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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배의 꽃-78화 (77/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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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개를 돌려도 하스트레드 사람은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내가 두리번거리며 누군가를 찾는 것 같자 이든이 재빨리 나를 끌어안아 막았다. 그가 내 귓가에 속삭였다.

“하스트레드 기사들은 모두 무사해. 투옥 중이긴 하지만 고문을 당하거나 한 사람도 없고 당신이 일어나기만을 기다렸어. 그뿐이야.”

하스트레드는 전원 무사하다. 일단은 그것으로 되었다. 살아만 있다면 타협의 여지는 언제나 있다고 배웠으니까. 최악의 경우는 이 나라를 떠나면 그만이라고 생각했을 때였다.

“비전하.”

다시 고개를 돌리자 로드리고 솔루조웨가 또 활짝 웃고 있었다. 이 남자를 평생 봐 왔지만 늘 근엄한 모습만 봤지, 이렇게 활짝 웃는 건 오늘 처음 봤다. 어이가 없어서 빅토리아에게 시선을 주자 빅토리아의 입술이 실룩대고 있었다. 아주 기분 나빠하는 게 분명했다.

“곧 제 아들이 와서 돌봐 드릴 겁니다. 솔루조웨 가문의 명예를 걸고 온전히 회복하실 수 있게 되실 것이오니 염려치 마시옵소서.”

말은 나에게 하는데 시선은 이든을 향하고 있었다. 그 눈빛이 얼마나 열렬하던지 꼬리를 흔드는 강아지 같았다. 그 백발이 성성한 노마법사를 향해 이든이 다정하게 말했다.

“그대의 충정에 감사한다. 모두 물러가라.”

그러자 방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방을 나가기 시작했다. 침대를 둘러싸고 있던 수많은 인물이 나가고 나서야 이 방이 어딘지 보이기 시작했다. 우아한 흰색, 영원의 금색, 그리고 여왕의 붉은색이 어우러져 있는 이곳이 어딘지 나는 알고 있다.

왕비의 침실이다.

이든이 이겼다는 건 나도 쉽사리 추측할 수 있는 일이지만 왕의 편에 섰던 내가 왜 왕비의 침실을 차지하고 있는지는 알기가 어려웠다. 왕은 어떻게 되었는가. 하스트레드는 일단 반대편에 선 죄로 모조리 투옥된 것 같은데 왕은 이미 목이 매달린 건가? 이 침실의 주인은 어디에 있나? 이든이 나를 침대에 다시 눕히며 말했다.

“당신은 엄청나게 고통받았어. 나는 당신을 잃는 줄 알았어. 나뿐만 아니라 모두가 그랬지. 당신이 사지에서 돌아오는 데는 무척 많은 노력이 들어갔고 지금의 당신에게는 휴식이 절대적으로 필요해.”

“…….”

“당신이 궁금해할 것 같은 걸 하나씩 설명해 주자면, 그래. 일단 이드리드 삼촌은 살아 있어. 아직은.”

이드리드 그로스랜, 왕은 이제 다시 왕이 아닌 한 명의 보통 사람이 된 모양이었다. 이드리드 그로스랜. 내가 소리 내지 않고 그 이름을 중얼거리자 이든이 고개를 저었다.

“그는 가문에서 제적당했어. 지금은 그냥 이드리드야.”

“…….”

“그래.”

이든이 웃었다. 요요한 웃음이 한밤중의 시린 달빛처럼 광기 어리게 빛났다.

“그로스랜의 수장은 나고, 내가 그의 이름을 가문에서 지웠어. 숙모도.”

마땅한 일이다.

이든을 죽이려고 했고 그의 자리를 빼앗았다. 이든은 온몸에 고문의 흔적이 낭자하고 고귀한 그를 그렇게 만든 건 왕, 로프넬, 아니 이제 이드리드가 된 그였다. 자신의 자리를 방어하지 못한다면 그는 당연히 이든의 철퇴를 맞아 마땅했다. 그러니 당연한 일이지만 그래도 마음이 좀 씁쓸한 것은 한구석에 남아 있는 의아함 때문이다.

왜 이드리드는 이든을 죽이지 않았을까.

