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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배의 꽃-77화 (76/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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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딘가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문이 부서지는 소리, 누군가가 뛰어드는 소리, 누군가의 악쓰는 소리. 그래, 그 모든 소리들이 멍하니 귀를 스쳐 지나갔다. 나는 내 손이 떨리는 걸 보았다. 병에 걸린 사람처럼 손이 떨려서 움직일 수도 없었다.

몸을 겨우 움직여 그녀의 얼굴을 보았다. 죽은 사람처럼 이미 파리해진 그 얼굴을.

여기에 왜 왔지?

- 누가 배신했지?

누구를 자유롭게 하려고 했었지?

- 믿지 못한 건, 배신한 건, 누구지?

머릿속에서 누군가가 소리를 질렀다. 누가 배신했느냐고 배신자를 잡아 죽이라고 고함을 질러 댔다. 배신자를 잡아 죽여야 돼. 그녀를 죽인 건 누구야? 그녀가 이렇게 된 건 누구 탓이지? 누구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녀는 최소한 살아 있었을 것이다. 누군가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녀는 조금 부자유스러웠어도 가장 영광되게 살았을 것이다. 누군가를 만나서 그녀는 사교계의 가장 고귀한 꽃에서 웃음거리가 되었고 누군가를 만나서 그녀는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는 선택을 강요받았고 누군가를 만나서 그녀는….

그 누군가는, 누구지?

“죽여야 돼.”

눈물이 계속 흘러내렸다. 울려던 게 아니다. 이것은 그저 애도의 흔적이다. 나의 그녀가 세상에서 사라진 것에 대한 애도. 그것뿐이다. 가슴 아플 일 따위는 없다. 나에겐 그런 자격도 없으니까. 고통받을 자격 따윈 없다. 배신자는, 죽어야 돼.

내가 아까 놓쳤던 검이 보였다. 누구의 검이었지? 아아, 이제 와서는 아무 상관없지.

검을 집은 순간이었다. 누군가가 “전하!”라고 비명을 지르며 내 팔에 매달렸다. 어떤 여자였다. 검은 머리카락을 가진 여자. 아, 누군가의 어머니이기도 한 여자. 이름이… 아, 지금 그게 무슨 상관이람.

“전하, 정신 차리세요. 전하, 다 끝났습니다. 다 끝났어요.”

여자가 필사적으로 중얼거렸다.

“알아.”

나는 선선히 웃었다. 웃음이 났다. 픽, 하고. 그리고 울음도 같이 나왔다. 내게 이 웃음을 가르쳐 준 사람이 죽었으니까.

“알아, 다 끝났어.”

이제, 세상의 종말이야. 그녀가 죽어 버렸거든.

햇살도 달빛도 다 없는 세상이야. 여기는 숨을 쉴 수 없는 곳이야. 여기는 없는 곳이야, 그녀가. 내가 그녀를, 죽여 버렸거든. 그녀를 못 믿었거든. 내 거짓말쟁이가 얼마나 마음이 약한지 알면서, 알고 있었으면서, 알고… 있었으면서.

“전하, 검 내려놓으세요. 전하, 목에서 피가 납니다!”

당연하지. 이 새끼는 죽어야 돼. 사실은 더 고통스럽게 하고 싶은데 그것도 시간 낭비지. 한시도 숨을 쉬게 할 필요가 없어. 아아, 내가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야. 이거 좀 놓고….

“전하! 주군께선 아직 안 돌아가셨다고요!”

어떤 남자가 소리쳤다.

어떤 남자, 크라이스가 소리쳤다. 갑자기 머리가 징, 하고 울렸다. 그리고 깨지는 소리가 어딘가에서 났다. 그와 함께 물속에서 바라보는 것처럼 흐릿하던 세상이 갑자기 이상할 정도로 선명해졌다. 나는 검을 집어 던지고 실리를 살폈다. 그제야 눈앞의 라스나티프가 보였다. 그녀는 어딘가 공포에 질린 눈으로 나를 바라보면서 실리에게 회복술을 걸고 있었다. 다른 신관들도 모두 달라붙어서 실리에게 회복술을 쏟아붓는 중이었다.

