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경배의 꽃-83화 (82/94)

83

“호위가 필요한가, 내가?”

내 말에 그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적어도 공작 각하시지 않습니까.”

누군가가 용감하게 말했다. 나는 그냥 웃었다. 내가 하스트레드의 주인이 아닌데 작위가 내 것으로 남게 될까. 내 웃음의 뜻을 알아들었는지 기사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는 입을 달싹거렸다. 뭔가 말하고 싶은 것 같았다. 지금이라도 말을 번복하자고, 하스트레드는 내 것이라고 말하고 싶은 기색이 역력했다.

밤에 여기에 당도했을 때는 사람들이 모두 불신으로 가득한 눈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불신이 아니라 불안이었던 것 같다. 누군가는 정말 나를 못 믿고 있었지만 누군가는 나를 걱정하고 있었다. 픽 웃자 그가 입술을 짓씹었다. 뭐라고 말도 못 하고 미칠 것 같은 얼굴을 하고서. 나는 그에게서 시선을 떼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폭풍 같은 밤이 지나간 아침, 세상이 푸르렀다.

하스트레드의 영광이 오래도록 지속되길.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지만.

“자, 여러분.”

안녕이라는 말을 참 많이 해 보았는데 오늘은 그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이제 안녕이다. 내가 또 하스트레드에 올 수 있을까. 여기에 올 날이 올까. 내가 자란 곳. 나의 고향. 앞으로 타인의 영지가 될 이곳에.

“또 보기를.”

안녕이라는 말을 차마 할 수 없어서 또 보기를 바란다고 하고 말을 돌렸다. 산드라는 내 마음을 아는 것처럼 길게 울고는 평소보다 느릿하게 움직였다. 산드라. 내가 나지막이 그 이름을 부르자 내 말이 결국 빠르게 달리기 시작했다.

안녕, 하스트레드.

작별은 아주… 간단했다. 서글플 정도로.

열세 번째 뒷장. 미아

하스트레드에서 전령이 왔고 실리가 명분을 만들어 둔 덕분에 하스트레드의 기사들은 반역 모의에서 빠질 수 있었다. 그렇게 모든 일이 잘 돌아가는 듯했지만 실은 그렇지가 않았다. 감옥에서 나오자마자 모두가 “전령이 왔는데 각하께서 돌아오시지 않으셨다고요?”라고 눈을 크게 떴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자유의 몸이 된 것보다 실리가 돌아오지 않은 것에 더 놀란 듯했다. 내가 소피를 바라보자 소피가 나에게 조심스럽게 “괜찮으실 겁니다.”라고 나를 달래려 했다. 하지만 그 눈에는 불안감이 가득했다. 그녀가 나를 달래는 건 단지 실리가 죽을 뻔했을 때 내가 같이 죽으려고 했던 그 과거 때문이라는 걸 뻔히 알 수 있었다.

전령보다 빨리 돌아와야 했던 거였구나.

보고를 받아 본 결과 실리는 늘 빠르게 움직였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그녀는 이동할 때 속도를 적당히 내는 법이 없었다. 이유가 있지 않는 한 그녀는 늘 전속력으로 달렸다. 그녀를 따라올 수 없는 이들은 뒤처졌기에 하스트레드는 점점 더 빠르게 달릴 수 있게 되었다. 자신들의 주인을 쫓아가지 못하는 게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실리는 말 위에서 먹고 마시며 달리는 데 아주 능한 사람이었고 자신의 주인이 그렇다 보니 하스트레드는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하스트레드를 그렇게 만든 장본인, 실리가 전령보다 늦는다는 말에 감옥에서 나온 사람들이 바로 말을 탈 기세였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건….”

전령의 말에 따르면 그녀는 홀로 하스트레드를 벗어났다고 한다. 홀로. 어떻게 그게 가능할 수가 있지? 그녀는 공작이고 왕비가 될 사람이다. 그런데 어떻게 그녀를 혼자 보낼 수가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정작 사람들은 그 부분은 이해하는 얼굴이었다. 내가 눈살을 찌푸리자 “전하.”라고 시종장이 나를 달래듯 속삭였다.

