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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배의 꽃-84화 (83/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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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엄마는 안 죽어!”

폴은 소피가 결코 죽지 않는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는 듯했다.

“결과가 뭐야? 근위대장? 백작? 엄마는 언제나 좋은 것만 갖는다고!”

폴의 이 유구한 열등감을 내가 어찌할 도리는 없기 때문에 나는 그저 어깨를 으쓱이고 말았다. 하지만 보기 좋지는 않아서 한마디 해 주었다.

“소피는 죽어. 언젠가는 반드시 죽어.”

“…….”

“그때 후회할 소리 같은 건 그만해, 폴.”

소피가 하스트레드를 떠나왔다고 했을 때의 표정을 기억했다. 그녀는 심장이 찔린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소중했겠지. 하스트레드가 그녀에게 얼마나 큰 긍지였을지 안다. 하지만 그녀는 하스트레드를 놓았다. 폴은 그녀가 정치적인 계산 때문에 그랬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지만 소피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는 내가 아는 누구보다도 순수하게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여신의 총애를 받는 것일 뿐이었다.

나는 소피가 여신의 총애를 받는 게 보기 좋았다. 순수하게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이 신의 총애를 받는 건 좋은 일이니까.

“나는 궁에 있을 거야. 뭐라도 좋아. 허드렛일이라도 좋으니까 여기 있어야겠어. 궁이 얼마나 위험한 곳인데 널 혼자 둬. 너는 사람이랑 잘 지내지도 못하잖아. 나를 옆에 둬. 나는 누구한테나 웃을 수 있어. 누구한테나 손바닥을 비벼서 그 사람의 호의를 살 수 있어. 그러니까 내가 옆에 있을게. 너 대신에 내가 더러운 꼴을 다 볼 테니까.”

널 혼자 둘 수는 없어.

나를 혼자 둘 수 없다는 폴의 말에 감동했다. 하지만 폴, 넌 너무 어려. 넌 나와 동갑이지만 어딘가에 쓰이기에 넌 너무 어려서 쓸 데가 없는데. 폴은 정치적인 욕심도 있고 어머니 소피에 대한 열등감 때문에 크고 싶어 하는 욕구는 더 강했다. 그런데도 그 순간엔 그는 오직 나를 위해 말하고 있었다. 그게 얼마나 어려운 건지 나는 잘 알고 있었다.

그래.

나는 결국 알겠다고 말하며 그를 끌어안았다. ‘네가 어디에 있어야 할지 한번 자리를 알아보자.’ 내가 그렇게 말하자 폴이 어떤 더러운 자리든, 허드렛일을 하는 자리든 상관없다고 다시 한번 강조했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힘을 다해 그를 끌어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로즈메리와 테인이 돌아왔다.

로즈메리는 나를 보자마자 울음을 터뜨리며 달려와 내게 안겼다. 흐어엉. 그녀가 내 옷자락을 붙잡고 울어서 나는 그녀를 안은 채 도닥거렸다. 사람들이 그녀가 무례하다고, 예의를 모른다고 수군거리는 게 들렸지만 우리 둘 다 상관하지 않았다.

테인이 멀리서 걸어오는 게 보였다. 그는 일그러진 웃음을 짓고 있었다. 울 것 같기도, 기뻐 미칠 것 같기도 한 그런 얼굴이었다. 그는 천천히 걸어오다가 아, 하고 멈춰 섰다. 신이여. 그가 중얼거리는 게 보였다.

테인은 내게 오다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는 거 같았다. 천천히 걸어온 그에게 내가 한 팔을 벌려 주자 그는 로즈메리 뒤에서 조심스럽게 그녀와 같이 나를 껴안았다.

“저는 전하께서.”

테인의 목소리가 좀 잠겨 있었다. 그는 흠, 흠, 하고 목소리를 가다듬은 뒤 고개를 숙였다.

“저는 전하께서 승리하실 거라 믿었습니다.”

