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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려옵니다.”
누군가가 무의미한 보고를 중얼거렸다. 찰캉, 찰캉. 검 소리가 났다. 다들 검을 빼 들고 있었다. 한낮에 성문이 닫힌다는 건 노골적인 적대였다. 그러고도 한참이 지나 성문이 열리는 것이니 적대적으로 나올 수도 있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나와 같이 동행한 라스나티프와 그녀의 신관들이 신력을 끌어모으는 게 느껴졌다. 양측이 부딪칠 경우 신관들은 재빨리 우리 쪽에 보호막을 칠 생각인 것이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곧 다 스르르 사라져 버렸다. 저쪽에서 보인 건 무장한 이들이 아니라 한껏 꾸미고 서 있는 어느 귀족 가문 일원들이었다. 아마, 하라의 영주로 추측되었다. 고개를 돌리자 비서관 중 한 명이 속삭였다.
“하라의 영주 세나른 가문입니다.”
“돌았네.”
소피아가 속삭였다. 소피아의 험한 소리에 귀족인 주변 이들이 일제히 그녀를 노려보았다. 감히 어떻게 왕의 앞에서 그렇게 말할 수 있느냐는 꾸짖음이 가득한 눈길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 말에 심정적으로 매우 동조하고 있었다.
저게 얼마나 돌았기에 나를 여기에 세워 뒀지?
“변명을 들어 보지.”
이랴.
내가 소리쳐서 말을 출발시키자 기사들이 나를 감싸듯이 하며 성문으로 향해 달렸다. 그 뒤를 따라 수많은 인원이 움직이고 있었다.
세나른 가문이 어떤 가문인지 나로서는 알 길이 없다. “영주가….”라고 말하자 비서관이 황급히 내게 속삭였다.
“시장입니다, 전하.”
“영주가 아니란 말이냐?”
“하라에는 영주가 없습니다.”
영주가 없는 도시들이 일부 존재하기는 했다. 그런 도시들은 시장을 통해서 운영되었고, 도시의 주인은 바로 왕이었다. 즉, 이곳은 왕의 직할령이었다. 내가 그 사실을 몰랐던 것은 하라가 그리 중요한 도시가 아니기도 했고, 왕가의 재산 목록이 끝도 없이 길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아니, 아마 누군가가 오는 길에 말해 주었을 것 같은데 흘려들었을 것이다. 내가 눈살을 찌푸리자 비서관이 고개를 숙였다. 나는 내 재산에게 거부당한 최초의 왕이 될 게 틀림없었다. 그것도 왕위에 즉위한 지 얼마 안 되어서.
말에서 훌쩍 내리자 다들 내 눈치를 보는 게 느껴졌다. 나는 나의 직할령에서 거부당했다. 그들은 감히 내 앞에서 도시의 성문을 닫았다. 이건 반역이었다. 완벽한.
조금이라도 반역의 기미가 보였다면 그들을 족쳤을 것인데 세나른 가문의 일원들이 하나같이 어찌나 촌스럽게 꾸미고 나타났는지 기가 찰 지경이었다. 이 짓을 하려고 나를 성문 앞에 세워 뒀다? 내 도시에서?
성큼성큼 걷자 그 뒤를 소피아와 근위대가 따라붙었다. 소피가 입을 달싹거리는 게 느껴졌다. 그녀는 뭐라고 말을 하려다 참고, 또 말을 하려다 참았다. 나를 말리고 싶은 건지 아니면 뭐라고 충고를 하고 싶은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뭐든 상관없었다. 듣지 않을 셈이었으니까.
나는 세나른의 가주, 즉 세나른 어쩌구(아마 백작쯤으로 추정되지만 알 수가 없다)에게 다가가, 말채찍으로 그의 얼굴을 후려갈겼다. 짝 소리와 함께 그가 바닥으로 쓰러졌다.
“감히 내 도시의 성문을 닫아? 반역이냐?”
내 서슬 퍼런 목소리에 세나른 가문의 인물들이 그제야 분위기를 파악한 듯 재빨리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어차피 한 대를 후려갈긴 이상 두 대를 때리든 세 대를 때리든 충격은 달라질 바가 없기 때문에 말채찍을 땅에 내버리고 세나른의 앞에 섰다.