그에게는 이든을 죽일 기회가 몇 번이나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 기회는 줄어들었으나 이든이 어린 시절 그 기회는 꽤 빈번하게 찾아왔을 것이다. 가장 이해가 되지 않는 점은 왜 그가 굳이 이든을 먼 곳에 팔아 버리는 선택을 했느냐는 것이다. 그는 이든을 정말로 익사시켜서 익사체로 호수에 띄울 수도 있었다. 그게 훨씬 쉽고 뒤처리도 간단했을 텐데.

그리고 아직도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어째서 시신도 나오지 않은 왕세자의 죽음을, 선왕은 순순히 인정했을까.

그리고 내 아버지를 죽인 사람은 정말 이드리드일까.

아버지는 왜 이든을 마구간에, 그것도 쓰이지 않는 마구간에 처박아 둔 것이었을까.

“좀 자야 돼, 당신은.”

이든의 커다란 손이 내 눈을 감겼다. 이드리드가 죽기 전에 나는 들어야 할 말이 있는데 이 이야기를 이든에게 어떻게 꺼내야 할까.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아서 간신히 입을 열었다.

“…드, 리드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 습….”

“알아.”

내 목소리는 내 귀로 들어도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였는데 이든은 안다고 대답했다. 그러더니 그는 내 침대로 올라와 나를 자신의 품에 넣었다. 내게 팔베개를 해 주고 내 몸을 도닥이며 속삭였다.

“당신이 원하는 건 무엇이든 할 수 있어. 내가 이제 그렇게 만들어 줄 거야.”

“…….”

“그러니까 자. 당신이 자는 동안, 내가 세상을 멈춰 놓을게.”

다정한 목소리가 내게 자장가 대신 엄청난 다짐을 속삭여 주었다. 그 말을 듣자마자 온몸에서 힘이 빠졌다. 침대 아래에 누군가가 있어서 나를 끌어당기는 기분이 들었다. 저항하려고 해도 소용없었고 저항하고 싶지도 않았다. 순식간에, 나를 끌려들어 갔다. 잠이라는 늪은 아주 깊었다.

***

내 몸은, 아주 비싼 값을 치르고 정상으로 돌아왔다. 글자 그대로 엄청난 돈을 썼단 의미이다. 이든이 얼마나 대단한 값을 치렀을지 상상이 되지 않았다. 나라 안의 모든 치료술 권위자들이 내 옆에 달라붙어서 치료술을 쏟아부어 내 몸을 기어코 벼락의 창을 맞기 전으로 되돌려 놨다.

한때는 왕의 아들, 또 한때는 왕의 동생, 대공, 그리고 왕이었던… 이제는 평민이 된 ‘이드리드’를 만나기 위해 탑으로 걸어 올라가는 건 힘들지 않았다. 하지만 이상한 기분은 들었다. 이든은 아주 잠깐이지만 이 탑에 투옥된 적이 있었다. 세상은 얼마나 요지경인가. 운명은 또 어쩌면 이토록 얄궂은가. 몇 년이 지난 지금, 그들은 완전히 반대의 자리에 있다.

나선형 계단을 오르는 동안 몇 번이나 손바닥만 한 창을 지나쳤다. 창살 너머로 보이는 하늘이 푸르렀다. 아아, 그래. 어느새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되었다. 눈이 무척 많이 왔던 며칠이 지나고 오늘 하늘은 푸르렀다. 코끝에 닿는 공기는 아주 차가웠지만 가슴으로 통하는 바람은 꽤 상쾌했다.

“오랜만입니다.”

내 말에 창살 안쪽에서 눈을 감고 있던 남자가 눈을 떴다. 그는 못 본 사이 노쇠했다. 머리뿐만 아니라 눈썹까지 하얗게 센 남자는 나를 보자 일그러진 웃음을 지었다. 나는 그가 나를 비웃는 줄 알았는데 그는 그렇게밖에 웃지 못하는 것 같았다. 몸을 일으킨 그가 절뚝대며 내 쪽으로 다가왔다.

“마비가 와서 몸 반쪽을 쓰는 게 어렵다고 합니다.”