그의 등을 도닥여 주는데 그가 내 손목을 잡았다. 그리고 고개를 들었다. 테인의 잘생긴 얼굴에 눈물이 가득했다.

“못 본 척밖에 해 드릴 수 없었지만… 저는 반드시 전하가 승리하는 날이 올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광영이 함께하시리라고….”

나는 그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라스나티프는 여러 수단을 이용해서 내 저택을 드나들었고 나는 그녀가 철두철미하게 움직였다고 생각해 왔다. 하지만 사실 테인은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테인의 말에 로즈메리가 내 품으로 파고들었다. 그리고 나를 꽉 끌어안았다. 그제야 알 수 있었다. 로즈메리도 알고 있었다는 것을.

내가 나의 것을 되돌려받을 수 있도록 그들은 실리에게 아무 말도 전하지 않았다. 나와의 우정을 위해서.

아니, 어쩌면 뒤에서 나를 도왔을지도 모르지. 내가 실수했을 때 그들이 나를 도와 어떤 일들을 조심스럽게 마무리 지었을 수도 있다. 내 친구들은 언제나 나를 생각해 주었으니까.

이런 우정을 받을 가치가 나에게 있던가.

로즈메리와 테인을 끌어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나는 실리만을 원했으나 신은 내게 그보다 더 많은 것을 선사했다. 내게는 더 많은 것이 있었다. 그러니까.

리, 너도 돌아오겠지.

나를 가장 사랑하는 사람은 너니까.

이렇게 많은 이들이 나를 걱정하고 내 곁에 돌아오니 너도 어느 날인가 돌아오겠지. 어느 맑은 날, 혹은 궂은 날에 너의 애마 산드라를 타고 돌아오겠지. 나는 기다리면 되는 거겠지. 너를 믿고, 이번에야말로 너를 믿고.

“잘 돌아왔어.”

테인과 로즈메리를 안은 채 눈을 감았다. 고마운 친구들을 끌어안고 실리를 생각한다. 실리가 떠난 후 남겨진 내가 혼자가 아니라는 것에 감사한다. 정말 혼자였다면 버틸 수 없을 테니까. 하지만 실리, 좋은 사람들이 아무리 많이 곁에 있어도 미아는 미아일 뿐이야. 길을 잃은 건 마찬가지야. 네가 오지 않는 한 나는 길을 잃은 미아처럼 멍하게 세상을 두리번거릴 수밖에 없어. 마음이 매일매일 무너져 내려서 주워 담을 수가 없어.

“잘 돌아왔어….”

너는 도대체 어디에 있을까.

모두가 돌아오는데, 너는 도대체 어디에. 떠났던 사람들이 하나둘 내게 돌아올수록 두려워진다. 마치 이제 돌아올 사람은 다 돌아온 것만 같아서, 너는 돌아오지 않을 것만 같아서. 매일 부정적인 생각들과 싸워 나가지. 악마의 속삭임에게 힘껏 저항하지. 나를 이렇게 두지 마.

눈을 감고 로즈메리와 테인의 사이 어딘가에 얼굴을 묻었다. 너무 힘들었다. 그들의 사이에서 무너지고 싶었다. 그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열네 번째 뒷장. 여행

갈림길에서 내가 왜 옌선이 아닌 방향으로 고삐를 꺾었는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너는 너 하고 싶은 걸 해.”

그래, 너는 그렇게 말했지.

하스트레드는 내 인생에서 사라져 버렸다. 공작 작위도 곧 박탈당할 것이다. 그건 ‘하스트레드’ 공작 작위니까. 왕비가 되는 건가. 나는 왕비가 되고 싶었던가. 아니, 그랬던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누군가의 곁에서 그의 배우자로서 뭔가를 이루고 싶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나는 나로서 살고 싶었다. 그래, 왕비보다는 하스트레드가 더 적성에 맞았지.

하지만 하스트레드로 살고 싶었냐면 또 그건 아니라서.