“개죽음당하고 싶은 게냐.”
“저, 전하.”
“내가 우습던가.”
“아, 아닙니다, 전하. 소, 소신은 그저.”
세나른이 얼굴에서 피를 흘리면서 더듬더듬 변명했다. 그런 그의 옷을 바라보다 문득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촌스러워도 지나치게 촌스러웠다. 아무리 중앙과는 상관없는 지방 귀족이라지만 이렇게까지 촌스러울 일인가? 옷도 어색하고 보석도 격이 맞는 게 하나도 없이 주렁주렁 차고만 왔는데. 마치 아무거나 손에 집히는 대로 하고 온 사람처럼.
마치, 무언가를 숨기기 위해 다급히 꾸미고 온 사람처럼.
“소신은 그….”
“전하.”
화는 나지 않았었다. 그저 필요에 의해 화를 내는 척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감정을 가장하는 것은 늘 익숙하게 해 오던 일이었고 나는 지금도 잘할 수 있었다. 단 한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것만 아니면 언제든 가능했다.
그러나 단 한 사람만은.
“와 주셨군요.”
단 한 사람의 앞에서만은 그게 안 된다.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모두가 내 분노에 무릎을 꿇고 있는 가운데 골목 안쪽에서 태연한 얼굴로 걸어 나오는 여기사가 보였다. 붉은 머리카락을 아무렇게나 하나로 묶은 여자는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보다 조금 더 말랐지만 그때보다 더 생기 있는 눈을 하고 있었다. 새하얀 셔츠의 단추가 하나 없어져 가슴골이 보일락 말락 했고, 검은 바지는 먼지에 구른 사람처럼 잔뜩 더럽혀져 있었다. 얼굴에는 웃음이 섞여 있었는데 평소와는 달리 체념한 웃음은 아니었다. 그녀는 조금 낯설게 웃고 있었다. 어색해하는 듯한 웃음이었지만 그 웃음에서는 이전에 없던 생기가 느껴졌다.
덜컥.
심장이 땅으로 떨어지는 것 같았다. 그녀의 뒤에서 얼굴이 반반한 남자가 두리번거리며 따라 나오고 있었다. 내 머릿속에서는 부정적인 생각들이 뭉게뭉게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녀는 나에게 왜 오라고 한 걸까. 그럴 리는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이별’이라는 단어가 머릿속에서 쾅쾅 낙인처럼 찍혔다. 저 남자는 누구지? 왜 그녀는 생기 있는 웃음을 내가 아닌 저 남자 옆에서 가질 수 있게 되었지.
저 웃음을 주는 사람은 나여야 하지 않았던가.
절벽을 기어오른 사람은 나였는데, 당신을 경배하는 제사장은 나였는데, 알지도 못하는 인간이 당신의 사랑을 채 간 것인가. 그렇게 생각하면 숨이 막혔다.
부지불식간에 등 뒤에서 칼에 찔린 기분이었다. 숨이 안 쉬어져서 그저 바라만 보고 있을 때였다. 말이 나오지 않았다. 왜 여기 있어. 왜 그렇게 웃어. 그 남자는 누구야. 내가 얼마나 미칠 것 같았는지, 내 마음이 어떤지, 네가 나를 어떤 지옥에 밀어 넣고 웃고 있는지 알고 있는지, 입만 열면 원망이 쏟아질 것 같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녀가 불러 준 것만으로도 신께 감사하고 싶었던 것이 며칠 전이었는데 그녀를 만나니까 원망이 터져 나왔다. 나도 몰랐던 원망이.
그런데 그녀가 저벅저벅 걸어와 나를 끌어안았다. 나보다 키도 작고 몸집도 작은 그녀는 마치 나무를 부둥켜안는 것처럼 나를 안았고, 그건 그녀가 나를 안는다기보단 그녀가 내 품에 들어왔다는 게 더 맞는 표현일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는 나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속삭였다.
“돌아왔습니다.”