그래, 여기에는 신관들이 있었다.

지금 이 순간, 치유에 있어서는 가장 강력하다고 추앙받는 이들이 한자리에 모여 있었다. 어쩌면, 어쩌면….

실리의 안색이 아까보다 조금 나아진 것 같기도 했다. 손이 아까보다 더 떨렸다. 실낱같은 희망의 연약함에 치가 떨렸다. 그럼에도 그 희망을 놓을 수가 없었다. 어쩌면 그녀가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나의 세상이 다시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기대에 눈물이 쏟아졌다. 멈출 수가 없었다.

열세 번째 앞장. 백지의 앞에서

눈을 뜨면 이든이 보였다. 눈이 마주칠 때마다 그는 웃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얼굴은 엉망이었다. 눈물로 젖어 있는 데다가 무서울 정도로 초췌했다. 원래 조금 예민한 성격이었다. 아마 아무것도 안 먹고 있는 것 같아 보였다.

“식, 사 좀, 하시, 고.”

내가 안 나오는 목소리를 억지로 긁어모아 식사를 하라고 권하자 이든은 눈을 크게 떴다. 그는 억지로 내게 웃어 보이려다가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 내 가슴에 얼굴을 묻고 어린애처럼 통곡하며 우는 그를 도닥거려 주고 싶었지만 손이 움직이질 않았다. 목소리도 낼 수 없었다. 그저 귀로 그 가여운 울음소리를 듣고 있어 주는 것 외에는 방도가 없었는데 그나마도 곧 정신이 아득해졌다.

꿈에서 나는 왜인지 아버지를 만났다. 몇 번이고 반복해서 아버지와 서재에 앉아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너만이 나의 유일한 후계자다.”

나는 아버지의 말씀에 내가 자긍심을 가졌던 것을 기억한다.

“네가 나의 모든 걸 가져야 해, 실리.”

“저 쥐새끼 같은 것들. 친척 놈들의 말은 다 들을 것 없어. 하나같이 기회만 엿보는 쥐새끼들이니까.”

아버지의 뒤에서 나를 바라보던 제온 삼촌의 얼굴이 보였다. 그는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 그리고 숙모의 얼굴도 보였다. 그녀는 난처한 표정을 하고 웃고 있었다. 그녀는 나를 싫어하지 않았다. 그저 남편의 표정을 한 번 살피고 무표정하게 그들을 지나치는 내게 눈웃음으로 살가운 인사를 건넸다.

사람을 처음 죽이던 날, 그날의 공기가 나를 감쌌다. 나는 그때 아버지께서 뭔가 말씀해 주시길 바랐다. 꿈속에서 말을 달리면서도 ‘쓸데없는 짓인데.’라고 생각했다. 아버지는 아무 말씀도 해 주지 않으실 것이고 나는 누군가의 유흥을 위해 살인을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나의 첫 살인이 될 것이었다.

말을 달려서 간 곳은 새하얀 저택이었다. 이스트럼과는 달리 아주 우아하고 아름다운 저택. 저택으로 가는 길, 어느 온실 문이 보여 들어갔더니 꽃과 약초의 천국이었다. 나도 모르게 그것들을 살펴보았다. 하나같이 귀하고 값비싼 것들이었다. 이런 것들을 어떻게 다 모았을까. 여긴 어디지. 나는 여기에 왜 왔지.

그때 ‘리.’라고 누가 나를 불렀다. 나를 이렇게 부르는 사람은 한 명뿐이었다. 고집스럽게, 다른 사람과는 다른 이름을 쓰겠다고 선포한 나의 배우자가 하얀 옷을 입고 웃고 있었다.

“리, 너는.”

아아.

“네가 하고 싶은 걸 해.”

나는 아무것도 후회하지 않아.

그래, 나는 그 순간에 하스트레드를 버렸지. 하스트레드는 내게 중요했고 그것의 주인이자 보호자라는 건 언제나 내 긍지였다. 하지만 이든.

너는 내게 하고 싶은 걸 하라고 했으니까.

