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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배의 꽃-89화 (88/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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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하, 아니, 전하께옵서 사춘기를 아주 가볍게 보내셨다는 건 그 누구보다 제가 잘 알지요. 그러나 각하. 차라리 그때 사춘기를 화끈하게 보내실 일이지, 지금 이게 무슨 일입니까?!”

다른 의미로 소피아는 감격, 아니 환장해 있었다. 그녀는 그동안 실리가 저지른 이야기를 듣고 얼이 빠져 내가 앉을 의자에 털썩 주저앉기까지 했다. 얼마나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던지 내가 “소피, 괜찮아?”라고 물어야 했을 정도였다. 물론 실리와 소피, 그리고 나 이렇게 셋만이 있는 자리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셋만 있는 자리가 아니었다면 소피도 정신 줄을 잡고 있긴 했을 것이다. 물론 속으로는 미칠 지경이었겠지만.

그러니까 실리의 이야기는 다음과 같았다.

실리는 오스틴이라는 남자에게 하라의 길드와 귀족이 유괴를 조장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날 새벽 오스틴의 동료가 살해당하는 걸 목격했고 목숨의 위협을 느낀 오스틴은 실리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상황을 파악한 실리는 내게 데리러 와 달라고 말하는 한편 안쪽에서도 뭔가 해야겠다고 느꼈다.

실리는 ‘뭔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수단을 안 가리는 경향이 있다. 그녀는 일단 유괴된 아이들을 구하기로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유괴된 아이들이 있는 창고를 알아내는 게 급선무였다. 그리하여 그녀는 길드에 잠입하여 그곳을 혈혈단신으로 박살을 내고 그중 몇몇을 고문했으며, 창고 위치를 알아내어 아이들을 보호하고, 아이들을 홀로 보호할 수 없으니 신전과 결탁을 했고, 이 사실을 알게 된 신전이 자신이 아는 세력들을 불러 모았고, 그동안 시장에 대한 불만이 쌓인 시민들이 이 일을 알게 되면서 폭발하여….

내가 데리러 오는 그 짧은 시간 동안 하라 내부에서는 시민군과 길드의 내전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와서 성문을 내린 게 아니라 시민군이 아무도 도망을 못 치도록 애초에 내려놓고 있었다는 이야기에 어이가 없었다. 그러다 왕이 군대를 데리고 도착했다는 말에 시민군도 길드도 귀족도 모두 사색이 되었다. 누구든 반역으로 잡혀갈 수 있을 만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시민군은 흩어지고 길드는 아무 일도 없는 체를 하고 귀족인 세나른 가문은 서둘러 매무새를 대충 꾸미고 달려 나왔던 것이다.

말도 안 되는 상황이었지만 나는 그저 실리가 자랑스러웠다. 그녀가 자신의 입으로 스스로를 왕비라고 하지 않았던가. 내키지 않았다면 목에 칼이 들어와도 그런 말을 하지 않았을 사람이었다.

“아니, 전하.”

내 얼굴이 어떠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소피아가 내 얼굴을 보며 분통을 터뜨렸다.

“지금 그렇게 얼굴을 막, 그렇게….”

‘헤벌쭉해 계실 때가 아닙니다.’라는 말을 좀 정중하고 고운, 궁중 용어로 해 보겠다는 의지가 소피아의 얼굴에서 잠시나마 희미한 빛을 틔웠다가 사라졌다.

“헤실거리실 때가 아닙니다. 상황이 심각합니다, 전하!”

소피아가 책상을 쾅 내리쳤다. 뒤늦은 사춘기를 겪고 막 피어오른 아가씨가 된 것같이 생기발랄해진 실리와 그녀를 보며 마냥 좋은 나를 앞에 두고 환장해 미치고 팔짝 뛰겠다는 얼굴이었다. 아아, 정신을 차려야지. 머리를 흔들어 보려 했지만 실리가 너무 싱그럽게 웃고 있었다.

저렇게도 웃을 수 있는 여자였어. 그리고.

