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경배의 꽃-85화 (84/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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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이는 소매치기야.”

내가 내 지갑을 꺼내 보이자 남자들의 시선이 어, 하고 아이에게로 움직였다. 아이의 옷차림은 아주 전형적이었다. 빈민가 아이답게 후줄근한 옷에 걸쳐 입은 로브. 도망치기에 최적화된 모습이다. 도망치다가 여차하면 로브를 벗어 던지고 인파 속에 섞이기 위함이다. 게다가 마침 로브에 달린 모자를 눌러쓰고 있어 얼굴도 가려진 상태였다.

“아니에요! 이 아줌마가 갑자기!”

“너 같은 걸 팔아서 돈이 되면 얼마나 된다고.”

내가 코웃음을 치며 산드라의 갈기를 어루만지자 산드라가 히이잉, 하고 울었다. 산드라가 무척 값나가는 명마라는 걸 대충 알아본 사람들이 설마, 하는 얼굴로 아이를 바라보았다.

“납치범 새끼, 맞는 거 같은데!”

덩치 큰 사내가 다시 내게 주먹을 내질렀다. 나는 그 주먹을 가볍게 피하며 말했다.

“너야말로 이 소매치기란 한패 같은데?”

다른 사람들은 어느 쪽 말이 맞는 거야, 라는 얼굴인데 이 사내만은 계속 내게 적의를 드러내고 있었다. 게다가 아이랑 눈짓을 서로 주고받는 게 심상치 않아 보여 한마디 하자 그가 “이년이!” 하고 달려들었다.

팔을 내밀어 한 대 맞아 주었다. 퍽, 소리가 나자 그가 혓바닥을 날름거리며 회심의 미소를 지어서 나도 같이 웃어 주었다.

“한 대 맞은 거 보이지? 네가 먼저 쳤다?”

나는 소매를 걷어 맞아서 붉어진 팔을 보여 주고는 남자에게 달려들었다. 오랜만에 사람을 패 볼 생각에 무거웠던 머리가 가벼워졌다.

남자는 오래 맞지 못했다. 덩치가 크다고는 해도 근육보다는 물렁살이었고, 그 큰 덩치를 이용하는 법을 제대로 배운 사람도 아니었다. 그는 덩치가 커서 더 쉽게 잡혔고 더 많이 맞았다. 내가 패기 시작하자 처음에는 욕을 하다가 다음에는 비명을 지르다가 그다음에는 그만하라고 하다가 어느 순간에는 애원을 하기 시작했다.

“아가씨, 그만, 그만하세요! 자, 잘못했습니다! 잘못했어요! 찰리, 저 녀석이 시켰어요!”

흠, 하고 웃으며 아이를 돌아보았다.

“네가 찰리니?”

내 질문에 아이, 찰리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아무래도 꽤 상습범인 듯 말 위에서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잡히면 안 된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말에서 떨어지든 말든 말고삐에 피부가 쓸리든 말든 상관하지 않아 했다. 그 얼굴에는 낭패보다는 공포가 더 크게 떠올라 있었다.

“찰리, 그만해. 피부가 쓸리잖아.”

내가 찰리의 팔을 잡으며 말하자 찰리는 “그럼 놔줘! 시발년아!”라며 욕설을 퍼부었다. 나는 찰리의 푸른 눈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 눈에는 여전히 공포가 가득했다. 나에 대한 공포는 아니었다. 그럼 뭐에 대한 공포일까.

어떡할까. 잠시 고민했지만 소매치기 아이는 공포에 질려 설명할 여유가 없어 보였고 나도 병사를 만나는 건 지금 곤란한 상황이었다. 어쩔 수 없이 말고삐를 풀어 주자 아이가 말에서 뛰어내려 줄행랑을 쳤다. 아아악, 하고 비명인지 뭔지 알 수 없는 소리를 내면서.

무슨 상황이지….

아이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는데 누군가가 다가왔다. 그녀는 몸을 많이 노출한 드레스를 입은 걸로 봐서는 아마 매춘부인 것 같았다.

“고생하시네, 검사님.”

“별말씀을요.”

내가 웃으며 대꾸하자 내 태도가 마음에 들었는지 그녀가 “여관 찾아?”라고 물었다.

“네.”

“저 뒤가 괜찮아. ‘갈매기의 속삭임’.”

“고마워요.”

