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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배의 꽃-75화 (74/94)

<☆75>깜

“하지만 아무것도 안 하고 두 번이나 죽이자니 형님께 좀 미안해져서 말이야. 단 한 번의 기회를 주지. 명예로운 일대일 대결을 제안하지.”

“…….”

“하스트레드 경.”

호명에 실리가 앞으로 나오는 게 보였다. 그녀는 평소의 옷차림 그대로였다. 건틀렛에 갑주까지 착용한 나에 비하면 그녀의 방어구는 턱없이 부족했지만 그녀에게 한없이 빠져 있는 나조차 알고 있었다. 방어구의 차이는 우리 둘의 전력 차를 메꿀 수 없다는 걸. 그녀는 강력했고 내가 입은 방어구 따위로는 그녀의 성검을 막을 수도 없었다. 도리어 속도만 늦출 뿐이다.

이 개새끼.

실리에게 살해당하는 내 모습을 즐기고 싶은 모양이다. 실리의 얼굴에서 이제 아예 표정이라는 게 사라졌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그녀가 붕괴되고 있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나는 라스나티프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러자 라스나티프가 손가락을 미묘하게 움직여 보였다.

“왜 리가 나와 싸워야 하는지 모르겠네.”

한껏 이죽거리면서 갑옷을 벗기 시작하자 순간 실리의 눈빛이 흔들리는 게 보였다. 눈이 마주치자 그녀의 금안이 애원했다. 갑옷이라도 입고 있으라고. 순식간에 지나갔지만 그녀의 눈에서 보인 건 공포였다.

그녀가 나를 이토록 사랑한다는 것이 좋았다. 그녀를 여기까지 몰아붙인 게 미안했다. 그녀를 저기서 끌어내어 내 옆에 숨길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녀가 얼마나 고통받고 있을지 생각하면 심장이 찢기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 고통의 대부분을 내가 주고 있다는 것이 가장 마음 아팠다. 조금만이야. 마음속에 담긴 말을 그녀에게 전하고 싶었다. 조금만 더 버텨, 실리. 조금, 아주 조금 남았으니까.

내가 갑주를 거의 다 벗었을 때, 갑자기 엄청난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실리가 고개를 돌렸고 창 근처에 서 있던 기사가 황급히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그는 대경실색하여 외쳤다.

“병사가… 병사가 들어옵니다. 성문이, 성문이 열렸습니다!”

다른 창 쪽에 있던 병사의 표정은 더 창백했다.

“근위대가 합류했습니다! 주군, 근위대가 배신했습니다!”

라스나티프의 입가에 진한 미소가 흘렀다.

애초에 반왕파는 드러난 자와 드러나지 않은 자들로 구성되어 있었고, 그들 중 한 명이었던 근위대 간부는 신임을 받아 근위대장이 되기 위해 왕에게 모든 성심을 다했다. 그럼에도 근위대장이 바뀌지 않자 반왕파는 초강수를 뒀다. 근위대를 매수하여 왕궁에 마물을 반입하여 습격 사건을 일으킨 것이다. 그것으로 근위대장은 경질되었고 새로운 근위대장으로 반왕파가 원하던 인물이 올라가게 되었다.

하지만 이 사건으로 로프넬은 매우 경계심이 강해졌고, 그는 하스트레드를 자신의 호위로 삼았다. 하스트레드는 주인에게 충성도가 강한 집단이라 매수가 쉽지 않았다. 그러나 하스트레드의 장로 중 일부는 주인인 실리에게 반발하고 있었고 라스나티프는 그들을 매수하는 데 성공했다고 했다. 어떤 식으로 매수했는지는 듣지 않는 게 좋겠다고 하여 듣지 못했지만.

애초에 왕위 복권은 근위대장이 왕인 로프넬의 옆에서 그의 목을 자른다고 해결될 문제도 아니었다. 나는 정통성을 강조하여 여기가 내 자리임을 천명해야 했다. 친왕파는 반발할 것이고 중도파는 명분을 요구할 것이다. 나는 친왕파도 찍소리하지 못할 만큼의 명분을 내놓아 로프넬이 이 나라 왕의 자격이 없음을, 그리고 내가 이 왕좌의 진정한 주인임을 증명해야 했다.