내가 손을 내밀자 그녀는 스스럼없이 그 손을 잡았고, 내 손을 손가락으로 도닥거렸다. 마치 악기를 두드리는 듯한 리듬으로.

“아, 좀!”

소피아가 미치려는 얼굴로 두 손을 허우적거렸다.

“제발, 이러시지 말고 현안에 집중하시란 말입니다! 하라에, 유괴가! 대규모 유괴가! 아, 듣고 계십니까?!”

“내가 말해 준 거잖아, 소피.”

실리가 웃음을 터뜨렸다. 누구에게 들은 이야기를 하고 있느냐며 웃는 실리의 얼굴에는 그림자가 없었다. 마치 마법 같았다. 내가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자 그녀가 또 웃었다. 분명 실리인데도 낯익으면서도 한없이 낯선 그런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보고 싶었습니다, 전하.”

스스럼없는 그 말에 가만히 있었다.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르는 게 느껴졌다. 보고 싶었다. 아니, 그 말로는 부족했다. 부족한데, 결국은 그 말이 가장 정확한 말이었다. 나는 그녀가 보고 싶었다. 보고 싶어서 숨이 넘어갈 지경으로 그리웠다.

귀 끝까지 달아오른 걸 스스로도 느낄 수 있었다. 당혹스러워서 말을 잇지 못하자 그녀가 또 웃었다. 그 얼굴을 가까이에서 보고 싶었다. 고개를 가까이 하자 실리가 보라는 것처럼 얼굴을 내 쪽으로 돌려 주었다. 그녀의 얼굴이 반짝거렸다. 그 어느 때보다 더.

내게 돌아온 그녀의 얼굴이 마치 모든 것을 다 가진 사람처럼 환하여, 나는 빛을 가슴에 품은 듯 가슴이 벅찼다.

믿을 수가 없어서 손을 뻗어 만지려고 하자 “아, 맙소사.”라고 소피아가 중얼거렸다. 그녀가 마른세수를 하는 기척이 들렸다. 그러고는 곧 “일단 물러갑니다.”라고 말하고 사라져 버렸다.

탁, 하는 문소리가 들렸다. 문밖에서 “전하는?” 하고 묻자 “아, 몰라! …들어가지 마! 아무도 들어오지 말라 하신다.”라고 말하는 소피아의 불퉁한 목소리가 울렸다. 그 소리는 무의미하게 내 귓가를 스치고 지나갔다.

할 말이 많은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당신이 달라졌어. 그게 싫지 않아. 단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 당신이 내 곁이 아닌 다른 곳에서 달라졌어. 하지만 그게 내 덕분이라고 웃는 당신의 앞에서 나는 그저 행복해. 나는 당신이 없는 동안은 불행했고 당신이 이제 내 곁에 영원히 있어 줄 거라는 약속을 받고 싶어. 하지만 그 약속은 내가 당신에게 했던 약속, ‘당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하게 해 주겠다’는 것과는 위배되지. 나는, 실리, 나는….

실리가 웃음을 터뜨리며 손을 뻗어 내 눈가를 어루만졌다.

“눈이 자꾸….”

실리의 목소리가 조금 잠겨 있었다.

“눈이 자꾸 움직입니다.”

“…….”

“번민하듯이 한곳에 있지 못하시네요.”

“번민하니까.”

“왜, 번민하십니까.”

“네가 날 또 떠날까 봐.”

원망하듯이 말하고 싶지 않았는데 그렇게 말해 버렸다. 원망하고 있지 않았는데 그래도 달래 주길 바랐다. 모두의 앞에서는 강력한 왕인데 실리의 앞에서는 열한 살의 무력한 꼬맹이로 돌아가 버린다. 왜 그럴까. 첫 만남이 그러했기 때문에? 실리, 도대체 나는 왜 이러는 것일까. 나는 당신 앞에서 가장 근사하고 강력한 남자가 되고 싶어. 그런데 언제나 나는.

그 열한 살의 무력한 어린아이로 돌아가 버려. 당신의 앞에서만 나는 그 아이가 되어 버린다.

