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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배의 꽃-76화 (75/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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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에.”

실리가 오른손을 뻗었다. 그러자 창밖에서 빛 한 줄기가 실리의 손으로 뻗어져 들어왔다. 그리고 그것은 곧 검으로 화했다. 검은 달빛을 형상화한 것 같은 색으로 반짝였다.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진검이다…. 진짜 죽일 생각이야. 진 성검을 꺼냈어.” 신관들이 넋을 잃고 절망하는 소리에 나는 그게 진 성검이라는 걸 알았다. 그동안 실리가 소환했던 검들과는 다른, 진정한 성검의 형태는 빛이었구나. 달빛처럼 고아한 빛의 검. 실리가 검을 든 채로 로프넬에게 웃어 보였다.

“저 어리고 물정 모르는 분을 제게 붙이셨을 때부터 이날을 염두에 두고 계셨던 것 아니었습니까?”

어리고, 물정 모르는 분.

실리의 목소리가 표현하는 내가 얼마나 어리석고 멍청하게 느껴지던지 나는 순간 숨을 쉬기 어려울 정도였다.

“…알고 있었나?”

로프넬이 비릿하게 웃었다.

“이만 끝내시죠. 차후부터는 이런 일은 사양하겠습니다, 전하.”

실리가 말했다. 그 말을 끝으로 그녀는 로프넬을 등지고 나를 똑바로 보았다. 그녀가 한 발 앞으로 걸어 나올수록 하스트레드의 기사들이 한 발 뒤로 물러났다. 그녀와 기사들이 교차했고, 결국 그녀 홀로 우리의 보호막 앞에 당도했다.

“아프지 않게 끝내 드리고 싶지만.”

그녀의 금안이 흘낏 자신의 오른손을 향했다. 거기에는 곱고 시린 빛으로 반짝이는 검이 무시무시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아무것도 약속해 드릴 수 없는 게 유감이군요, 전하. 나오시죠.”

그녀의 웃는 얼굴을 보고 깨달았다. 그녀는 정말로 나를 죽일 생각이라는 걸.

악몽 속을 걷는 것 같았다.

내가 여기 왜 온 거였지?

아마, 누군가를 자유롭게 해 주기 위해서였던 것 같다.

이 상황이 그나마 가장 나은 상황이라는 걸 깨달은 라스나티프는 보호막을 거두었고 나는 휘청거리지 않으려고 애쓰며 앞으로 나갔다. 내가 나서자 실리는 나를 등지고 움직였다. 나와 거리를 벌리는 건 진심으로 싸우겠다는 뜻이었다.

나는 여기서 죽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고.

너의 손에 의해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네가 나를 죽이려고 팔을 걷어붙이는 상황 같은 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머리가 멍해서 정신을 차리기 힘들었다. 내가 그저 그녀만을 물끄러미 바라보는데 누군가가 내게 검을 쥐여 주었다. 고개를 돌리자 무표정한 얼굴의 크라이스가 서 있었다. 그의 눈에 희미한 연민이 스쳤다.

그는 이미 내가 죽을 거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검도 없이 허우적대다가 죽는 불명예스러운 꼴을 당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자신의 검을 빌려준 것이다. 이 어이없는 동정에 웃음이 났다.

“하, 하하.”

웃음이 미친 듯이 났다. 나는 뭔가를 하려고 했던 것 같다. 그래, 너를. 내 아름다운 리, 너를 구하고 싶었어. 네가 나를 사랑한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너를 구하고 싶었지. 너를 자유롭게 해 주고 싶었어. 내 가슴이 찢어져도 좋으니까, 네가 원한다면 내 곁이 아닌 다른 곳에 가도 괜찮으니까, 그저 네가 자유롭기를. 그 무엇도 너를 옭아매지 않기를, 나는 그런 걸 생각했었어.

혹시나 잘못되면 너와 단둘이 도망칠 생각도 했지. 귀걸이에 장거리 이동 마법을 담으면서 나는 그런 생각도 했어. 하스트레드로, 둘이서. 내가 거기서 죽으면 너는 괜찮겠지. 하지만 그래도 며칠은, 몇 시간 정도는 함께할 수 있을 테니까. 나는 그런 마지막도 생각했었어. 너와 단둘이 있을 시간을 꿈꿨지.

