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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배의 꽃-86화 (85/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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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게 참 이상했다. 생각해 보면 이런 걸 마주한 적이 별로 없었다. 언제나 마물, 왕권 그런 높은 것들만 상대했었다. 소매치기와 납치 같은 것들은 내게는 아주 먼 나라의 이야기였다. 이렇게 가까운 곳에 있으리라고는 한 번도 상상하지 못했다. 스스로 여관을 잡아 본 것도 난생처음이었다. 사실은 조금 마음이 두근거렸다. 어떤 절차인지 잘 모르기 때문에.

현실에서 살고 있었던가, 아니면 구름 위에서 살고 있었던가.

언젠가 빅토리아 솔루조웨는 내게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너는 아름답고 완벽하지. 그런데 실리, 나는 늘 생각해. 네게는 사람 냄새가 안 난다고. 내 친구, 너에게 사람 냄새가 나게 되었을 때 너는 불완전해지는 것일까, 더 완벽해지는 것일까.”

나는 그 말이 이상하다고 생각했었다. 나는 완벽하지 않다. 한 번도 완벽했던 적이 없었다. 늘 아등바등 아슬아슬하게 살아왔다. 모두가 그렇듯 나도 그렇게 삶을 애써 이어 왔다.

그런데 빅토리아는 저렇게 말했다. 왜 저렇게 말하는 것일까. 내가 말이 좀 없어서? 아니면 속내를 드러내는 데 능하지 못하기 때문에? 솔루조웨 가문의 아가씨인 빅토리아 또한 나와 마찬가지인데.

어쩌면 빅토리아의 이야기는 이런 뜻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여기가 낯설고 차라리 마물들 사이에서 검을 휘두르는 게 더 편하고 익숙한 나는, 인간의 곁보다는 마물의 곁이 더 어울리는지도 모르지.

밤새도록 잠을 이루기 어려웠다. 목욕물이 나가고 홀로 남아도 내내 잠이 오지 않아서 한 층 아래에서 들려오는 노랫소리를 들었다. 수많은 전설 속 용사들을 찬미하는 노래, 농염한 사랑의 노래, 그리고.

“번민하는 그대여, 주무세요.

그대의 고통도 괴로움도 별빛들에게는 한갓 잡음일 뿐이랍니다.

하늘 위에서 보면 모두가 다 똑같은 작은 것들이니

그대여, 자신의 가치나 자신의 정체 따위를 들여다보는 짓거리에 애쓰느라

잠을 희생하지 마세요.”

마지막에는 자장가와 비슷한 노래가 들려왔다. 비꼬는 듯도 달래는 듯도 한 그 노래는 지금 나에게 참 어울렸다. 가치나 정체성, 그딴 것에 신경 쓰느라 잠을 희생하지 말라니. 그 말은 정답이었다. 잠을 희생할 필요는 없었다. 태양은 또 뜨니까.

그렇게 생각하자 모든 게 편안해졌다. 그래, 삶은 계속되고 태양은 또 뜨고 고민할 시간은 많다. 마치 내일이 없는 것처럼, 곧 죽을 것처럼, 그럴 필요는 없다.

하지만 도망치지 말고 결론을 내자.

다시는 이런 짓은 하지 않도록. 어떤 후회도 없이….

잠들기 전 잠시 떠오른 건 이든의 얼굴이었다. 그 아름다운 얼굴. 내게 웃어 보이는 그 만개한 꽃 같은 미소. 그렇게 웃는 얼굴이 보고 싶었다. 그는 나를 찌른 이후로는 그렇게 웃지 못하게 되었으니까.

잠시 잠들었던 것 같다.

불이야, 라는 소리가 어딘가에서 들려왔다. 불? 머리에 차가운 물을 뒤집어쓴 기분으로 잠이 깼다. 창문을 벌컥 열고 상체를 빼서 주변을 확인했다. 불이야! 여기저기서 불이라고 소리치고는 있는데 연기가 나는 곳이 어딘지 모르겠다.

