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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도대체 뭐였어.”
그는 울 것 같았다. 울진 않았지만 우는 것만 같아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가 어느 순간 피곤한 것처럼 눈을 감았다. 그가 쓰러질까 봐 걱정이 되어 조심스럽게 불러 보았다.
“…이드리드 님….”
한참 동안 그는 대답이 없었다. 이윽고 그가 딴소리를 했다.
“그녀의 시신이… 호수에 있어. 가라앉혀 놓았지. 장례를 치러 줘. 왕비로서. 그녀는 그럴 자격이 있어.”
어느 호수에 있다는 건지 모르겠지만 여하간 왕비로서의 국장은 불가능했다. 이미 이드리드는 천륜을 어기고 나라를 어지럽힌 대역죄인이 되었기 때문에 이제 와 그의 부인을 왕비로 대우하는 건 어려웠다. 내가 고개를 저었을 때였다.
“그건 좀 무리일….”
이드리드가 갑자기 눈을 번쩍 떴다. 눈빛이 형형했다.
“난 그 꼬맹이를 죽일 생각이었어. 이렇게까지 될 거라곤 생각도 안 했지만 원래 싹은 도려내는 게 깔끔하잖아. 지금 이 꼴을 봐도 그렇고.”
맞는 말이다. 나도 왜 이드리드가 안 그랬는지가 궁금했다. 죽이는 게 훨씬 나았을 텐데. 익사시키는 게 어렵지도 않았을 텐데. 그때 이드리드가 내 얼굴을 보더니 피식 웃었다. 그리고 내게 정답을 말해 주겠다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갓난쟁이인 이든을 누가 키웠는 줄 알아?”
“……?”
“누가 키웠을 거 같아?”
“…….”
“내가 그 꼬마를 죽이려고 했을 때 누가 자기 목숨을 걸면서 그 꼬마가 죽으면 자기도 죽어 버리겠다고 나한테 소리를 질러 댔을 거 같아?”
“…….”
“마음 주지 말라고 아무리 말해도, 안 그런 척하면서 마음을 홀라당 줘 버렸지. 제 아들인 것처럼, 애도 없으면서….”
이드리드의 말은 두서가 없었지만 내용은 이해할 수 있었다. 나는 죽었다는, 이제는 호수 바닥에 가라앉아 있다는 왕비를 떠올렸다. 늘 화려하고 틈 하나 없어 보이는 사람이었다. 귀부인의 덕목을 모조리 갖추고 있는 사람이었지만 왠지 모르게 그 어떤 것도 즐기는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자수든, 온실 가꾸기든… 그냥 어쩔 수 없이 한다는 이미지가 강했고 언제나 홀로 고고하게 있다는 느낌이었다. 옷차림은 화려한데 말수는 없고 늘 은은하게 웃는 표정을 고수하던 그 사람은 사실 아이를 갖고 싶어 하는 여성이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자신의 손에 들어왔던 아주 어린 조카를 자신의 아이라고 생각해 버린, 그렇게 마음을 줘 버린 그런 사람이었던 것 같다.
“나를 어떻게 죽이든 그건 그 애송이 마음인데.”
이드리드가 피식피식 웃었다. 그리고 또 웃음이 뚝 멈췄다.
“제 숙모에게는 예의를 갖추라고 전해. 놈의 어미는 그저 앓다 뒈졌을 뿐이지만 그 숙모는 목숨을 걸고 놈을 구했으니까.”
이드리드의 눈에 핏발이 섰다.
***
그 밤, 달은 아주 밝았다. 기묘할 정도로 가까운 달. 붉게 빛나는 달은 불길함의 상징이었지만 그날 보는 달은 왠지 불길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그저 슬퍼 보일 뿐이었다.
이드리드의 부인, 안나의 시신을 찾아낸 건 신관들이었다. 라스나티프와 그 측근들이 호수를 둘러싸고 신력을 사용해서 오랜 시간을 두고 노래를 한 끝에 천천히 호수의 수면이 일렁이기 시작하는 게 보였을 때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보인다.’ 그래, 그때 나도 보았다. 새하얀 손 하나가 수면 아래에서 흔들리는 것을.
“괜찮으십니까?”