같이 탑에 올라온 크라이스가 내 귓가에 속삭였다. 왕좌에서 내쫓긴 고통으로 이드리드는 모든 체모가 하얗게 세고 몸에 마비가 왔었던 모양이다. 얼굴은 거무죽죽하고 살도 엄청나게 빠져서 그는 내가 알던 왕과 동일 인물처럼 보이지 않았다.

“부인께서는….”

같이 투옥되었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창살 안에는 이드리드 한 명뿐이었다. 왕비였던 사람, 그녀는 어떻게 되었는가. 내가 묻자 이드리드가 키들거렸다.

“죽었어.”

“……?”

“하프와 같이 죽어 버렸어.”

하프?

문득 내가 가지고 왔던 하프가 떠올랐다. 실로리안 하프. 어느 신이 두고 갔다는 영험한 물건. 내가 눈을 크게 뜨자 이드리드가 광기 어리게 웃었다. 푸하하하, 하고 웃던 그가 갑자기 웃음을 뚝 멈췄다. 그의 눈이 번들번들했다. 광기, 후회… 수많은 감정들이 그의 눈에서 반질반질 윤을 내고 있었다.

“다들 내가 그 하프를 이든 같은 어린애에게 줄 거라고 생각했겠지.”

“…….”

“그 하프는 결혼기념일 선물이었어. 받고 싶다더군. 실로리안 하프가. 그녀가 아주 오랫동안 구하던 거였어.”

“…….”

“행복하고 싶다고. 행복이라는 감정이 뭔지 다시 느껴 보고 싶다면서…. 웃기지 않나? 왕비인데, 가장 귀한 여자가 되었는데 행복하지 않다는 거야.”

나는 이드리드의, 왕의 결혼생활에는 일절 관심이 없었다. 왕비는 아주 조용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내조를 잘했고 정치에 철저하게 거리를 두고 있었다. 신실했고 왕비로서의 덕목도 완벽하게 지켰다. 멀리서 보기에 왕은 좀 문젯거리가 많았어도 왕비는 아무런 문제도 없는, 그림 같은 사람으로 보였었는데. 물론 사치스럽고 화려한 부분은 당연히 있었고, 검소한 타입은 아니었지만 그런 건 그로스랜 사교계에서는 미덕이면 미덕이었지 흠은 아니었으니까.

최소한 불행한 사람으로 보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 하프는 정말 대단하더군. 그녀가 행복해했어.”

“…….”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밥 먹는 것도 귀찮아하고 잠도 자지 않은 채로 하프 소리만 들었지. 그렇게 씻지도 않고 짐승처럼 하프 곁에만 붙어 있더니 죽어 버렸어.”

“장례를….”

치르지 않으셨습니까?

내가 물으려는 순간에 이드리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가 그녀의 시신을 어떻게 했는지 모르겠으나 장례를 치르지 않은 것만은 분명했다. 왕비의 장례가 치러졌다면 내가 그걸 어떻게 모르겠는가. 왕비가 죽었다는 것조차 완전히 쉬쉬하고 있는 상황이었을 것이다. 왜 그랬을까?

잠시 상상해 보았다. 왕비가 죽은 왕궁의 그 분위기를. 아아, 그러고 나서 탄식이 내 입가를 흐르려는 걸 간신히 참아 냈다. 아, 왕궁은 이미 무너지고 있었구나. 내가 아무리 방어해도, 하스트레드가 아무리 무력을 높이 세워도, 이든이 아니었어도, 왕궁은 이미 안에서 자멸하고 있었다. 지금 이 상황은 운명의 흐름이었고 아무도 멈출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왜.

죽은 왕비의 장례조차 거부했을까.

“내 유일한 가족이었지.”

이드리드가 피식피식 웃으면서 속삭였다. 나에게 말하는 건지 자신에게 말하는 건지 아니면 허공에 존재할 어느 유령에게 말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눈에 초점이 없었다.

“그런데 하프 따위가 아니면 행복할 수 없다는데….”

나는 도대체 뭐였지?

그의 마지막 말은 거의 들리지 않았다. 목소리를 쥐어 짜낸 그가 나를 보았다가 자신의 두 손을 내려다보았다가 마지막으로 허공을 바라보았다. 거기에 정말 누가 있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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