네가 이럴 거라고는.

나는 꿈에도, 실리, 나는 진짜 꿈에도 생각을 못 해서.

머리가 지끈거렸다.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이게 배신의 맛인가. 배신의 맛은 아주 뜨겁고 역겨웠다. 토할 것 같은데 나오는 게 없다. 목을, 식도를, 가슴을, 배 속을, 손발을 배신의 불이 태우고 있었다. 산 채로 불타는 기분이 뭔지 알 수 있어서 웃음이 났다. 실리가 나를 태워 죽이고 있었다.

내가 여기에 왜 서 있는 거야?

나는 왜 살아 보려고 한 거야?

부모의 한이 있었고, 나 자신의 원한도 있었지.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그런 건 다 잊고 그저 너만 있었어. 너의 자유. 너의 행복. 나는 그것을 위해 달렸어. 너를 너로서 살게 하고 싶었지. 하, 지금 생각해 보면 얼마나 어리석은, 정말 어리고 물정 없는 생각이었던가.

너는 너를 사랑하는 나를 보며 어떠하였을까.

죄책감을 느꼈을까? 아니면 즐거웠을까? 나는 우리가 분명 마음이 통했다고 느꼈는데 그 감정들은 다 한순간의 유희였을까. 머리가 빙빙 돈다. 세상이 빙글빙글, 돌고 있어서.

[성스러운 검이여.]

실리의 언령에 갑자기 정신이 확 들었다.

[얼어붙어라.]

그녀가 허공에 있었다. 땅을 박차고 허공으로 뛴 그녀가 검을 휘두르는 순간 나도 모르게 뒤로 이동 마법을 썼다. 순간 이동과 함께 내 눈앞에 결빙의 흔적이 보였다. 그녀는 나를 얼려 죽일 생각이었다. 진심이다. 그녀에게는 살기도 없고 살의도 없었다. 그녀는 그런 걸 가질 필요도 없이 나를 죽일 수 있는 사람인 것이다.

[바람이여, 보이지 않는 방패가 되어….]

성검이 내 앞으로 훅 들어왔다. 몸이 뒤로 밀렸다. 숨이 가빴다. 내 옷자락이 검날에 스쳐 잘려 나갔다. 순식간이었다. 검의 궤적이 눈에 보이지도 않았다. 언령을 잊을 뻔했을 정도로 강력했다. 내가 어린 시절부터 검술 수업을 받은 몸이 아니었더라면 나는 이 한 방으로 죽었을 것이다.

[보이지 않는 방패가 되어, 나를 감싸라!]

콰앙, 소리가 날 정도로 강력한 검기가 내 바람 방패를 후려쳤다. 고작 한 번에 바람 방패가 흔들렸다. 두 번, 버틸 수 있을까? 세 번은? 바람 방패의 상태를 확인하면서 손을 움직였다. 언령을 쓰려는 실리의 입을 보는 순간 내 입이 먼저 뱉고 있었다.

[바람이여, 물과 만나라! 태풍이 모든 것을 쓸어버릴 것이니 소리조차 멈추리라!]

‘침묵’은 수준이 높은 마법이지만 성공률이 희박하다. 애초에 타인의 목소리를 제어한다는 건 아주 큰 제약을 거는 마법이었다. 그만큼 성공하기 어렵지만.

벙긋.

가끔은 통했고, 지금이 바로 그 순간이었다. 칫. 실리가 혀를 차는 게 보였다. 이제 좀 공평해지는군. 그녀는 무력으로, 나는 마력으로 싸우는 것이다. 성검은 발현되어 있지만 정작 성력이나 마력을 쓸 수는 없으니 잘 벼려진 검 이상은 될 수 없다.

내가 보호막을 걸기 위해 손을 움직이는 순간 서늘한 기운이 덮쳤다. 성검의 냉기가 검의 궤적을 먼저 알려 준 것이 나에게 불행 중 다행이었다. 피부가 아플 정도로 싸늘한 냉기 덕에 아슬아슬하게 검을 피할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급히 움직이다 가지고 있던 검을 놓쳐 버리고 말았다, 젠장.