옷을 입고 뛰어 내려갔더니 사람들이 물동이를 들고 뛰쳐나가는 중이었다. 그들을 따라 달려 나갔다. 그러자 보이는 것은 항구에 있는 어느 창고였다. 이미 건물 전체에 불이 번져 도저히 끌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더 안 좋은 건 창고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고 불이 번지는 중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가장 안 좋은 건.

“저게 뭐야!”

누군가가 다락에 있는 창밖에 목이 매달린 채 불타고 있었다. 그가 허우적거리는 것으로 보건대 살아 있는 게 분명했다. 어쩌다 저런 상황에 처했는지는 모르지만 그를 구하는 건 거의 불가능해 보였다. 이미 그의 몸은 불이 번져 있었다. 아마 구해도 죽을 것이다.

그래, 죽을 것이다.

아는데도, 몸이 움직였다.

“당신 뭐야!”

물동이를 빼앗긴 옆 사람이 날카롭게 소리치는 게 귓등으로 스쳐 지나갔다. 나는 물동이를 든 채 바닥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그래, 데려와도 죽을 거라는 걸 알아. 하지만 나는 그래도 구하고 싶었다. 아니, 정확히는 아무것도 못한 채 무력하게 있고 싶지 않았다.

물동이의 물을 전부 불타는 남자에게 붓자 불은 순식간에 꺼졌다. 하지만 건물의 불이 번지고 있었기에 빠르게 남자를 묶은 밧줄을 잘라 데리고 내려와야 했다. 이건 어렵지 않았지만 그를 살리는 건 불가능할 거 같았다. 냄새가 지독했다. 고깃덩어리가 불탄 냄새. 이미 사람이 아닌 것으로 바뀐 냄새가 났다.

“비켜요!”

어떤 여자가 비명을 지르며 내게서 남자를 빼앗아 갔다. 그녀의 손에서 빛이 흘러나와서 그녀가 치료사라는 걸 알았다. 누군지는 몰라도 대단한 능력자였다. 분명 숨이 넘어갈 사람이었는데 남자의 화상이 나아 가고 있었다. 그리고.

컥!

남자가 숨을 토해 냈다. 커어어억. 남자가 마치 늪 바닥에서 돌아와 진흙을 토하는 것처럼 숨을 계속 토해 냈다. 살아 돌아온 자인데 왜 당장이라도 죽을 것처럼 숨을 쉬는 걸까, 싶을 정도로 갈급한 숨이었다.

그러나 그는 살았다.

내 손을 내려다보았다. 내 손은 피와 고름, 진물, 그리고 검댕으로 엉망이었다. 살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 못 했다. 그러나 살렸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아, 그래. 고개를 돌리니 날이 밝아 오는 중이었다. 여명이 흐릿하게 밝아 오는 걸 보며 생각했다.

그래, 사람을 살리고 싶었어.

사람을, 죽이고 싶지 않았다.

검으로 사람을 살린다는 건 무모한 소리 같았다. 그러나 나는 살리고 싶었다. 나는 한 번도 사람을 죽이고 싶어서 죽인 적이 없었다.

무엇을 해야 할까, 생각했었지.

이든, 너는 말했었다. 나에게 하고 싶은 걸 하라고. 이제 내가 하고 싶은 게 뭔지 하나는 알 것만 같다.

“당신이 사람을 살렸어요.”

치료사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나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이 빛나고 있었다. 아, 치료사들이 다 이런 눈인 건 사람을 살리기 때문일까. 라스나티프는 야심이 가득했지만 그녀의 눈도 늘 이렇게 빛났었다.

그동안 내 눈은 어떠하였을까.

나는 나의 눈을 보지 못하니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지금 내 눈은 그 어느 때보다 맑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이든.

“살린 건 당신이지요.”

치료사에게 영광을 돌리고 걸어 나오며 이든을 생각했다. 이든에게 내 모습을 보여 주고 싶었다. 아아, 이제야 깨닫는다. 나는 너에게 나를 보여 주고 싶었다. 너는 언제나 네가 하고 싶은 걸 했지. 너는 언제나 당당하게 달렸다. 네가 하고 싶은 대로 달려 나갔고 그 길은 직선으로 열려 있었다. 나는 내 길이 어딘지도 모르는 채 터벅터벅 걸었지. 그리고 빛나는 너는 나에게 발목을 잡혀 어두컴컴한 새벽에 갇힌 것 같았다.

