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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배의 꽃-82화 (81/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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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든 그로스랜이 복위한 시점에 알려 주라던데. 방금 알았거든. 내가 있는 데는 대륙 끄트머리라서.]

그로스랜 왕국이 아니라서 소식이 늦어졌다며 헤르스란이 어깨를 으쓱였다. 기가 막혔다. 내가 아버지의 저주사에 대해 얼마나 많이 조사했는데 그 모든 게 무로 돌아가는 동안 눈곱만치도 존재를 보여 주지 않다가 갑자기 나타나서는 아버지가 자살이라고? 나보고 그걸 믿으라고?

왜 저주사를 계획하셨을까? 그건 알 것 같다. 아버지가 자살을 하면 나에게 엄청난 흠이 된다. 나는 아마 공작위를 잇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니 아버지는 자신의 죽음을 타살로 꾸며야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지금은 괜찮을까. 이든이 왕이 되었으니까. 그래서 이든을 마구간에 숨겨 놓았었구나. 아버지는 내가 이든을 복위시켜 주리라고 예상하신 것이다. 그걸 노리고서 마구간에 이든을 숨기고 모든 제반 사항을 맞춰 놓으신 뒤 자살하셨고. 그 전에 이든 그로스랜이 왕이 되면 내게 사실을 가르쳐 주라고 헤르스란에게 의뢰하셨던 게 분명했다. 내가 평생 아버지의 원수를 찾아다니게 두실 수는 없었으니까. 다 알겠는데 어떻게 헤르스란을 움직인 거지? 이미 인간에서 벗어난, 저 이상한 생물을?

헤르스란은 사라지기 전 나를 한 번 돌아보았다. 그는 계약을 했으니 아버지에게 뭔가 대가를 받았을 것이다. 그 대가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만족스러웠던 듯 그는 내게 이런 심부름을 해 주는 게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이었다. 그러나 떠나기 전 돌아본 내 얼굴이 어떠했는지 그는 처음으로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그는 잠시 보석 구름 앞에서 망설이다가 한마디 중얼거렸다.

[일리드가 말하더군. 자신의 딸은 살인자 따위가 아니라 정의로운 아이이고, 세상이 그걸 알게 될 거라고.]

그리고 헤르스란은 사라져 버렸다.

너는 살인자 따위가 아니라 정의롭고, 세상이 그걸 알게 해 주겠다.

나는 내가 살인자가 된 날을 기억한다. 그날은 열세 살의 어느 날이었다. 아버지는 그날 내게 아무 말도 해 주지 못하셨고 나는 나의 운명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사실 아버지는 그때 내 고통을 이해하고 계셨다. 내가 내 고통을 기억의 호수 가장 아래로 가라앉혔을 때 아버지는 내 고통을 발굴하고 있었다. 내 고통을 치유할 생각이셨다.

‘너는 살인자 따위가 아니야.’

아버지는 그렇게 말씀하셨다.

‘세상이 너를 알게 될 것이다.’

나의 상처는 내 아버지의 상처였다.

울면 안 되는데 눈물이 났다. 아버지가 왜 돌아가셨는지, 왜 자살을 하셔야 했는지 나는 모른다. 막연하게 어쩌면 어머니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할 뿐이다. 두 분은 사이가 좋으셨던 것 같으니까. 하지만 잘은 모르겠다. 아버지는 워낙 괴짜셨으니까 삶을 끝내는 것 또한 당신의 뜻대로 끝내고 싶으셨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아버지는 나를 사랑하셨다. 그분의 방식대로 나를 사랑하셨다.

***

하스트레드에 도착한 건 한밤중이었다.

성의 모든 이들이 나를 마중 나와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눈에는 불신과 불안이 가득했다. 태어난 이래 처음으로 하스트레드 사람들의 불신을 마주한 기분은 아주 기괴했다. 마치 신앙이 나를 배신하는 기분이었다. 하스트레드 기사들이 투옥되었고 나 혼자 왕비의 자리에 올랐으니 그들이 나를 믿지 못한다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걸 머리로는 아는데 마음은 이해하지 못했다.