“여긴 소매치기가 많으니까 주의하고. 아, 납치범도 많아.”

소매치기기도 많고 납치범도 많다고?

도대체 뭐 하는 도시지.

늘 마물의 문제에나 관심이 있었지, 이런 도시 치안에는 관심을 둔 적이 없어서 생각도 못 해 본 문제였다.

소매치기도 많고 납치범도 많은 도시, ‘하라’에 온 첫날의 일이었다.

***

‘갈매기의 속삭임’은 아주 훌륭한 여관이었다. 아마 그 매춘부는 내가 돈이 많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실제로 나는 돈이 많았지만 굳이 이런 곳에 머무를 필요가 있을까 생각했다. 이런 데에 돈을 낭비하기에 나는 노숙에도 익숙한 몸이었고 대충 목욕물만 구할 수 있다면 어디라도 상관없었다. 하지만 들어가자마자 조금 생각이 바뀌었다. 일단 술집 안에서 피우는 연초의 질이 아주 훌륭해 보였다. 대체로 저런 물건들은 다 여관에서 자체적으로 제조하는 것이니 좋은 연초를 구할 수 있을 듯했다. 그리고 둘째로는 음유 시인의 노래가 매우 듣기 좋았다. 이런 노래를 들으며 잔다면 잠이 잘 올 것 같았다.

그리고 셋째로는 슬쩍 지나가면서 보기에 테이블의 음식도 괜찮았다. 이 정도면 훌륭하지, 라고 생각하며 여주인이 안내해 주는 대로 따라가고 있을 때였다.

“아무래도… 아무래도 이거, 귀한 분 같은데?”

처음에는 내게 하는 말인 줄 몰랐다.

“이것 보세요, 아가씨. 검사님. 아, 진짜. 좀.”

누군가가 내 손목을 잡아당겼다. 그 순간 나도 모르게 움직였다. 잡아당기는 쪽으로 몸을 내주다가 힘이 빠졌을 때 바로 상대를 내 쪽으로 끌어당겼다. 순식간에 거대한 몸이 내 머리 위를 날았다. 응? 이렇게까지 힘을 준 거 같진 않은데. 내가 의아하게 생각했을 때 거구의 남자가 훌륭한 낙법으로 바닥에 가볍게 착지하더니 내게 씩 웃어 보였다.

“오랜만입니다.”

처음에는 누군지 알아보지 못했다. 가만히 그 얼굴을 보고 있자니 남자가 자신의 긴 머리를 양손으로 묶어 짧게 해 보였다. 그제야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아아, 내가 아는 척을 해 보이자 그가 장난기 어린 웃음을 지으며 내게 손을 내밀었다.

“아무래도 분위기를 보아하니 이렇게 인사를 드리는 게 맞는 거 같습니다.”

공작에게 할 인사는 아니지만 내가 호위를 아무도 데리고 있지 않은 걸 보고 뭔가 사연이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고마워.”

솔직하게 인사하자 그가 웃어 보였다.

그는 한때 하스트레드였으나 하스트레드를 이탈한 많은 기사들이 그랬듯 관리가 된 자였다. 처음에는 앞선 이들의 길을 따라 근위 기사가 되었던 것 같은데 지금 여기에 있는 걸로 보았을 때 다른 일을 하는 게 거의 확실했다.

“오스틴.”

내가 그의 이름을 부르자 그가 “이름도 기억해 주시고.”라며 눈웃음을 쳤다. 그 눈웃음을 보자마자 오스틴이라는 사람에 대해 여러 가지 생각이 났다. 가장 처음에 떠오른 기억은 그가 아주 유능한 사람이었다는 것이고, 그다음으로 든 생각은.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좀 앉으시죠.”

그가 사교성이 좋은 반면 수단을 가리지 않는 인간이었다는 것이다. 아아, 별로 안 좋은 일에 휘말릴 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

“나는 이딴 걸 인연으로 안 쳐서.”

재빨리 그에게서 벗어나 내 방으로 가려 했지만 그가 에이, 하고 내 앞을 막아섰다. 그러더니 여주인에게서 내 방의 열쇠를 빼앗아 들었다. 휘익. 휘파람을 분 그가 “좋은 방에 묵으시네요.”라고 말을 걸었다. 내가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보내자 하하, 넉살 좋게 웃었다.