뭘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그런데 옌선에 가면 그 아름다운 얼굴이 내게 물을 것만 같았다. ‘무엇을 하고 싶어?’ 소원을 이루어 주는 정령 같은 미모를 가지고서 내게 묻겠지. 그건 아주 엄중한 질문이다. 무엇이 하고 싶은가. 나는 무엇을 원하는가. 나 자신을 직시해 본 적도 없는데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어떻게 알지. 하지만 그는 나를 위해 이 모든 걸 이루어 낸 것처럼 말했다. 나는 그에게 대답을 해 줘야 할 것이다.

그런데 내게는 줄 대답이 없다.

백지였다. 이렇게 백지 같은 상태에서 이든에게 달려갈 생각을 하니 너무 막막했다. 무엇을 하고 싶지? 무엇을 해야 하지? 이제,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지? 내게 인생은 정해져 있는 길로 달려가면 되는 것이었는데 길이 사라졌다. 어디로 달려야 하는가. 사막과 같은 인생. 잘못 달리면 그냥 죽어 버리는 것일까. 목이 마른 채로 바싹 말라붙어 미라가 되는 걸까.

결국 나는 갈림길에서 옌선을 선택하지 못한 채 반대 방향으로 달렸다. 그 끝이 항구 도시라는 건 조금 뒤에 알았다. 바다가 아름답지는 않았으나 배들이 줄지어 정박해 있는 풍경은 장관이었다.

말을 타고 달리기에는 사람이 너무 많은 곳이었다. 사람들은 다들 바빠 보였다. 바다 쪽에서는 뱃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시시껄렁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고 건물이 늘어선 도시 안쪽으로 들어서자 매춘부들도 보였다. 술집도 보였고 여관도 보였다. 여관에 묵어야 할까, 생각하며 말에서 뛰어내렸다. 몇 걸음 걷지도 않았는데 어떤 아이가 툭 나를 치고 지나가려 했다.

“죄송해요, 검사님.”

“죄송해야지.”

나는 아이의 뒷덜미를 낚아챘다.

“남의 지갑을 훔치려고 하면 당연히 죄송해야 하는 거지.”

내 말에 아이가 눈을 크게 떴다. 내가 알아챌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얼굴이었다. 아이의 한 손은 가슴 안쪽에 들어가 있었는데 아마 그 손에 내 지갑이 들려 있는 듯했다. 나는 아이를 들어 올렸고 아이는 대롱대롱 매달린 채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검사이지만 여자의 힘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완력에 놀란 모양이었다.

“지갑.”

내가 손을 내밀자 아이가 머리를 흔들었다.

“내 지갑이….”

나는 아이의 이마를 한 대 후려치고는 손에 들린 내 지갑을 빼앗았다. 내 이름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는 가죽 지갑을 보고 어이가 없어서 웃자 아이가 내 눈치를 보더니 슬금슬금 도망가려 했다. 하지만 내가 놓아주지 않은 상태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아, 놔요!”라고 고함을 질러 댔다. 그러더니.

“납치다! 여기, 납치범이다!”

이렇게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기가 차서 아이를 보고 있자니 의외로 삼삼오오 모여 있던 뱃사람들이 내게 몰려들기 시작했다. 분위기가 심상찮았다. 뭐야. 내가 그들을 돌아보는 사이 사람들이 나를 둘러쌌다.

“그 아이를 놔줘.”

가장 덩치가 큰 사내가 나를 위협하며 명령했다.

“납치범이냐?”

다른 사내가 아이에게 물었다. 그러자 아이가 훌쩍이는 척을 하며 “이 아줌마가 절 갑자기 데리고 어딘가로 가려 했어요! 엄마, 엄마!”라고 가증을 떨어 댔다.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웃고 있는데 덩치 큰 사내가 내게 주먹을 내질렀다. 하도 기가 막혀서 아이의 몸으로 막아 버릴 뻔했지만 차마 그러진 못하고 그 주먹을 피하며 고삐로 아이의 손목을 돌려 일단 임시로 묶은 뒤 뒤로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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