내가 아등바등 지키려고 했던 것의 실체를 보는 기분이 들어 아주 이상했다. 사람들이 거리를 두고 나를 지켜보는 분위기와 나만 외따로 떨어져 있는 듯한 상황. 모두가 나와 멀찌감치 떨어져 자신들끼리 눈짓을 하고 수군거렸다. 나는 하스트레드의 주인이면서도 주인이 아니었다.

당연한 거지.

그들은 지금 가족이 투옥되었거나 혹은 투옥될 위기에 처했다. 당연히 나에 대한 의심이 깊을 수밖에 없지. 내가 그들을 구하기 위해 달려왔다고 해도 ‘뭐 하다가 지금 왔을까?’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나는 여러 가지를 염두에 둘 수밖에 없었지만 그들이 그걸 이해해 줄 리는 만무했다. 서로 입장이 다른 것이다.

하스트레드의 법정에 사람들이 모였고 나는 원고의 자리에 섰다. 이곳은 재판을 위해서뿐만 아니라 회의를 위해서도 종종 열렸고, 오늘 역시 회의가 목적이었다. 그리고 회의를 연 자는 원고의 자리에 서서 자신의 취지를 설명하고는 했다. 그곳에 서 있으니 왠지 나는 세상은 돌고 돈다는 말이 떠올랐다.

제온 삼촌이 여기에 서지 않았던가. 그는 여기에 서서 원고 자리에 있는 손잡이를 움켜쥐고 있었을 때 어떤 기분이었을까. 나는 이야기를 하기 전 손잡이를 쓸어 보았다. 제온 삼촌의 식은땀이 배어 있을 나무 손잡이는 차가웠다.

“하스트레드는 변화해야 한다.”

내 말에 사람들이 다 귀를 기울이며 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눈을 보는 것만으로도 그들의 마음이 얼마나 닫혀 있는지 알 수 있었다. 하아. 한숨을 쉬면 숨이 우는 것처럼 걸려서 나왔다.

나는 이 자리를 얼마나 지키고자 했던가.

하스트레드라는 이름은 내 인생에 얼마나 많은 의미였던가. 그러나 생각해 보면 내가 그걸 원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빼앗기기 싫었던 적은 있었지. 부당했으니까. 하지만 원한 적도 사실은 없었다.

아무것도 원하지 않았어.

무엇을 원해야 하는지, 돌아볼 겨를이 없었다. 생각할 자유도 없었다.

“현재 하스트레드가 반역 모의에 연루되었다는 걸 다들 알 것이다. 우리는 이 반역 모의에서 반드시 빠져나와야 한다. 아니면 우리에겐.”

나는 더 말하지 않았지만 다들 알아들었을 것이다. 우리에겐, 최소한 하스트레드에겐 최악의 결말밖에 없다는 걸. 추락, 파멸. 그런 단어로 표현될 결말이.

“그동안 하스트레드는….”

말을 이어 나가면서 하스트레드의 법정을 바라보았다. 원형 경기장의 축소판. 여기서 많은 사람들의 생사가 결정되었다. 하스트레드의 역사적인 결정들은 모두 이곳에서 이루어졌다. 물론, 장소는 이곳이 아닐 때도 있었다. 기사단이 하스트레드라는 영지를 받아 정착한 지는 얼마 안 되었으니까. 그러나 이 법정은 어디에나 있었다. 떠돌 때도 기사단은 무언가 결정하기 위해 둥글게 모여 앉았다. 이 법정은 어느 곳에서든 존재했다. 하스트레드가 존재하는 한은.

모두가 스쳐 지나간다.

시간이 흐르면 모두가 죽고 또 태어날 것이다. 하스트레드는 계속 존재할까. 아니, 언젠가는 스러지겠지. 그러나 나는 하스트레드를 지킬 소임이 있다. 나는 그것을 위해 태어났다.

하지만 사실 그 소임을 지금 이 순간처럼 강렬하게 느껴 본 적은 없었지.

만남만큼이나 이별도 중요하며.

내가 지키는 대상을 놔줘야 하는 타이밍을 제대로 맞추는 것 또한 나의 소임이다.

“…하여, 나는 선언한다. 하스트레드는 더 이상 사리안 가문의 소유가 아니다.”

