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경배의 꽃-90화 (89/94)

90

실리의 온실을 떠올렸다. 어머니가 남기고 갔다는 그 온실을 실리는 손수 꾸몄다. 정원 꾸미기는 많은 귀부인들의 덕목 중 하나지만, 실리는 귀부인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리고 실리의 온실은 귀부인들이 이상으로 생각하는 온실과는 완전히 달랐다. 희귀하고 가치가 높고 아름다운 꽃들보다는 약초가 더 많은 이상한 온실. ‘사람을 살리는 목적’에 충실한.

치료사도 아니면서.

“저에게는 그런 꿈을 꿀 자격이 없었습니다. 감히, 제가 꿀 수 없는 것이었지요. 하지만 모든 검을 좋아하는 아이들이 그렇듯.”

내 눈가를 만지던 그녀의 손이 내 머리카락으로 올라왔다. 머리카락을 어루만져주던 그녀가 속삭였다.

“저도 영웅을 꿈꿨지요.”

그녀는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반짝이는 눈. 나는 이런 눈을 라스나티프에게서 본 적이 있다. 모든 것을 똑바로 이루고 있는 사람의 눈.

“그리고 아마 여자를.”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잠시 어딘가를 바라보았다. 먼 과거를, 과거의 어딘가에서 그녀가 받은 상처를 잠시 되돌아보는 듯했다. 그러나 그녀의 눈은 여전히 반짝였고 그녀는 웃고 있었다.

“여자가 되고 싶었어요.”

그녀가 남자였던 적은 한 번도 없었으나 그게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았다. 사람들은 그녀를 여성으로서 보지 않았다. 그녀는 강력했고 그런 그녀를 사람들은 여성이 아닌 무성으로 대하려 했다. 그녀는 거기에 부응했다. 그녀는 마치 물 같은 사람이었다. 사람들이 자신을 넣으려 하는 그릇에 따라 스스로를 변화시켰다.

그녀는 자신의 바람을 꽁꽁 숨겨서 스스로도 모르는 곳에 묻어 두고서 모두의 바람에 맞는 모습으로 살아왔다. 내가 모든 걸 무너뜨리기 전까지.

“이든.”

그녀가 내 이름을 불러 가슴이 철렁했다. 그녀는 내 이름을 이런 식으로 부를 때마다 ‘미안해.’라고 말했다. 그리고 무언가가 일어났다.

하지만 오늘은 다른 말이 나올 것 같았다. 고마워, 같은….

“사랑해.”

내가 예상한 선물이 마치 손바닥만 한 것이었다면 그녀는 지금 나에게 세상만 한 선물을 주었다. 나는 더 참을 수가 없어서 그녀의 머리카락을 잡고 키스했다. 내 거친 키스에 그녀는 적극적으로 응해 왔다. 그녀의 혀에서 레모네이드의 맛이 났다. 상큼한 맛. 아아. 그리고 곧 그녀의 맛이 수줍게 내게 자신을 드러냈다. 그녀의 맛은 여전했다. 머리를 돌게 하는 맛이었다.

키스를 참을 수가 없었다. 계속 그녀를 몰아붙였다. 사랑해. 그 말은 언제나 내가 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그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녀의 눈에서 언제나 망설임을 볼 수 있었다. 그녀는 나를 아주 좋아했다. 거의 사랑했다. 하지만 사랑을 코앞에 두고도 그녀는 그 문턱을 넘지 못했다. 수많은 것들이 그녀의 발목에 족쇄처럼 걸려 있었다. 하스트레드, 이익 상충의 문제, 그리고 그녀가 모든 것을 체념한 사람이라는 것. 그런 것들이 그녀를 언제나 힘겹게 했다. 때로 그녀는 자신의 앞에 있는 문턱을 넘을 것처럼 행동했지만 결국은 넘지 못했다. 그녀의 발목에 달린 족쇄가 너무 무거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는 그 족쇄를 풀고 훌쩍 문턱을 뛰어넘어 내게로 왔다.

그녀는 나를 구했다.

그리고 내가 그녀를 구했다고 말한다.