그 한마디에 원망이 녹아내렸다. 눈물이 흐를 것 같았다. 나는 울지 않기 위해 그녀를 꽉 끌어안았다. 그 한마디면, 충분했다.
그때 바닥에 쓰러져 있던 세나른이 소리 질렀다.
“저 반역자가!”
삿대질까지 하며 고함을 치는 바람에 나는 나한테 하는 소리인 줄 알았다. 반역자? 어떤 사람들은 나를 그렇게 부르기도 한다. 나는 삼촌을 끌어내리고 왕위에 올랐으니까. 그 자리가 본디 내 것이어야 마땅한 자리였다 하더라도 삼촌을 끌어내린 조카, 조카를 죽이려고 했던 삼촌이라는 이야기에는 피비린내가 가득했다. 그 탓에 사람들은 우리를 묶어서 ‘그놈의 집안’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친왕파였던 이들은 그보다 더 강경한 어조를 사용했다. 물론 살아남은 친왕파 자체가 몇 안 되긴 하지만 살아남은 이들이 존재하긴 하니까. 나는 세나른이 친왕파 중 제 정체를 잘 숨기고 있었던 한 명인가 의아했다. 그러다 갑자기 나에게 공중의 면전에서 채찍으로 맞고는 수치심 때문에 눈이 뒤집힌 건 줄 알았다.
그러나 자세히 보니 그가 가리키는 건 내가 아니었다.
“전하, 반역자입니다! 속지 마십시오!”
세나른이 실리를 가리키며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눈에 핏발까지 선 게 아주 분노가 가득했다. 실리를 아는 모두가 그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사람들의 목에서 삐걱거리는 소리가 날 것처럼 목이 돌아가는 각도가 어색했다. 모두의 시선을 받은 실리가 하하하, 하고 웃었다. 민망해하는 웃음이었다.
이윽고 소피아가 말했다.
“얼굴이 하도 더러워서 못 알아봤는데, 너 오스틴 아니냐?”
“아, 예, 각하. 저기….”
“너 같은 소인배 새끼가 왜 전하와 같이 붙어 있어?”
소피아의 눈이 초승달처럼 가늘어졌다. 왜, 네가, 여기 있어? 소피아의 말에 오스틴이 대답을 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했다. 아니, 그게, 아니. 오스틴? 나는 그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저런 반반한 얼굴의 남자가 하스트레드에는 참 많았고 내가 그들의 얼굴을 다 기억할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실리의 최측근이 아니면 기억할 수 없었다. 모르는 남자였다. 오스틴. 나는 그의 이름을 속으로 되뇌어 보았다.
“전하!”
세나른이 무릎으로 기어 와 내 발치에서 다시 실리를 삿대질하며 고발했다.
“이자가 하라를 엉망으로 만들고 하라의 치안을 무너뜨리고 전하의 왕권에 도전하여….”
“왕비 전하께 무엄하다.”
쾅 소리가 날 정도로 세게 소피아가 세나른을 걷어찼다. 뒤로 나동그라졌던 세나른이 오뚝이처럼 일어났지만 어안이 벙벙한 얼굴이었다. 왕비? 누가? 그는 이해하지 못한 얼굴로 소피아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양 콧구멍에서 코피가 주르륵 흐르고 있었다. 얼굴이 피범벅이었다.
“왕비인.”
실리가 웃으며 쪼그리고 앉아 세나른에게 귀부인들이 흔히 그러듯 손등을 내밀어 보였다.
“세실리아 그로스랜이다. 반갑군.”
그리고 세나른이 나를 한 번, 실리를 한 번, 모두를 한 번 보더니 꼬르륵 기절해 버렸다.
***
실리는 한 번도 제 입으로 왕비라고 말한 적이 없었다. 그녀는 내 번개의 창에 맞고 기적적으로 되살아난 이후 내 곁에 한동안 머물렀으나 한 번도 스스로를 왕비라 규정하지 않았었다. 왕비로서 의복을 입거나 어딘가에 참석하거나 혹은 자칭하지도 않았었다. 그녀는 하스트레드로서만 존재했다.
그녀의 첫 인정에 나는 매우 감격했으나 내색하진 않았다. 그리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