“그분은 성검사잖습니까. 누가 그분을 해할 수 있겠습니까… 드래곤도 잡은 분인데.”

시종장이 말했다.

하지만 그녀는 마음이 약해. 하스트레드에 평생을 바친 사람이지. 나는 아직도 그 순간을 기억한다. 그녀가 웃던 그 순간. 검을 놓아 버리던 손. “미안해.”라고 말하던 입술. 그리고 우리는 결국 그때에 대해 아무 말도 못 했다. 그 일은 우리 사이에선 금구처럼 되어 버렸다.

하스트레드와 헤어진 그녀가 어떤 상처를 받고 어떤 결정을 내렸을지 알 수가 없다.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어디에 머물고 있는지. 하지만 그녀는 한 번도 나를 걱정시킨 적이 없었는데. 그녀는 단 한 번도 말없이 어딘가를….

“전하.”

시종 하나가 뛰어 들어왔다. 일그러진 얼굴에서 나쁜 예감을 읽었다. 시종이 들고 있는 전보를 가만히 보고 있지나 시종장이 시종에게서 그 전보를 빼앗아 들어 확인을 하고는 나를 바라보았다. 그 눈에 염려가 가득한 걸 보니 누가 보낸 전보인지 알 것 같았다.

그래, 그녀는 단 한 번도 말없이 어딘가를 가 본 적이 없었지. 그녀는 언제나 떠난다는 이야기를 해 주는 사람이었다.

“하스트레드 공작인가.”

내 질문에 시종장이 눈을 잠시 감았다 떴다. 나에게 전보에 적힌 내용을 보고하는 게 아찔한 것처럼. 그러나 그는 자신의 의무를 벗어나지 않았다. 이윽고 그가 내게 전보를 가져와 보여 주었다.

마법 전보를 쓴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가능하다면 그녀는 전보가 내게 곧장 전달되길 바랐겠지. 하지만 나는 왕이고 이 전보는 여러 절차를 거쳐 여기까지 올 수밖에 없었다. 그녀도 그 사실을 알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빨리 당도할 수 있는 마법 전보를 사용했을 것이다.

여행을 좀 다녀올게요.

그녀는 알고 있을까.

그녀는 내게 긴 서신을 준 적이 거의 없었다. 대부분 한두 줄 적힌 게 고작이었다. 그녀는 무엇을 하겠다고만 간단히 밝혔을 뿐 내게 무엇을 하라고 말해 준 적이 없었다. 기다리라고, 쫓아오라고, 그런 말은 일절 없는 한마디. 나는 언제나 그게 서운했음을 그녀가 알 수 있을까.

내가 언제나 불안했음을 그녀는 아마 상상도 못 하겠지.

전보를 접었다. 반으로 접고, 또 반으로 접고, 또 반으로 접고…. 더 이상 접을 수 없을 정도로 작게 접은 다음에야 주먹으로 움켜쥐었다. 버리고 싶은데 버릴 수가 없다. 그녀가 보낸 것들을 나는 버려 본 적이 없었다. 무엇이든 소중했다. 그녀는 내게 뭔가를 잘 남기는 사람이 아니었다. 돈은 잘 쓰면서, 내게 많은 것을 베풀면서, 정작 자신에 대한 건 거의 남기지 않았다. 나는 탐욕스럽게 그녀에 대한 것들을 모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거의 주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는 ‘다녀온다’고 적었다. 그렇다는 건 돌아온다는 이야기겠지. 그래, 그렇겠지.

나는 버려진 게 아니다. 그녀는 잠시 여행을 떠났을 뿐이다. 인생의 모든 것이 바뀐 그녀가 내릴 만한 결정이었다. 아는데도 왜 이렇게 가슴에 스산한 바람이 불까.

왜 이토록 버려진 기분이 들까.