그녀의 가슴을 움켜쥐자 그녀가 신음을 터뜨렸다. 오랜만에 만져 보는 몸은 예민하게 달아올라 있었다. 하고 싶은 것 같다. 그녀도 나를 원한다.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그녀를 끌어안았는데도 더 가까워지고 싶었다. 그녀를 한 줌에 쥐어 터뜨리고 싶었다. 아예 내 안에 씹어 삼키고 싶었다. 내가 그녀의 옷을 찢어발기려는 찰나에.

똑, 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그제야 여기가 어딘지 우리가 무슨 이야기를 하던 중이었는지 생각이 났다. 머리가 핑 돌 정도로 자극적이어서 떠올리는 데 잠깐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똑, 똑, 똑.

다시 노크가 이어졌다. 실리가 머리카락을 풀어 다시 묶는 사이에 나는 그녀의 옷차림을 한 번 확인해 주었다. 조금 구겨지긴 했어도 딱히 문제는 없어 보였다.

“그래.”

내가 대답하자 그제야 문이 열리고 소피아가 들어왔다. 알 만하다는 눈이었지만 그녀는 정말로 알은체하는 건 삼갔다.

“하라의 시민들이 전하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나를 기다리는 거야, 정의를 기다리는 거야.”

물으면서 실리의 손을 붙잡았다. 그녀의 손을 잡는 것만으로도 손가락 끝이 짜릿했다. 이대로 침대로 갔으면 좋으련만 그러기엔 하라의 시민들이 대낮에 횃불을 들고 시청사로 몰려들어 있었다. 그들은 나를 기다렸다. 내가 죄인들에게 내릴 단죄의 달콤함을 맛보길 간절히 원했다.

“왕비 전하를 기다리는 것 같습니다만.”

소피아가 그렇게 말하며 미간을 찌푸렸다.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냐는 표정이 역력했다. 실리가 상황을 설명하기는 했지만 심각한 상황에 비해 너무 담담하게 묘사한 듯했다.

“리를?”

“예, 사람들은 왕비 전하께서 어떤 분이신지 모르니까요. 왕비 전하께서 수감되셨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매우 분노하는 중입니다.”

“리가 투옥되어서 분노한다고?”

“예. 지금 이 도시에서 아이들을 구한 건 왕비 전하시니까요.”

실리는 사람을 구하고 싶었다고 말했고, 실제로 하라에서 그 말을 실천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런데 그녀는 왜 자신이 사람을 구한 적이 없다고 생각했을까. 그녀는 나는 물론이고 많은 사람을 구해 주었다. 그녀가 마물을 죽일 때마다 죽을 운명이었던 사람들이 살아남지 않았던가. 언제나 자신이 한 일을 과소평가했지만 그녀는 처음부터 영웅이었다.

“그래서 왕비 전하시라고 말을 해 주려 했는데 비서관이 반대해서요.”

“비서관이?”

“좀 드라마틱한 방법으로 모습을 드러내기를 원한답니다.”

아아, 뭔지 알 만했다. 내가 실리를 바라보자 그녀도 무슨 뜻인지 알아챈 듯 웃었다. 그녀는 자신의 옷차림을 한 번 내려다보고는 어깨를 으쓱였다. 나는 그녀가 싫다고 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번잡한 걸 싫어하니까. 그러나 그녀는 의외로 내 손을 놓더니 머리를 풀었다.

“시청사에는 저를 꾸며 줄 만한 사람이 없을 겁니다. 하지만 세나른 가문에는 시녀들이 있겠지요. 소피, 데려와.”

실리의 명령에 소피아가 허리를 깊게 숙여 보였다.

세나른 가문에서 마차가 들어올 때 사람들의 고함 소리가 울려 퍼졌다. ‘죽여, 죽여!’ 그 소리에 가엾고 무해한 시녀들은 무척 떨었던 모양이다. 시민들의 분노에 잔뜩 기가 죽은 채로 들어온 시녀들은 실리를 꾸미는 내내 손을 달달 떨었다.

“저, 저희는 죽나요?”

