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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말에 오스틴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그는 놀라서 내 손목을 붙잡았다. 내 손목을 잡은 손에 힘이 꽉 들어가 있었다. 그가 부들부들 떨었다.
“절 두고 가시겠다고요?”
널 데리고 갈 만한 의리는 없는데.
솔직하게 말해 주려다 참았다. 그래, 이 인간도 살리긴 해야지.
“아니, 정확히는 데리러 오라고 연락할 거다.”
너는 나의 이 결정을 어떻게 받아들이려나.
이든, 나는 너의 검이 되어 내 정의를 펼쳐 보이겠다. 그걸 네가 허락해 준다면 나는 그러고 싶어. 그래, 그게 내가 너의 곁에서 하고 싶은 역할이다.
고민은 끝났다.
열네 번째 뒷장. 돌아오다
[ 데리러 와 주시겠습니까. ]
그건 아주 짧은 한마디였다. 마법 전보. 그걸 보는 순간 내 심장을 조이고 있던 나사들이 모두 풀리는 기분이 들었다. 피가 미친 듯이 질주했다. 그녀였다. 단 한마디의 전보. 그 짧은 말. 그녀의 서체. 그리고 데리러 오라는 말.
그녀는 한 번도 내게 그런 걸 요구한 적이 없었다. 그녀는 늘 나를 밀어냈다. 안전한 곳으로 밀려날 때마다 나는 그녀와 연결된 선이 끊기는 기분이었다. 그녀는 선택했고 내게 청하는 바는 없었다. 언제나 나는 그녀가 선택한 것의 결과물로서 존재할 뿐이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그녀가 내게 손을 뻗었다. 잡아 달라고 한다. 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울음이 나왔다. 그녀가 나를 버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돌아오지 않으면 어떻게 하나, 그 생각에 밤잠을 이루지 못한 적도 있었다. 식사를 해도 소화가 되지 않았다. 서류를 봐도 글자를 읽을 수가 없었다. 그저 그녀 생각뿐이었다. 사람들이 돌아오고 있었다. 제자리를 찾은 나에게 모두가 돌아오는데 그녀만은 돌아오지 않았다. 나에게 모든 걸 준 그녀만은 마치 이제 되었다는 듯 떠나 버렸다. 공포는 지독했었다.
그리고 이제 그녀는 자신을 데리러 오라고 했다. 하늘에서 빛이 쏟아지는 것 같았다. 그녀가 나를 데리러 오는 것도, 그녀가 나를 만나러 오는 것도 아니었다. 내가 그녀를 데리러 가는 것이다.
“어디지?”
내 질문에 마법사들이 마법 전보를 확인하더니 의아한 듯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하라입니다….”
마법사장, 솔루조웨가 중얼거렸다. 하라? 나는 들어 보지 못한 곳이었다. 내가 그에게 시선을 건네자 그가 “항구 도시입니다. 꽤 번화한 곳이죠.”라고 중얼거렸다. 그의 말투에서 귀족들이 별로 가치를 두는 곳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왜 그녀가 하라에 있는지 알 수가 없었지만 상관없었다. 그녀가 지옥으로 데리러 오라고 했어도 개의치 않았을 테니까. 불구덩이여도 폭풍 한복판이어도 좋다. 아니, 그런 곳이면 더 좋지. 나는 이번에야말로.
봐야 할 마지막 서류에 사인을 하고 나서 잠시 손이 굳었다. 그녀의 몸을 꿰뚫던 번개의 창이 주던 그 감촉이 생각나서였다. 그녀가 나를 배신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는 배신하지 않았다. 그녀는 끝까지 나를 위해 모든 걸 걸었다. 그런 사랑을 받는다는 걸 알고 있었는데, 한순간 의심했다. 그 순간에 속아 버렸다.