미로에 버려진 아이가 된 기분이 들었다.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가 없다. 어느 곳에도 길이 없다. 모두 닫혔다. 여기 왜 들어왔지, 생각하고 웃었다. 아, 그래, 여기 들어온 건 내가 원해서였지. 이곳의 문을 닫은 것도 나였지. 왕이 된 건 나였고 왕궁에 갇힌 것도 나이며, 이제 나는 여기서 그녀를 기다릴 수밖에 없다.

믿을 수밖에 없다.

한 번, 그녀를 믿지 못했던 나에게 내리는 벌처럼 느껴져 웃음이 났다. 그녀는 내게 벌조차 내리지 않는데 나는 이걸 벌이라고 우기며 그녀가 나에게 벌을 주었다고, 벌이나마 내게 내린 것이라고 생각하고 싶어 한다. 벌이라도 좋아. 내게 뭐든지 줘 봐. 그게 어떤 잔인한 거라도 좋으니까.

“모두 나가 보도록 해.”

힘이 빠졌다. 그냥 누워 자고 싶었다. 그녀가 올 때까지 아무 생각도 안 하고 잠든 채 기다렸으면 했다. 하지만 그건 불가능하겠지. 이게 내가 선택한 길이니까.

조금 쉬고 싶어졌다.

***

한 달이 지나도 실리는 돌아오지 않았다.

사람들은 내가 결혼을 하여 왕비를 들여야 한다고 떠들어 댔다. 후계자가 필요하다고 수군거렸다. 정당한 후계자. 정통성을 그대로 물려받은 후계자에 대해, 내 앞에서는 차마 말을 못 하고 뒤에서 이야기했다. 그들은 마치 내게 아내가 없는 것처럼 굴었다.

대관식을 치르지 못한 것이 나의 실수였다. 하스트레드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대관식을 조금 미루어 달라는 실리의 말을 들어주지 말 걸 그랬다. 대관식을 치르면 그 즉시 반역자들의 처형이 이루어지게 되고, 그 전에 실리는 하스트레드의 정치적 입장을 바꿔 놓아야 했다. 그녀는 수단을 가리지 않고 원로회의 지지를 얻어 냈다. 엄청난 재산을 탕진해서 혹은 그 이상의 대가를 지불하고서 그녀는 하스트레드의 자유를 지켜 냈다. 그리고 내게도 대관식을 계속 미루게 했다. 그녀는 그걸 위해서라면 뭐든 할 기세였다.

“찾아볼까요?”

소피아는 하스트레드에서 나와 나의 근위대장이 되었다. 사람들은 소피아를 두고 어떻게 저렇게까지 출세를 잘할 수 있는지 의아할 지경이라고 혀를 내두르고는 했지만 정작 그녀는 정치에 대해 일절 관심이 없는 사람이다. 그저 자식을 걱정하고 제자였던 나를 염려하는 사람일 뿐이다.

실리가 내 벼락의 창에 찔렸을 때, 그리고 내가 자살하려고 했을 때 그녀는 하스트레드를 나와 나를 보호해야겠다고 결심했던 것 같다. 그때 그녀는 무척 놀랐던 모양이었다.

“그때 저는 하스트레드가 아니었어요.”

소피아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 순간에 자신은 나의 편에 서 있었다며, 그건 하스트레드에 대한 심각한 배신이었다고 설명했다. 내가 보기에 하스트레드에서 그 일을 문제 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던 것 같지만 소피아는 하스트레드에 남지 못했다.

그녀는 최근 백작 작위를 받았다. 폴 또한 자작 작위를 받았는데 폴은 왕이 된 나를 보고 울음을 터뜨렸었다. 그는 나에게 예를 갖춰 절을 하면서도 울었다.

“잘못되면 어쩌려고…! 어쩌려고!!”

폴은 내가 이럴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던 것 같다. 그는 어머니에게 더 반발하게 되었다. 친구인 내가 이런 위험한 일을 진행하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어머니가 자신을 영지로 보냈다는 것에 무척이나 분노한 모양이었다. 나는 소피의 편을 들어 주었다. 소피가 더 위험했고 그녀는 반역자로 몰렸으며 여러 날 감옥에 있어야 했다고 말해도 폴은 요지부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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