실리가 치장하는 걸 구경하는 사이, 누군가가 공포를 못 이기고 물었다. 그녀가 그렇게 묻자마자 옆에 있는 이들이 화들짝 놀라더니 모두가 무릎을 꿇었다.

“소, 송구합니다, 왕비 전하.”

물어본 시녀는 꽤 어린 나이였다. 자세히 보니 공포에 못 이겨서 물어본 것도 있지만 자신이 사실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어쩌면 공포에 이기지 못했다기보다는 용기를 낸 것일지도 모르겠다. 만약 실리가 그녀를 죽인다면 그녀는 자신을 죽일 사람의 치장을 도운 다음 그 사람에 의해 죽는 것이었다. 사람의 목숨이 한낱 도구로서 다루어지는 셈이었다. 끝까지 사용된 다음 가차 없이 폐기되는. 이 어린 시녀는 자신의 도구로서의 운명에 미약하게나마 최선의 반발을 한 셈이었다.

물어본 시녀는 무릎 꿇지 않았다. 그녀는 똑바로 고개를 들고 실리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턱이 덜덜 떨리다 못해 이가 딱딱 부딪히는 소리가 났지만 그래도 그녀는 용감하게 공포에 맞섰다.

나는 그 시녀가 별로였다.

왜냐면.

“이름이 어떻게 되지?”

실리의 마음에 들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실리의 금색 눈동자가 어린 시녀를 부드럽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마, 마리안입니다.”

“마리안. 이 도시는 좋으니?”

“…예?”

“집을 마련해 주면 수도 옌선으로 와서 내 시녀가 될래?”

실리의 말에 무릎을 꿇고 있던 시녀들이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설마 왕비가 저렇게 말하리라고는 생각도 못 한 모양이었다. 마리안 자신도 놀란 듯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제, 제가요? 저, 저는….”

“물론 오늘처럼 너 하고 싶은 말을 다 하면 안 되긴 하지만.”

‘그리고 아마 그럴 수도 없을 거야. 옌선 왕궁은 엄하거든.’ 하고 실리가 덧붙였다. 실리의 얼굴은 평소와는 달리 귀부인의 것이 되어 있었다. 아니, 귀부인이라기보다 그녀는 여왕이었다. 모두를 지배하는 여왕. 여신. 모두의 운명을 쥐고 흔드는 그런 절대적 존재.

“나는 네가 마음에 드는데.”

그 말에 마리안이 얼굴을 붉혔다. 실리는 종종 여성들에게도 인기가 있었다. 특히나 이 도시에서 실리는 영웅이었다. 마리안이라는 시녀는 조금 전에 자신을 죽일 거냐고 물었던 건 까맣게 잊고서 마치 영혼이라도 내줄 것 같은 기세로 따라가겠다고 말했다.

또, 또 사람을 꾀지.

나는 실리를 보며 그녀가 아무것도 못 하는 백치였다면 어떨까 잠시 생각했다. 나는 이대로 왕이고 그녀는 백치인 상태로 우리가 어딘가에서 만나는 것이다. 그럼 나는 그녀를 아름다운 새장에 가두고 나만 바라보게 할 것이다. 아무도 못 보게 해야지. 내가 씻기고 내가 먹이고 내가 입히고 모든 걸 나 혼자 할 것이다.

하지만 그건 실리가 아니겠지.

그 아름다운 새는, 실리의 얼굴을 하고 있어도, 실리의 몸을 가지고 있어도, 세실리아 사리안의 영혼까지 가지지 못했을 것이고 나는 결국 실리가 아니라며 분노했을 것이다.

지금 내 앞에 있는 이 사람이 실리이다.

빛나는 나의 영웅.

“가실까요, 전하.”

실리가 눈부신 모습으로 말했다. 대관식을 치르지도 않았지만 드라마틱함을 위해 그녀의 머리에는 티아라가 얹어졌다. 이 티아라는 근처에 있는 백작가에서 공수해 온 것으로 사실 왕비의 물건이라고 하기엔 턱도 없이 부족했다. 하지만 모여 있는 군중에게 이 여인이 ‘왕비’임을 알리기엔 충분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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