한 듯 눈을 조금 크게 떠 보였다. 그녀는 눈동자를 흘끗 움직였다. 나와 신하들을 다 바라보고 나서 다시 내게로 시선을 움직인 그녀가 나를 살폈다. 내가 괜찮은지 내 기분은 어떤지 확인하는 눈길이 섬세하게 느껴졌다.
네가 사랑한다고 말하기 전에도 나는 알고 있었어, 실리.
이 눈길에서, 이 행동에서. 네가 나를 사랑하는 게 느껴졌거든. 그런데도 나는 늘 불안했어. 네가 나를 사랑하지 않을까 봐. 그리고 지금도 불안해. 조롱의 문을 열면 야생을 찾아 독수리가 떠날까 봐. 독수리에게 이 왕궁은 그저 답답한 새장일 뿐일 테니.
밖에 나간 너는 눈부셨지. 너는 사람을 구하고 싶다고 했고 영웅이 되고 싶었노라고 속삭였지. 너는 조금 얼굴을 붉혔어. 그렇지만 나는 너의 그 수줍은 태도를 웃으며 받아 줄 수가 없었어. 왜냐면 너는 이미 영웅이 되어 있었거든. 나 따위는 필요도 없을 정도로 눈부신 영웅이, 고작 며칠 사이에 스스로의 힘으로 되어 버렸어. 너는 내 곁에 있을 자리를 찾았다고 말하지만 나는 네 곁에 있을 자리를 찾지 못했어.
그럼에도 실리.
내가 이러는 건 오로지 너를 사랑하기 때문이라는 걸, 네가 알까.
네가 아는 날이 올까.
“부름에 응하라, 기사 사리안.”
내 부름에 실리의 움직임이 변했다. 나붓하게 움직이던 그녀의 걸음걸이가 거짓말처럼 저벅저벅 움직이는 것으로 바뀌었다. 그녀는 드레스를 입은 채로도 마치 갑옷을 입은 것처럼 걸었다. 턱끝을 들고 걷는 그녀는 당당해서 오만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리고 그 모습은 진실로 실리다웠다.
실리가 내 앞에 무릎을 꿇었다. 기사로서 한쪽 무릎을 꿇은 그녀는 드레스 때문에 엄청나게 불편해 보였지만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녀는 내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눈을 내리깔았다. 실리의 낭랑하고 힘 있는 목소리가 회의실을 울렸다.
“세실리아 사리안이 전하의 부름에 응하여 당도했습니다.”
“반란이 일어났다. 그대에게 에스트날 공작의 작위를 내리고.”
어?
사람들이 모두 나를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실리는 하스트레드 작위를 빼앗겼고 현재 실질적으로는 평민의 신분에 속해 있었다. 그런 그녀에게 내가 공작의 작위를 내리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실리를 추천한 폴조차 지나치게 파격적인 내 행동에 눈을 부릅떴다. 그러나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조금 전까지 ‘네 여자라서 가둬 두고 싶어?’라고 눈으로 비난하던 그가 이번엔 ‘공작은 너무하다’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모두가 말은 못 한 채 속으로 우왕좌왕하는 게 보였지만 나도 그녀를 따라 턱끝을 들었다.
실리에게 검을 들게 하겠다고?
그렇다면 그녀는 정당하게 모든 것을 얻어야 한다. 내가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는 이상은.
후계자가 없어 황실에 귀속된 에스트날 공작의 작위는 모두가 노리고 있는 노른자위 중의 노른자위였다. 풍부한 영지, 광산,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건 에스트날이라는 이름이었다. 에스트날. 그것은 신성한 이름이다. 처음 그 이름을 받은 이는 신성력으로 이름을 떨쳤고, 그 후손들은 조상의 덕을 듬뿍 누렸다. 에스트날이라는 이름을 가진다면 아무도 그녀를 쉽게 단죄하지도 이용하지도 못한다. 에스트날은 신의 총애를 받는 이름이니까.
“내려진 군을 이끌고 반란을 속히 진압하라.”
반란을 진압하여 그 상으로 작위를 내리는 것도 아니고 작위부터 내리고 일을 시작하겠다는 내 말에 모두가 불만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심지어 공작이라니! 하지만 실리는 나를 물끄러미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녀의 금안은 그저 내가 괜찮은지만 살폈다. 이윽고 그녀가 고개를 숙였다.
“어명을 받들겠습니다.”
실리가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 목소리는 단호하고 묵직했다.
***
실리가 떠나는 날까지 나는 그녀를 안지 못했다. 키스도 점차 줄어들었다. 그녀의 몸에 손을 대는 것도 무서워졌다. 그녀가 떠날 것 같아서, 얼굴을 보는 게 힘들어졌다. 떠나지 않으리라는 걸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그런데 마음은 그렇지 않았다. 그녀에게 모든 걸 주리라고 생각했는데 왜인지 그녀가 모든 걸 가지면 날아올라 어딘가로 사라져 버릴 것 같은 기분만 들었다.
그녀가 군을 이끌고 옌선을 떠나는 날 아침에는 식사도 같이 하지 않았다. 그녀의 얼굴을 보기 힘들어서가 아니라 식사를 할 수가 없었다. 소화를 할 수가 없었다. 빅토리아 솔루조웨가 내 몸에 계속 치유술을 쏟아부으며 “사람은 식사를 해야 합니다, 전하.”라고 굳은 얼굴로 잔소리를 했다. 치유술만으로 사람은 살 수 없다며, 먹고 마셔야 한다고 그녀는 일침을 놓았다.
먹을 수가 없다.
마실 수도 없다.
무언가가 식도를 넘어가면 바로 토했다. 마지막일 것만 같아서, 버려질 것만 같아서 두려웠다. 실리는 내게 데리러 오라고 했었는데, 그렇게 우리는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하고 끝날 줄 알았는데 인생은 그렇지가 않았다. 인생은 계속되고 불안도 영원했다. 나는 이 불안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불안을 죽이고 죽여도, 그 불안은 나를 비웃는 것처럼 다시 어둠 속에서 괴상하고 기묘한 미소와 함께 나타나 나를 조롱했다.
실리가 군을 이끌고 떠나는 아침, 나는 그녀에게 축복을 내리기 위해 왕궁의 정문 앞에 섰다. 그녀는 내 앞에 무릎을 꿇고 내가 내리는 축복을 고요히 받아들였다. 내가 그녀의 어깨에 손을 내릴 때 손에 닿은 갑옷이 차가워 손끝이 떨렸다. 실리가 다쳐서 돌아오지 않으면, 그때는 정말 어떡하지. 그렇게 생각하자 손을 뗄 수가 없었다. 손을 떼면, 그녀는 가 버릴 것이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