나는 그 순간에 하스트레드보다 너를 선택하고 싶었어. 그러니까 세상이 나를 비난해도 너는 이렇게 웃어 줄 거라고 생각했어. 오롯하게 처음으로 내가 원하는 걸 선택했거든.

그래, 나는 자유야.

이제야, 비로소.

이든을 향해 마주 웃었다. 그가 양팔을 벌렸다. 그의 빈 품으로 달렸다. 초원이 발밑에 깔려 있었다. 바람이 나를 밀어주었다. 아아, 자유의 냄새가 났다.

“이게… 무슨 냄새, 야….”

냄새가 지독했다. 너무 심한 악취에 정신을 차렸나 싶을 정도로. 떠지지 않는 눈을 억지로 뜨자 퉁퉁 부은 얼굴의 이든이 보였다. 그는 초췌한 데다 얼굴이 부어 있어서 아주 잘생긴 익사체 같았다. 나도 모르게 눈을 크게 뜰 뻔했는데 눈이 잘 떠지지 않았다.

그가 나를 끌어안고 울기 시작해서 미간이 찌푸려졌다. 온몸이 두들겨 맞은 듯이 아팠다. 어릴 때는 이런 날이 종종 있었지만 자라서 강해진 이후에는 이렇게까지 아팠던 적은 별로 없었는데.

내가 눈을 떠서 주변을 둘러보자 빅토리아가 난감하게 웃고 있는 게 보였다. 늘 그렇듯 후드를 깊게 눌러쓰고 있어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입 모양만으로도 빅토리아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비키?’ 내가 입 모양으로 그녀를 부르자 그녀가 조심스럽게 이든을 일깨웠다.

“전하, 아픈가 봅니다.”

빅토리아의 말에 이든이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 그는 놀라서 나를 놔주었지만 내 팔 한쪽을 잡고 있는 상태였다.

“당신이.”

그가 중얼거렸다. 목소리가 완전히 잠겨 있어 귀를 아주 잘 기울여야만 들을 수 있었다.

“당신이 죽는 줄 알았어.”

아아.

나도 그때는 죽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아니, 죽을 거라고 거의 확신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하스트레드의 명예를 유지하면서 당신을 살릴 수 있는 방법은 거의 그것이 유일했다.

그래도 그 방법이 아니었다면 좋았겠지. 나도 당신이 내 앞에서 죽어 가는 걸 본 적이 있는데 정말 고통스러웠다.

“죄송….”

갑자기 쿨럭하고 기침이 터져 나왔다. 기침을 해 대자 누군가가 타월을 급히 내 입가에 대 주었다. 향수 냄새로 보았을 때 빅토리아군, 이라고 생각한 것도 잠시. 울컥하고 뭔가가 넘어왔다. 뱉고 나서 보니 검은 피였다. 내가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들어 빅토리아를 보자 그녀가 찡그린 얼굴로 웃고 있었다.

“너 진짜 죽을 뻔했어. 검은 피가 나오면 계속 뱉도록 해, 실리.”

“맞습니다, 비전하. 계속 뱉으셔야 합니다.”

그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솔루조웨 가문의 수장인 로드리고 솔루조웨가 보였다. 마법사 협회장인 그는 눈빛이 형형한, 긴 흰 수염의 마법사였다. 그 유명한 대마법사가 내 몸에 회복술을 불어넣는 중이었다. 그나저나 방금 이분이 나를 뭐라고 불렀지?

“존경, 하는, 협회장님, 방금 뭐라고…?”

내가 갈라진 목소리로 묻자 그가 활짝 웃었다. 로드리고 솔루조웨. 그의 정적들은 그를 비난할 때 이렇게 부른다. 권력의 개.

“왕비 전하, 편안히 로드리고라고 불러 주십시오.”

왕비 전하?

그제야 나는 내가 창에 꿰뚫렸을 때의 상황을 다시 한번 복기할 수 있었다. 그때 근위대는 배신했고 성문은 열렸으며 사병들이 들이닥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 상황에서 나는 하스트레드가 아닌 이든을 선택했다. 그럼, 하스트레드는 어떻게 되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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