그러려면 첫째로 나, 이든 그로스랜이 로프넬을 처단해야 했다. 암살의 형태가 아니라 당당하게 왕의 앞으로 나아가 그의 죄목을 말하고 죽이는 식으로 일이 흘러가야 했다. 이것이 최우선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새로운 근위대장이 로프넬의 경계 목록에 올랐다고 해서 실망하지 않았다. 근위대장이 우리 편이라는 건 충분히 좋은 일이었다.

이렇게, 성문을 열 수 있으니까.

또한 근위병들을 싹 치워 놓을 수도 있었다. 내가 복도에서 위화감을 느낀 부분은 병사들 외에 시종이나 시녀, 하인, 하녀들까지 모조리 없다는 것 때문이었다. 시종장은 우리 편이 아니었던 것이다.

나는 복도에서 근위대장이 우리를 배신하고 왕과 내통하였거나 혹은 정체가 들통나 이미 하옥된 게 아닐까 걱정했다. 그러나 라스나티프는 그런 염려를 하지 않았기에 나의 머뭇거림에 아까 의아해했던 것이다.

이렇게 되면 일은 끝났잖아.

“이드리드 그로스랜, 감히 왕세자를 살해하려 했음을 너의 입으로 자백하였으니 그 죄가 첫 번째 너의 죄이며, 두 번째 너의 죄는….”

내가 그의 죄명을 읊으려는 순간이었다.

“죽여!!”

로프넬이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하스트레드의 기사들이 마치 장작더미 위에 불꽃 하나가 떨어진 것처럼 폭발적으로 움직였다.

하스트레드의 강함을 얼마나 많이 들어 왔던가. 라스나티프가 가장 경계했던 것도 하스트레드 기사들과 그 정점에 서 있는 인물, 세실리아 사리안, 나의 실리였다.

그녀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녀와 왕을 제외한 모든 기사들이 순식간에 움직였다. 거기에는 내가 알던 그 누구도 없었다. 능글맞은 크라이스, 돈만 밝히는 리온, 다정한 어머니인 소피아는 거기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들은 모두 기사였다. 그것도 마치 한 몸처럼 유기적으로 연결된 기사들. 수십 명의 인원이 마치 하나의 생물처럼 움직였고, 그 한 명 한 명이 독보적으로 강했다.

[불타올라라!]

소피아가 바닥에 화염을 깔면 마치 알고 있었다는 듯이 하스트레드 기사들은 모두 몸을 피했다. 그리고 신관들은 속수무책으로 화염에 당해서 비명을 지르며 스스로에게 회복술을 걸어야 했다. 그러는 사이 하스트레드 기사들은 사신처럼 다가와 신관들을 제압했다. 소름 끼칠 정도로 정확하고 군더더기가 없었다.

하스트레드에는 마검사인 소피아 외에도 몇몇 마법사들이 섞여 있었다. 그들은 후방에서 적절한 보조 마법과 공격 마법을 쓰고 있었다. 대단한 건 그들은 결코 검사들의 움직임을 방해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흐름의 방해 없이 그들은 마법을 자유자재로 사용했다. 문득 생각했다. 이렇게 모든 것이 유기적으로 연결되려면 이들은 이 연습을 얼마나 했을까? 수백 번? 수천 번?

근위대가 온다고 해도, 혹은 약속된 사병들이 더 온다고 해도 이 거대한 벽을 이길 수 있을까? 한 명, 한 명이 잘 벼려진 명검과 같고, 그 사람들이 살아 있는 것처럼 연결된 이 하스트레드라는 벽을?

왜 왕들은 하스트레드를 원했는가.

아무리 기사단이라고 해도 결국 떠돌이 용병단에 불과했던 하스트레드의 단주에게 작위까지 줘 가며 장기 고용을 했던가.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압도적인 무력 앞에 우리는 개미처럼 쓸려 나갈 판이었다.

[바람이여, 정령의 가호여, 신의 손길이여, 우리를 보호하소서!]

