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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건 백작 부인에게서 빌려 온 것이었다. 드레스도, 티아라도, 보석과 수많은 장신구도. 하지만 그 모든 건 실리의 것처럼 잘 어울렸다. 꽃의 여신처럼 화사하고 전쟁의 여신처럼 단호했다. 나는 실리의 앞에 무릎을 꿇고 싶은 걸 간신히 참았다. 그녀는 완벽했고 나는 그녀가 자랑스러웠다.
문이 열리고 들어온 신하 중에는 그녀의 이번 일탈에 대해 불만을 가진 사람들도 보였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그녀는 그녀 뜻대로 움직였고 결론을 냈다. 그녀는 나의 곁에 있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것은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이었다.
내가 그녀를 에스코트하자 그녀는 완벽하게 그 에스코트를 받았다. 마치 춤을 추는 듯한 걸음걸이로 그녀는 홀을 나아갔다. 시청사의 발코니를 향해 그녀와 걷는 동안 다시 결혼하는 기분이 들었다.
“이 길을 걷자니 다시 결혼하는 기분이야.”
내가 중얼거리자 그녀가 말했다.
“저는 살면서 단 한 번도 이렇게 확신을 가지고 걸어 본 적이 없었는데요.”
그녀가 살포시 웃음 지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전하께 가는 걸음이라 이렇게나 길이 환하군요.”
그녀의 말에 앞을 보자 발코니에서 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나에게 세상은 어두웠다. 그녀를 만났을 때 내 세상은 암흑과 같았다. 그녀는 나를 암흑에서 건져 주었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같이 손을 잡고 빛을 향해 걷는다. 이렇게 완벽할 수가 있을까. 이런 건 기대해 본 적이 없었어.
누군가가 열한 살의 나에게 이런 장면을 말해 주었더라면 어땠을까. 열 살의 나에게, 아홉 살의 나에게 말해 주었다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나는 그 고통의 순간을 더 잘 버틸 수 있었을까. 아니, 그때 나는 부정했을 것이다. 그럴 리 없다고 믿지 못했을 것이다.
누군가는 봄의 계절에 태어나 겨울에 죽지만 나는 겨울에 태어나 봄을 맞았다. 다행이야. 이런 봄을 맞이하기 위해 겨울에 태어나야 했다면 나는 그 탄생과 성장의 고통조차 축복으로 여길 수 있다. 모든 게 그녀를 만나기 위함이었다면, 그녀를 사랑하기 위한 과정이었다면, 그녀와 이 자리에 서기 위한 운명의 안배였다면 나는 진정으로 운명의 여신이 나를 사랑했다고 믿는다.
삶이 나를 축복한다.
실리의 손을 꽉 움켜잡았다. 아무리 움켜잡아도 내 마음을 전할 수가 없어서 애달팠다.
사람들이 실리를 보고 웅성거렸다. 처음에는 아무도 실리를 못 알아보는 것 같았다. 이윽고 누군가가 말했다. “저분, 그 성검사님 같은데.” 그리고 곧 목소리가 퍼져 나갔다. 성검사님, 성검사님. 사람들이 실리를 ‘성검사님’이라고 불렀다.
잠시 후 아마 비서관이 숨겨 놓았을 바람잡이가 소리쳤다.
“왕비 전하시다!”
그 한마디가 모두를 일깨웠다.
“왕비 전하!”
“왕비 전하!”
아무도 그들을 제지하지 않자 그들은 자신들이 왕비라고 부른 사람이 정말 왕비라는 걸 확신했다. 왕비. 자신들을 구한 사람이 왕비. 권력의 정점에 선 사람이 자신들을 구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다는 말에 사람들이 환호했다. 왕비를 연호하는 사람들을 보다 뒤에 흘끗 시선을 주자 몇몇 귀족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실리가 왕비가 된 것을 탐탁지 않게 생각했던 이들의 얼굴이 볼만했다. 실리의 이번 업적은 입에 입을 타고 소문이 퍼져 나갈 것이다. 그리고 물론 나는 거기에 날개까지 달아 줄 것이고. 대규모 음모를 파훼한 왕비라는 전무후무한 이 이야기는 두고두고 전설로 남을 것이다. 실리의 왕비 자리는 공고해졌다.