걱정이 되었다. 이든은 생각보다 마음이 약했으니까. 내 걱정에 이든이 나를 내려다보았다. 그는 복잡한 눈을 하고 있었지만 나와 시선이 마주치자 웃을 수 있는 정도의 여유는 가지고 있었다.
“아주 괜찮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그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어깨를 움츠리는 게 자정의 한기에 매몰되는 것처럼 느껴져 그의 어깨를 두른 모피를 다시 한번 잘 여며 주었다. 그러자 그가 웃었다.
“환자는 당신이잖아, 리.”
“다 나았습니다.”
“그래도….”
그가 말을 이으려는 찰나 물보라가 일었다. 우리 둘은 다른 사람들과 같이 고개를 돌렸다.
안나의 시신이 허공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그녀의 시신을 보는 순간 눈살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녀의 목에 감긴 하프 줄 때문이다. 이전의 시종장을 불러 증언을 들은 바에 의하면 안나는 하프 줄을 풀어 그 줄에 목을 매달았다고 했다. 그것도 문손잡이에 목을 매달았다는 말에 순간 아찔해져 눈을 감아야 했다. 문손잡이에 목을 매달았다는 건 한 가지를 의미했다. 그녀는 살 의지가 없었다. 문손잡이에 목을 매단 사람들은 대체로 완전히 죽고자 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발이 닿는 데도 불구하고 죽음을 선택한다. 심지어 하프 줄을 풀어서 제 목을 매달았으면 그 의지는 상상 이상으로 강한 것이리라.
하지만 그 하프 줄을 그대로 목에 감아 놓았을 줄은 몰랐다. 안나의 시신은 왕의 대관식 때 왕비로서 입었던 그 아름다운 드레스를 입고 있었고 품에는 꽃을 한 아름 안고 있었다. 꽃잎은 이미 사라졌지만 꽃대를 보건대 호수에 가라앉을 때는 꽃다발을 안고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었다. 이드리드는 안나에게 예를 다하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그는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안나를 호수 아래로 내려보냈다.
단지 그는 장례를 치르지 않았다. 어쩌면 치를 수 없었던 것일 수도 있다. 안나가 자신이 아닌 이든과 하프에 집착하는 걸 인정할 수 없어서. 어쩌면 정치적 문제였을 수도 있다. 그는 계속 몰리고 있었으니까. 어쨌든 그는 안나를 물속에 가라앉혔다.
안나의 시신이 천천히 허공에서 이동해 뭍으로 움직였다. 그리고 땅에 완전히 안착했을 때 사람들은 이든을 위해 길을 열어 주었다. 이든은 천천히 걸어 자신을 살렸다는 숙모를 내려다보았다. 그 눈에는 불행히도 애정의 편린이 보이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숙모의 애정은 숙모의 것이었을 뿐, 이든은 기억하지 못하는 일이었으니까.
“국장을 치르실 겁니까?”
내 질문에 모두의 기척에 날이 섰다. 다들 그걸 궁금해하고 있었다. 안 된다는 사람과 어쩔까 궁금해하는 사람들로 나뉘었을 뿐이지만. 이든이 국장을 치러 줘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아니.”
이든이 고개를 저었다. 그의 눈길이 안나에게서 거두어졌다.
“하지만 이드리드와 이혼을 시키고 그녀에게 백작 작위를 줘서 장례를 치르도록 하지. 그 정도가 합당한 거 같군.”
“지당하신 말씀입니다.”라고 말한 것은 나와 한때 왕의 편이었던 사람들. 불편한 기색으로 고개를 숙인 것은 라스나티프를 비롯한 반왕파였던 이들. 반왕파였던 이들이 안나의 일에 불편함을 느끼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들은 이든이 복위한 공이 온전히 자신들에게 오기를 바랐는데 완전히 몰락해야 할 전 왕비가 첫 공을 가져간 인물이 되었으니 불만이 가득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의외로 반발이 없다는 건 이든의 왕권이 생각보다 단단하다는 걸 의미했다. 그는 어쨌거나 현재 강력한 왕인 것이다.
“그럼 가지.”