대신관 라스나티프가 보호막을 펼치고 거기에 다른 신관들이 어마어마한 신력을 쏟아부었는데 마력도 없는 검사들이 무력으로 보호막을 부수려 들고 있었다. 등골이 오싹할 정도였다. 보호막을 사이에 두고 크라이스의 얼굴이 보였다. 그는 아무런 표정도 짓고 있지 않았다. 나를 적으로 산정하고, 그저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만 여기는 듯했다.

이게 기사인가.

아무리 아는 사람이어도, 어떤 관계였어도.

그래도 적이 되면 가차 없어지는 이것이.

살기를 띤 눈으로 미친 듯이 보호막을, 아니 보호막 너머의 나를 향해 칼질을 해 대는 크라이스는 정말 다른 사람 같아서 기가 질렸다. 새삼 내가 어느 곳에 서 있는지 생각한다. 그곳은 실리가 서 있는 곳과는 다른, 따뜻한 온실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실리가 서 있었던 곳은 아마도 아주 척박하고 메마른….

“그만.”

보호막에 금이 가려는 찰나에,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픽 웃는 웃음. 나는 이 웃음의 주인을 안다. 그녀는 살기를 띠고 있지 않았다. 아까처럼 깨질 것 같은 무표정도 아니었다. 평소와 비슷한 얼굴이었다. 무언가를 결심한 듯한 눈빛이 조금 다르다면 달랐을 뿐.

실리의 말 한마디에 마치 시간을 멈춘 것처럼 모든 하스트레드의 기사들이 일제히 공격을 멈췄다. “소름 끼쳐.” 누군가가 작게 중얼거렸다. 나도 그 말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조종이라도 당하는 것처럼 모두가 동시에 뚝, 움직임을 멈추는 건 사람이라기보다는 기계거나 혹은 악령에 들린 것처럼 보였다.

“무슨 짓이야?!”

로프넬이 소리쳤다. 그의 얼굴이 한껏 일그러져 있었다. 붉으락푸르락하는 얼굴이 기괴했다. 목 아래는 시커매서, 마치 죽은 사람 같았다.

“일대일 대결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여기서 제정신인 사람은 실리 한 명뿐인 것 같았다. 그녀의 목소리는 새벽을 깨우는 신전의 종소리처럼 청아하게 이 공간을 울렸다.

“그리고 저는 이런 난장판에서 죽음에서 돌아오신 대공 전하의 귀한 몸에 상처를 내 제 생때같은 부하를 잃고 싶진 않습니다.”

“…….”

“저희는 목숨을 다하여 전하를 지킬 것이나 하스트레드는 정치적 희생양이 되는 것은 거절하겠습니다, 전하.”

한마디로 이 아수라장에서 괜히 하스트레드의 기사가 잘못하여 나를 죽이고 그 죄를 뒤집어쓰게 만들 수는 없다는 뜻이었다. 왕은 나를 한 번 죽였다. 그건 그의 거대한 약점이 되었다. 만약 오늘 싸움에서 내가 죽었을 때, 로프넬이 이미 죽은 나에게 ‘반란’이라는 죄명을 씌울지 아니면 자신에게 유리한 식으로 판을 짜서 써먹을지 알 수가 없었다. 그 과정에서 하스트레드의 일원이 희생당할 수도 있는 일은 사양하고 싶다는 게 실리의 말이었다. 그 말에 로프넬이 눈을 부라렸다. 지금 이 긴박한 상황에서 그딴 소리가 나오느냐는 표정이었지만 실리는 태연했다. 나도 실리의 마음을 알 것 같았다. 이 순간이 지나가면 상황은 되돌릴 수 없다. 그러니 실리는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하스트레드의 주인임과 동시에 보호자니까. 하스트레드의 모두를 보호하기 위해 모든 것을 건 사람에겐 로프넬의 위기보다는 하스트레드 기사 아무개의 안위가 더 중요한 것이다.

“일대일 대결로 끝내시죠.”

“남편을, 죽이겠다는 뜻인가?”

로프넬의 악의에 찬 목소리에 실리가 실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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