당신은 필요한 건 무엇이든 당신의 두 손으로 갖지.
사실 내가 줄 필요는 전혀 없었어.
“왕비 전하!”
사람들은 실리를 부르고 있다. 그들의 영웅을 소리 높여 부른다. 나는 충동적으로 실리의 손을 들어 그녀의 손등에 키스했다. 내가 보내는 경의의 표시에 사람들이 더 열광했다.
시청사의 광장에 세나른 가문의 이들부터 길드원들까지 줄줄이 끌려 나왔다. 사람들이 돌을 던지고 침을 뱉는 게 보였다. “죽어!” 분노는 하늘 끝까지 치솟았다. 어느 여인이 뛰어들려는 걸 병사들이 간신히 막았다. 그 여인이 울부짖었다.
“내 아이! 내 아이를 어떻게 했어!”
그녀는 품에서 꺼낸 식칼을 쥔 채 미치광이처럼 소리 질렀다. 내 아이! 처절한 고함에 사람들이 그녀를 어쩔 줄 모르는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연민도 동정도 그녀에게는 필요 없을 것이다. 없어진 아이 외에 그녀에게 보상이 될 만한 것이 무엇이 있을까.
참담했다. 나에게서 누군가가 실리를 빼앗아 간다면 무엇이 그녀를 대신할 수 있을까. 아무것도 될 수 없다. 그러니 같잖은 말 한마디는 그저 창끝으로 그녀의 가슴을 후비는 행동에 불과할 것이다. 그렇게 생각했을 때 실리가 고개를 돌렸다.
“보상을 실시해야 할 거 같네요. 철두철미하게 해야겠습니다.”
나에게, 그리고 내 뒤에 서 있는 관리들에게 하는 말이었다. 보상? 나는 그 말에 회의적이었다. 무엇이 보상이 될 수 있단 말이야. 내 눈을 본 실리가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지금은 보상이 되지 않겠지만.”
“…….”
“그래도 없는 것보단 낫지요.”
“…….”
“어떤 일이든 조금이라도 좋았던 점이 있어야 나중에라도 일어서는 데 도움이 됩니다.”
완전히 낫게 하는 건 불가능해도 무너진 몸을 일으킬 때 잡을 돌멩이 하나쯤은 될 수 있다며 실리가 말했다. 그따위 돌멩이가 다 무슨 소용일까 생각하는 나와는 달랐다. 그녀는 보상 지급 방법에 대해 회의를 해야 한다며 매우 진지하게 말했다. 그리고 그녀는 차가운 눈으로 시청사 광장을 내려다보았다.
“저분이 안돼 보이긴 하지만.”
그녀가 선을 긋는 건 아주 차가웠다.
“정말 피해자의 혈족인지 확인해 보아야 합니다. 이번 일은 피해자가 너무 많고 심지어 몇몇 도시에 산발적으로 퍼져 있습니다. 진짜 피해자와 가해자를 구분하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릴 테지만 꼭 필요한 일입니다. 문제는 피해자라고 주장하는 인물들이 많을 거라는 겁니다. 하지만 가려내는 데 총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나는 아마 조금 질린 눈을 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자 실리가 어떡하지, 하는 눈으로 내게 웃어 보였다. 그녀는 내 손등을 도닥거렸다. 전하, 라고 부르는 목소리는 따뜻하나 단호했다.
“마물들에게 가족을 잃었다는 수많은 사람을, 저는 십수 년간 만났습니다. 그러나 그들 중 반은 사기꾼이었습니다. 울부짖고, 죽어 버리겠다고 머리를 바위에 찧던 사람들이 사기꾼임이 들통 났을 때 무척 태연한 얼굴로 ‘먹고살려고 그랬어요.’ 하고 태연하게 말하는 걸 수백 번쯤 보았습니다.”
말도 안 돼.
다른 의미로 내가 놀라 질린 눈을 하며 시청사 광장을 내려다보자 그녀는 내 손을 꽉 잡아 자신을 바라보게 했다.