사람들이 숨을 죽이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들어 허공을 바라보았다. 유령이라는 게 있다면 아버지가 어디쯤 계실까 생각했다. 아버지는 내게 하스트레드를 물려주길 바라셨다. 하지만 아버지. 사실 저는 하스트레드도 원하지 않았고 후계자도 되길 바라지 않았고 성검사라는 대단한 영예도 필요 없었어요.

그냥 저는 검을 좋아했고.

아마 인형도 가지고 놀고 싶었어요.

그냥 저는 저로 살고 싶었어요.

그래도 아버지, 사랑합니다.

아버지께서 주신 모든 것을 제가 온전하게 이루고 완성했기를 바랍니다.

“하스트레드의 주인 자리는 기사들의 뜻을 모아 선출될 것이며….”

“주군…!”

재판장 자리에 앉아 있던 이가 벌떡 일어났다. 그는 고개를 젓고 있었다. “잠시 이야기 좀.” 하고 말하는 그의 목소리가 떨렸다. 나는 그를 향해 웃어 주었다.

고개를 돌리자 누군가가 한 손으로 제 입을 막고 있는 게 보였다. 그는 하늘이 무너지는 걸 목도한 사람처럼 얼굴이 희게 질려 있었다. 그를 향해 눈을 접어 주고 다시 시선을 돌렸다.

리온이나 크라이스가 하스트레드의 주인 자리에 올랐으면 싶지만 어차피 이젠 내 손을 떠난 일이다. 하스트레드의 사람들이 직접 자신들의 대표를 선택하겠지.

“하스트레드의 역모는 전 계약자인 ‘세실리아 사리안’의 개인 계약으로 치부될 것이다. 이 일이 끝나면 모두 자유의 몸이 될 테니 다들 안심해도 좋아.”

그 순간이었다. 누군가가 고함을 질렀다.

“하스트레드를 버리실 리가 없다고 했잖아!”

그 고함에는 분노와 그 이상의 한이 맺혀 있었다. 주군께서 하스트레드를 버리실 리가 없다고 했잖아! 나와! 나오라고! 여러 목소리가 외쳤다. 사람들 중 반 정도가 화를 냈다. 검을 뽑는 이도 있었다. 그리고 나머지 반이 움찔거리며 뒤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울어 버리는 사람과 주저앉는 사람,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항변하는 사람과 겁에 질린 사람. 그리고 화를 내는 사람과 검에 손을 가져간 사람. 소리 지르는 사람과 아예 입을 다물고 무서운 눈으로 모두를 노려보는 사람. 그들이 완전히 반으로 나눠지려는 순간에 나는 오른손을 뻗었다.

내 피부에서 성검이 뻗어져 나왔다. 이왕이면 창밖에서 부르고 싶었으나 사람들이 모여 있어서 누군가가 다칠까 봐 그럴 수 없었다. 통증을 참으며 성검이 발현되기를 기다려 땅을 박찼다. 마치 구름을 밟는 것처럼 몸이 가벼웠다.

재판장 벽 한가운데 있는 ‘사리안’이라는 명판을 향해 검을 내리꽂았다. 쾅, 하는 소리에 모두가 정신을 차린 것처럼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반으로 쪼개진 명판을 향해 시선을 내렸다.

“새로운 시대가 왔다. 이제 다 그만해.”

내 말에 사람들이 멍하니 나를 바라보았다. 생각보다 후련했다. 떠나보내는 아쉬움보다는 신선한 공기를 들이마시는 것같이 기분이 좋았다.

재판장을 뒤로하고 저벅저벅 걸어 나오면서 생각했다. 어딘가에서 맡아 본 냄새가 난다고. 나는 이 냄새의 이름을 알고 있다. 자유라는 이름이다.

***

나는 더 이상 하스트레드가 아니었기 때문에 영지에 머무를 이유가 없었다. 기사들이 모시겠다며 앞다투어 말하는 걸 거절했다. 데리고 온 사람들은 모두 하스트레드 기사들이었기 때문에 그들이 당황해서 그럼 호위는 누가 하느냐고 물었다. 웃음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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