이든이 내 어깨를 안았다. 춥지 않느냐고 묻는 듯한 태도에는 여차하면 자신의 모피를 벗어 줄 것 같은 조급함이 담겨 있었다. 나는 쓰게 웃으며 그의 손등을 도닥였다. 나는 그보다 훨씬 강하고 건강한 몸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사실 찬바람을 잘못 맞으면 며칠을 앓아누워야 할 정도로 몸이 약했다. 그 약한 몸은 아마 평생 그럴 것 같았다. 그리고 그건….
고개를 돌려 멀리 보이는 탑에 시선을 주었다. 그 탑에 투옥되어 있는 남자는 지금 이곳을 보고 있을 거라는 확신이 강하게 들었다. 모든 악연의 문을 연 남자. 그리고 그 모든 끝을 오롯하게 겪어야 했던 사람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
“여백작이라.”
의외의 결론이라는 듯 이드리드는 피식 웃었다. 그는 몇 번이고 여백작이라, 하고 중얼거리더니 “나쁘지 않네.”라고 말했다. 국장을 치러야 한다고 크게 반발할 줄 알았는데 의외였다. 내 얼굴에 감정이 드러났는지 그가 웃었다.
“안나는 결혼하기 싫어했어.”
“…….”
“결혼할 바에는 신관이 되어 라스나티프처럼 강하게 살고 싶다고 했지. 하지만 결혼할 수밖에 없었어. 안나의 아버지가 안나의 머리카락을 자르고 다리를 부러뜨렸으니까. 나와 결혼하는 날 안나는 아무 말도 안 했어. 절망에 빠져서.”
“…….”
“이상한 여자였어. 아무것도 안 좋아했고 딱히 아이를 낳고 싶어 하는 것도 아니었는데, 갑자기 내가 데려온 갓난애에게 마음을 주더군. 아이를 키우면서 웃는 걸 처음 봤지. 정말 이상한 여자. 완벽하게 행동하면서 아무것도 가지지 않던 여자야. 그러다가 그 아이가 죽으려고 하자 자기도 같이 호수에 뛰어들겠다고 하면서 그러더군. 자기는 언제나 이 호수에 뛰어들고 싶었다고. 그 애와 같이 죽는다면 아쉬울 게 없다고. 맙소사, 그게 남편한테 내보인 안나의 첫 진심이었어. …정말 이해가 안 가서 그러는데, 그 여자는 왜 그렇게 나를 싫어했을까?”
나는 안나를 잘 모른다. 그녀에 대해 기억하는 거라고는 그녀가 완벽한 왕비였다는 것뿐이다. 내가 고개를 젓자 이드리드가 웃음을 터뜨렸다. 성마르고 신경질적인 웃음이었다.
“뭘 해 줘도 싫어했지…. 가끔은 때리기도 했어. 너무 답답했거든. 그래도 그녀는 똑같았지. 그냥 나라는 존재가 너무 싫었던 거 같아. 아이를 갖고 싶다고 말하던 그녀가 생각나. 신관들에게 신탁을 받았지. 어떻게 해야 아이를 가질 수 있느냐고. 그러자 신탁이 어이가 없더군. 나는 전생의 죄로 인해 아이를 가질 수 없다는 거야. 그녀가 원하는 건 단 하나인데 그 하나를 나는 해 줄 수 없다는 거지.”
“이드리드 님.”
“줄기차게, 정말 줄기차게 이혼을 원했지. 얼굴에 낙인을 찍어도 좋으니까 이혼만 해 달라더군. 나랑 사느니 얼굴에 낙인이 찍힌 채로 살겠다는 여자를, 그런 여자를….”
이드리드는 더 말하지 않았지만 나는 그 뒷말을 알 것 같았다. 그는 안나를 좋아했다. 사랑했다. 그래서 그는 안나의 절망에 같이 빠져들었다. 안나를 행복하게 해 주고 싶었지만 방법이 없었다. 안나가 원하는 게 단 하나 생겼을 때, 그건 이든의 행복이었고, 그 행복은 이드리드의 삶의 지향점과는 반대되는 것이었다. 그는 안나의 행복을 부수는 걸 선택했다. 다른 무언가가 나타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타나지 않았다. 결국 그는 안나의 절망에 지쳐서 실로리안 하프를 던져 주고 말았다. 행복해하는 그녀의 모습이 너무 보고 싶어서. 그게 너무 목말라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