그때는 모든 게 비이성적으로 흘러갔다. 세상이 다 나를 버리는 것 같았다. 막바지에 몰려 있었다. 조금만 더 이성적이었다면 좋았을 텐데, 수많은 도박판의 경험도 그 순간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저 그녀만 보였다. 그녀의 입술이 뱉는 말들의 진위를 알아볼 틈도 없이 그 말들은 내 가슴에 상흔을 냈다. 나는 다쳤고, 아팠고, 방어하려 했다.
“미안해.”
그녀의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메아리치고 있다.
실리는 목숨을 버려서라도 어느 누구도 배신하지 않은 채 나를 구하려 했다. 그리고 겨우 살아난 다음에도 모두를 구하고 싶어 했다. 기어코 모두를 구할 수는 있었지만, 그녀는 철저하게 희생당했다. 하스트레드도 나도 살아남았고 아무런 문제도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작위가 없어졌다. 하스트레드 영지가 없어졌고 그녀의 왕비 자리도 불분명해졌다. 사람들은 그녀의 진심과 진영을 의심하고 있었다.
“하라로 출발한다.”
내 말에 사람들이 불편한 얼굴을 했다. 왕인 내가 하라로 가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얼굴들이었지만 감히 내게 하라로 가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자는 없었다. 먹지 못하고 자지 못하는 나를 모르는 사람이 왕궁에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살아 있을 뿐 살아가지는 못하고 있었다. 가장 존귀한 자리에 앉은 채 죽어 가는 중이었다. 아무도 나를 막을 수는 없었고 모두가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전하.”
소피아가 내 옆에서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근위대장이 된 그녀는 내 옆에 그림자처럼 붙어 다녔다. 나의 첫 검 스승이었고 내가 ‘스승’이라고 인지할 만한 첫 인물이기도 했던 사람이었다. 그녀는 아주 곤란한 얼굴을 하고 나를 바라보았다. 말리려는 듯하다가도 말릴 수 없다는 걸 깨달은 듯 한숨만 쉬었다.
“최대한 많은 인원으로 보필하려 하니 그것만은 허락하여 주십시오.”
소피아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움직이는 것도 말을 타는 것도 그리 좋아하는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모든 것이 기꺼웠다. 그녀가 원하는 것이 있기를 간절히 바랐다. 어디든 좋다. 불구덩이든 지옥이든 어디든 달려가 내 마음을 내보일 수만 있다면.
차라리 그런 방법이 있다면.
그녀는 깨어나고 나서 모두가 자신을 앞에서는 왕비로 대하고 뒤에서는 적대시해도 태연했다. 모든 걸 버리는 순간에도 세상사에 초연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녀라고 아깝지 않을 리가 없다. 평생을 헌신한 것들을 버려야 하는 순간에 그녀라고 고통스럽지 않을 리 없다. 그런데도 그녀는 결코 내색하지 않았다. 누구에게도 자신의 아픔을 덜어 가라 하지 않았다. 그녀는 홀로 고고하고 당당하고 그만큼 외로이 견뎠다.
그녀는 결코 자신의 곁을 내주지 않았다. 나는 그녀에게 단 한 명의 곁붙이가, 고통받이가 되고 싶었다. 그 영광을 갖고 싶었다.
하라라고?
소피아를 물리고 지도를 꺼내 확인해 봤다. 하라는 하스트레드에서 옌선으로 오는 방향이 아니라 반대 방향에 있었다. 그녀가 왜 거기에 갔는지 알 수 없으나 내게 자신을 데리러 오라고 했다.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
하라에 가까워질수록 내 입에서는 말이 줄어들었다. 입이 바짝바짝 말랐다. 그녀에게 하고 싶은 말이 많으면서도 할 수 있는 말이 별로 없는, 만나고 싶으면서도 만나는 게 두려운, 그런 기묘한 기분이 계속되었다. 그녀가 변했을까 봐 두려웠고, 다른 눈을 하고 있을까 무서웠다. 그녀가 한 꺼풀 허물을 벗고 자라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한 번도 이런 일을 벌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언제나 모두와 함께 있었고 한 번도 개인적인 일을 우선시한 적이 없는 사람. 언제나 하스트레드였고 공작의 딸이었고 공작이었고 성검사였던 사람. 그래서 그녀는 한 번도 개인인 세실리아 사리안으로서 존재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런 그녀가 처음으로 하라에 갔다. 아무도 모르는 이유로.