“저 어머니는 아직 결백합니다. 그렇게 믿어 주셔야 합니다. 하지만 분명한 건 결백하지 않은 인물들이 섞일 것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그들을 가려내지 못하면 가여운 이들에게 돌아갈 정당한 몫이 줄어듭니다. 그러니 냉정함을 잃지 않아야만 더 많은 이를 도울 수 있습니다.”
내가 눈살을 찌푸리자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전하, 부디 연민을 가지십시오. 그 정도로 살기 힘든 시대인 것입니다. 죽지 않은 아들이 죽었다고 하며 멀쩡한 머리에서 피가 나올 정도로 머리를 찧고, 제정신인데 미친 것처럼 울부짖어야 할 정도로, 그렇게 살기가 어려운 시대입니다.”
“…….”
“부디, 훌륭한 왕이 되어 주세요.”
실리가 소원했다. 별에게 비는 소원처럼 간절한 그 소원이 내 가슴에 박혔다.
***
나는 좋은 왕이 되려고 한 적이 있었던가.
한 번도 없었다. 나는 그저 내 자리를 찾으려고 했을 뿐이었고 나아가 실리의 자유를 손에 쥐려고 했다. 그뿐이었다. 한 번도 나는 좋은 왕, 훌륭한 왕의 역할을 상상해 본 일이 없었다. 어떤 왕이 되어야 할까. 어떻게 나라를 운영해야 할까. 그런 생각은 다 남의 일이었다. 생각 밖이었다.
“어떤 왕이 되라고 아무도 내게 말하지 않았어.”
내 말에 테인이 내 곰방대에 불을 붙여 주었다. 어떤 왕이 된다…. 그런 건 아무도 내게 말한 적이 없다. 왕이 되거나 혹은 못 되거나. 단지 그뿐이었다. 왕에도 종류가 있다는 걸, 좋은 왕과 나쁜 왕이 있다는 걸, 역사가 나를 심판할 것이라는 걸, 나는 왜 생각하지 못했을까.
아니, 상관하지 않았었다. 역사는 내가 죽은 뒤에 심판할 것이다. 나는 실리와 함께하면 그것으로 족했다. 그녀의 손에 자유를 쥐여 줄 수 있다면 나는 그것으로서 내 생의 목적을 다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누군가가 내게 왜 태어났냐고 묻는다면 그녀를 만나기 위해, 그녀의 생에 자유를 주기 위해서라고 말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나에게 영광과 기쁨을 주었다.
하지만 나는 왕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책임지는, 왕.
“훌륭한 왕이 되실 겁니다.”
테인의 말에 그를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의자에 앉아 서 있는 그를 올려다보자 그가 웃었다. 내가 어지간히 의심스러운 눈을 하고 있었던 게 틀림없었다.
테인은 잠시 망설이는 듯하다가 입을 열었다.
“하야슬란 왕국이라고 기억하십니까?”
“알기는 하지만 그 왕국에 대해 기억을 하느냐면 그건 아니지.”
내가 어릴 때 망국이 된 곳이니까.
내가 어깨를 으쓱이자 테인은 내 어깨를 가만히 붙잡았다. 그는 내 어깨를 어루만지면서 마사지해 주었다. 그는 가끔씩 내 어깨를 이렇게 마사지해 주었는데 그때마다 나는 내가 얼마나 어깨를 굳히고 다녔는지 실감하고는 했다.
“하야슬란 왕국이 망국이 되는 날, 왕비는 하필이면 남자아이를 낳았습니다. 당일이었죠. 그는 왕세자가 될 운명이었으나 사람들은 그 왕세자가 나라를 망하게 만들 운명을 타고나 나라가 이렇게 되었다며 한탄했습니다. 왕비는 나라가 망하는 순간 이리 죽어도 죽을 것이고 죽지 않더라도 죽는 것보다 더 모진 비난을 받으며 살게 될 아들이 걱정되어 산후의 고통이 채 사라지지 않은 몸으로 단검을 들어 아이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나는 고개를 돌려 테인을 바라보려 했지만 그는 완강하게 내 어깨를 붙잡았다. 고개를 돌릴 수가 없었다. 어쨌든 나는 병약하게 자랐고 테인은 아주 강인한 기사였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