실리의 몸이 나를 축으로 반 바퀴 돌았다. 실리의 손이 내 목을 붙잡았다. 그 순간 나는 그녀가 무엇을 하려는 건지 알 수 있었다. 그녀는 내 목을 자를 셈이다. 마력을 모아 둔 손으로 내 목을 잡은 그녀의 손을 튕겨 냈다. 그녀의 몸까지 한 번에 튕겨져 나가 우리 사이에 거리가 벌어진 순간.

[벼락의 창이여, 오라.]

손끝이 찌릿했다. 간절하고 위급할수록 마력은 증폭된다고 하더니 내가 부른 벼락의 위력은 무시무시했다. 시전자인 내게 간접적인 영향을 미칠 정도로.

실리가 땅을 박차고 달리고 있었다. 성검은 서늘한 빛으로 반짝였다. 나는 저 검의 위력을 안다. 내 옷은 여기저기 찢겼고 베인 피부에서는 피가 흘렀다.

내 턱에 사신이 그 낫의 날을 가져다 댔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럼에도 아주 잠깐, 짧은 시간 생각했다. 그녀와 내가 함께 괜찮아질 수 있는 방법 따위는 없을까. 그녀에게 창을 겨누지 않고도 혹시 다른 결론을 낼 수 있는 방법이 존재하지는 않을까. 절대적인 예감이 몸을 뒤흔들었다. 여기가 종지부라는 그 강력한 예감 앞에서 나는 무력했다. 결정을 내려야 했다. 창을 올릴 것인지, 혹은, 혹은.

그녀의 몸이 허공에 떴다. 일말의 망설임도 담지 않은 손이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그 순간에 나는, 내 삶의 시작과 끝을 온몸으로 느꼈다. 배신으로 점철된 그 삶을. 살고 싶지는 않았다. 딱히 삶에 미련이 있었던 건 아니다. 하지만 배신은 그만 당하고 싶었다. 너무 괴로워서, 그래서.

손이 움직였다.

그녀는 창을 피했지만 벼락의 창은.

[벼락의 단죄!]

창은 몇 갈래로 나뉘어져 빛의 날이 되어 실리의 몸에 쏟아졌다. 앞으로 돌진하던 그녀는 멈추지 못했다. 그녀의 몸은 허공에서 내게로 떨어지고 있었으니까. 창날이 여러 빛줄기로 나뉘어 그녀의 몸을 꿰뚫는 그 순간에 내 눈에 보인 건 하얀 손이었다.

평생 검을 쥐었다는 그녀의 손이….

검을 놓고 있었다.

피투성이의 작은 몸이 내게로 쏟아지는 그 순간은 영원처럼 길었다. 머리가 멍했다. 손이, 분명, 검을 놓았다. 손에서 힘이 빠지는 게 분명히 보였다. 그녀가 놓쳤을까? 벼락의 창날에 맞아서 힘이 빠진 것이었을까? 하지만 간발의 차이긴 했지만 분명히.

그녀는 그 직전에 검을 놓은 것 같….

“왜….”

내가 무슨 정신으로 물었는지 나도 모른다. 딱히 질문을 하려고 한 것도 아니었다. 그 말은 그냥 머리를 통하지 않고 입 밖으로 나갔다. 왜, 왜 이런 거야. 나는 그렇게 물으며 그녀의 몸을 끌어안은 채 뒤로 넘어졌다. 그녀의 몸이 뜨거웠다. 그리고 곧 차가워지기 시작했다. 그게 소름이 끼쳤다. 그녀가, 식어 가고 있었다.

“미안.”

그녀가 속삭였다. 침묵 마법으로 말을 할 수 없어야 할 그녀가 목소리를 내어 한마디, 대답했다.

알고 있었다.

세실리아 사리안이라는 여자가 어떤 여자인지.

그녀는 나의 첫 번째 기사였고,

다정하고,

아름답고,

거짓말쟁이에,

나를 무척, 무척 사랑해서.

알고 있었는데.

분명히, 알고 있었는데.

얼굴이 젖고 있었다. 내 눈물인지 그녀의 피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녀의 몸이 식어 간다. 그녀의 몸이 무거워져 간다. 한 번도 무겁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던 그녀의 몸이 묵직하게 늘어진 채 조금씩 차가워졌다. 통나무처럼, 식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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