나는 그녀에게 무엇이든 하라고 말했다. 내가 그녀에게 그럴 수 있는 자유를 주겠다고 선언했었다. 생각해 보면 그때 나는 얼마나 쉽게 말했던가. 그녀가 나를 원하지 않을 때도 그리해 줄 수 있을까. 그 생각을 그때 해 보았던가.
…해 봤지, 하지만 정말로 현실로서 생각해 보진 못했지.
하라의 성문에 다다랐을 때 우리는 잠시 멈칫했다. 왕의 깃발을 걸었는데도 하라에서 성문을 열지 않았기 때문이다. 노엽다기보다는 황당해서 우리 쪽 사람들은 무슨 일인지 몰라 성문을 흘끗거렸다. 소피아가 물었다.
“부술까요?”
마치 나뭇가지 하나 꺾는 일처럼 여기는 태도였다. 하라라는 중소 도시의 성문 하나 부수는 것이 얼마나 손쉬울지는 나도 잘 아는 일이지만 고개를 저었다. 첫째, 저 안에는 실리가 있다. 그녀가 어디서 어떤 포지션으로 있는지 모르는 이상에는 함부로 움직일 수 없었다. 둘째, 도대체 무슨 짓을 하고 있기에 이 도시의 영주는 왕이 당도했는데도 뛰어나오지는 못할망정 한낮에 성문을 걸어 잠근 것인지가 궁금했다.
“오래 버티진 못할 테니 구경을 좀 해 보지.”
내 말에 소피가 고개를 까딱해 내게 순종을 표하고는 뒤로 물러났다. 화살이라도 쏟아 낼 만한 담력이 있으리라고는 생각이 되지 않았다. 성벽에서 궁수들이 우리를 바라보는 게 느껴졌지만 그들은 감히 활을 겨누지도 못하고 있었다.
가장 걱정되는 건 실리를 인질로 데려오는 경우였다. 그게 내게 가장, 그리고 유일하게 무서운 경우였다. 하지만 그럴 가능성이 낮다는 건 여기에 있는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나도 알고 있었다. 세실리아 사리안을 인질로 잡는다고? 그 누구도 하지 못한 일을 이런 중소 도시의 길드원 따위가? 가능성이 거의 없다. 그러니 구경을 해 보는 것이다. 왜 실리는 나를 이곳으로 불렀는가. 이 도시는 왜 성문을 닫았는가. 이 하라라는 도시에 뭐가 있어서 실리는 여기에 왔고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나와 동석하여 하라까지 온 정무 차석 대신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내가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자 그가 미치고 팔짝 뛰겠다는 얼굴로 성벽을 올려다보고는 다시 내게 시선을 주었다. 대체 하라에서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러는 거냐고 눈빛으로 물었고 그는 대답할 차례였다. 그러나 당연히 그는 아는 바가 없었다. 왕에게 모른다는 대답을 하고 싶은 신하는 세상에 없을 것이다. 정무 차석도 마찬가지였다.
“황공하옵니다, 전하. 하라에 오기 전 도시에 관한 보고들을 전부 훑어보았습니다만 그 어떤 문제도….”
“쓸모없군. 그대는 옌선으로 돌아가라.”
내가 픽 웃으며 하는 말에 그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그가 우물쭈물하자 “이제 가는귀도 먹었는가, 경?” 하고 내 입에서 냉정한 소리가 나갔고, 그제야 그는 화들짝 놀라 내 앞에서 사라졌다.
소피아가 한숨을 쉬었다. 생각보다 하라가 길게 버티고 있었다. 그녀는 내 인내심이 불에 심지가 타들어 가듯 짧아지고 있다는 걸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내 인내심의 심지가 다 사라져 내가 마력을 손에 응집시키기 직전에.
갑자기 성문이 내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