“맞아요, 어떤 방인지 잘 모릅니다.”

흥, 내가 코웃음 치자 그가 자신의 맞은편 빈자리를 권하며 말했다.

“하지만 당신이 어떤 분인지는 알죠.”

“…….”

“상의드릴 것이 있어서 그러니 앉아 주십시오.”

하아, 내가 한숨을 쉬며 앉자 그는 남자다운 웃음을 지으며 여주인에게 술과 안주를 더 주문하는 방식으로 여주인을 쫓아냈다. 그녀가 자리를 떠야 하나 말아야 하나 애매한 얼굴로 나를 한 번 바라보아서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가셔도 된다는 내 제스처에 여주인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가 버렸다. 오스틴의 방식이 막무가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그렇긴 하지. 맞은편 자리에 앉아 오스틴의 안주인 소시지를 빼앗아 먹으며 생각하는데 오스틴이 말했다.

“단도직입적으로 여쭈죠. 소문 듣고 오신 겁니까?”

“무슨 소문?”

오스틴이 주변을 한 번 둘러보더니 고개를 낮춰 내게 속삭이듯 말했다.

“납치 말입니다.”

오스틴의 말에 따르면 이 도시 ‘하라’ 주변 마을에는 몇 년 전부터 납치가 줄을 이었다. 그러다 범행이 뚝 끊겼다. 납치범은 잡지 못했지만 일단 연속되던 범죄 행각이 멎자 다들 안심하는 분위기가 되었다. 하지만 관리인 오스틴이 이곳에 온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아이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오스틴이 내 쪽으로 소시지 그릇을 밀어 주면서 말했다.

“빈민가 아이들이 말이죠. 엄청난 숫자로 늘어나고 있는 겁니다.”

“빈민가 아이들?”

“주로 항구를 중심으로 증식하고 있는데 지금 관리들이 조사를 나온 상태입니다. 저도 마찬가지고요. 한동안 하라를 보고 있는데 정말 이상합니다.”

아까 만났던 소매치기 아이가 떠올랐다. 아이는 날쌨고 강단도 있었지만 그보다 더 신경 쓰이는 건 아이의 옆에 있던 어른의 존재였다. 그는 아이가 붙잡히자마자 개입했다. 그건 개입이었을까, 아니면 감시였을까. 아까는 아이가 그냥 소매치기라고 생각했는데, 주변에서는 그런 아이를 보는 게 일상적인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납치범에 대해서도 상당히 다들 익숙한 것처럼 보였고.

“주로 어떤 아이들이 납치당하지?”

“대중없어요. 귀족 가문 자제부터 빈민가 아이들까지 모두 다 해당됩니다.”

“하지만 귀족 가문 아이들은 당연히….”

“유괴죠. 돈을 받고 돌려줍니다.”

그렇겠지. 하지만 평민 아이들이나 그 외의 아이들은 다른 ‘용도’로 납치한 걸 것이다. ‘소매치기’와 연관이 있을까, 없을까. ‘소매치기’만 연관이 있을까.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안 좋은 예감이 많이 들었다. 아무래도 아이들을 납치한 자들은 매우 그 집단이 크고 조직적일 것으로 예상되고 심지어 법망을 피해 납치한 아이들을 돈벌이 수단으로 이용하는 악질로 보였다.

오스틴은 “도와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로 이야기를 끝맺었고 나는 그 말을 듣는 순간 픽 웃었다. 오스틴이 제멋대로, 저 좋을 대로만 이야기했다는 게 너무나 훤했기 때문이다. 분명 어느 부분은 감췄고 어느 부분은 거짓인 이야기일 텐데. 하지만 진실과 거짓을 교묘하게 섞어서 말하는 것이 오스틴의 방식이었다. 어느 부분을 ‘오해’하게 만든 것이려나. 내가 머릿속으로 이야기를 복기하고 있을 때 오스틴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일 다시 올게요. 아침이나 같이 드시죠.”

방으로 올라와서 목욕물에 몸을 담그고 꽤 오랫동안 생각했다. 아이들의 납치. 그 배후. 아이들은 어디서 뭘 하는가. 소매치기 아이. 그런 생각을 하며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다 문득 웃었다. 옌선에 가야 하는데 가지도 않고 하라에 와서 납치범 운운하는 소리를 듣고 있는 지금이 너무나 비현실적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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