그녀는 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내 눈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이 그 어느 때보다 맑아서 눈이 부셨다.

“제가 눈을 떴을 때.”

그녀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사람들은 저에게 왕비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던 인생이었지요.”

“…….”

“하스트레드는 모두 감옥에 가 있었고요. 저는 그들을 빨리 빼내고 하스트레드를 안전한 지점까지 끌어올려야 했습니다. 그게 저의 마지막 사명이었습니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부여된 사명을 끝내고 저는 새로운 삶을 마주하게 되었는데.”

그녀는 막막함을 순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몰라 고민하는 것 같았다. 나는 그녀의 손을 꽉 잡아 주었다. 그녀가 말하지 않아도 나는 그 막막함을 안다. 나는 왕세자였다가 한순간에 추락한 적이 있다. 그 막막함이라니. 모든 걸 빼앗긴 순간의 막막함. 아무것도 없는 인생의 적막은 등골이 오싹하고 지금도 소름이 끼친다. 그리고 그 막막함은 나이가 들어 겪을수록 더 강렬할 게 틀림없다. 어릴 때, 뭘 모를 때가 견디기 더 쉬울 것이다. 만약 내가 지금 이 순간에 모든 걸 빼앗긴다면, 그녀와 왕위를 동시에 빼앗긴다면 정말 견딜 자신이 없다.

그녀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옌선으로 돌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안다.

“옌선에 돌아가는 순간 저는 왕비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대관식이 이루어지면 그 이후에는….”

돌이킬 수 없다. 자신의 인생을 선택할 수 있는 기로에 설 자격조차 잃어버린다.

어디에 서 있는지도 모르는데 인생의 물결이 그녀를 계속 떠밀고 있었다. 그녀는 중심을 잡아야 했다. 어디에 서 있는지는 일단 알아야 했다. 방향을 잡아야 했다. 그러려면 자신이 방향을 결정해야 했다. 그래서 그녀는 무작정 왕비라는 자리에서 멀어지는 것을 선택했다.

이제 그녀가 왜 옌선에 오지 않았는지는 알 것 같았다. 순식간에 휘몰아쳐 결정될 인생을 잠시 멈추기 위해서였다. 그래, 그런데.

왜 하라였고, 하라에서 무슨 일이 있었기에 그녀는 이토록 한 꺼풀 벗게 된 것인가.

내 눈에서 의문을 발견한 그녀가 볼우물이 팰 정도로 웃었다.

“하라에 온 건 우연이었습니다. 내내 우연이 겹쳐 오스틴을 만났고 사건에 휩쓸리다 보니 이렇게 되었습니다만.”

그녀는 우연이라고 말하지만 그 중간에는 필연이 하나 끼어 있다.

그녀는 나를 불렀다.

나를 부르는 순간, 그녀의 인생에 옌선이 끼어드는 순간 그녀의 인생이 결정될 거라는 걸 알면서도 그녀는 그것을 선택했다. 그렇다는 건 그녀의 결정은 끝났다는 걸 의미했다.

그녀는 왕비가 되기로 했다. 자의에 의해 결정한 것이다. 왜?

“전하께서는 저에게 하고 싶은 걸 하라 하셨지요.”

“기억해.”

“하고 싶은 게 생각났습니다. 아주 어릴 때부터 하고 싶었는데 감히 하고 싶다고 소리 내어 말해 보지도 못한 꿈이, 저에게 있었더라고요.”

공작, 성검사, 기사단의 주인이었던 그녀가 하지 못했던 일이 무엇이었을까. 내가 의아하게 그녀를 바라보자 그녀가 활짝 웃었다.

“저는 정의가 되고 싶었습니다.”

아마, 다른 데서 말했더라면 바보 같은 소리라고 조롱이나 당하지 않았으면 다행이었을 정도로 아주 천진난만한, 너무 순진해서 어리석게 들리는 소리였다. 한 번도 실리는 이런 말을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녀는 언제나 철저하게 현실에 발붙이고 있는 사람이었다.

“누군가를 살리는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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