너는 나에게 무엇이든 원하는 걸 하라는데 나는 내가 원하는 게 뭔지도 모르는 멍청이가 되어 있었다. 그걸 참을 수가 없었다. 너는 나보고 평생을 네 곁에 있으라는데 나는 네 옆에서 어떤 역할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그 모든 걸 참을 수가 없어서 도망쳤다.

그래, 그건 도망이었다.

하지만 때로는 도망을 가는 것 또한 가야 할, 들러야 할, 어느 장소였는지도 모른다.

돌아가야겠다.

내가 그렇게 생각했을 때였다. 오스틴이 내 앞에 서 있었다. 얼굴이 하얗게 질린 상태로.

“도와주십시오, 각하.”

그는 완전히 겁에 질려 있었다.

매달려 있었던 남자는 오스틴의 ‘동료’였다. 그러면서 내가 알게 된 건.

“아하, 그러니까 관리가 아니셨군.”

내 비웃는 어조에 오스틴이 “속이려는 건 아니었습니다.”라며 중얼거렸다. 내 비꼬는 말에 제대로 대답할 수 없을 정도로 오스틴이 두려워할 만했기에 길게 말하지 않았다.

“너는 현상금 사냥꾼이고 저 남자는 네가 고용한 사람이란 말이지?”

“그렇습니다.”

“한마디로 저 자리에서 불타야 했을 사람은, 너다?”

오스틴이 불안한 얼굴로 입술을 깨물었다. 입술을 짓씹으며 그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몸을 피하는 건 여전히 일류시군.”

“이 정도로 심각한 일일 줄은 몰랐습니다.”

“이 정도로 심각하다는 건?”

“저를 찾아온 사람들은 분명히….”

오스틴의 말에 따르면 자신을 찾아온 사람들은 길드에 소속되었다고 했다. 즉, 이 도시, ‘하라’의 위병 임무를 맡고 있는 모험가들이었다. 그들의 눈을 피해서 하라에서 움직인다는 건 아주 어려운 일이었고 오스틴의 목숨은 곧 끝장날 판이었다. 하라를 벗어나려면 반드시 성문을 나서야 하는데 그때 오스틴은 끌려갈 것이다.

그러니 그는 지금 덫에 걸린 쥐와 같은 신세가 된 셈이었다.

“왜 저렇게 보란 듯이 불태웠을까.”

이해가 안 되어 묻자 오스틴이 사실은, 하고 입을 열었다.

“이 유괴 사건은 몇 년째 계속되었습니다. 그동안 유괴되었다 돌아온 귀족 자제들은 많은 고통을 받았습니다. 손가락이 잘린 분도 계시고, 아예 집 밖으로 못 나가게 된 분도 계시죠. 그중에는 당연히 가문의 후계자였던 분도 계시고요. 그러니 각 가문에서는 현상금을 걸었고 현상금 사냥꾼들이 이 일에 끼어들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정보가 오가게 되었는데…. 이 일이 정말 이상한 건, 어떤 길드도 이 큰 현상금 건에 참여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어느 도시의 길드도 이 일에 끼어들고 싶어 하지 않아요.”

“그렇다는 건 이 일이 어느 길드를 주축으로 벌어지고 있다?”

“그럴 가능성이 있습니다. 길드들끼리는 서로의 사업에 참견하지 않는 게 불문율이니까요.”

“그럼 하라의 길드가 유괴 사건의 배경이다?”

“최소한 관련되어 있다는 거죠.”

최소한 관련되어 있다.

길드가 관련되어 있으면 복잡할 텐데. 길드는 건드리기 어렵다. 그들은 자생하고 또 그들만의 룰을 가지고 있다. 게다가 각 도시의 길드들이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때문에 건드리려면 한 번에 끌어내야 하고, 그러려면 국가 규모의 권력이 필요하며…. 그렇지.

국가 규모의 권력.

나는 그걸 가지고 있는 사람을 안다.

이든, 너는 내게 무엇이든 하고 싶은 걸 하라고 했지. 나는 결정했다.

“돌아가야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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