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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배의 꽃-74화 (73/94)

<☆74>깜

방을 떠나기 전 거울을 보다가 눈을 감고 실리의 몸을 떠올렸다. 그녀의 아름다운 몸. 그리고 그 몸에 새겨진 제어 각인들. 그걸 새겼을 개새끼들을 떠올리며 이를 갈았다. 내가 반드시 이겨야 하는 이유를 마음에 되새긴다.

눈을 떴을 때 거울 속의 나는 나약한 표정을 짓고 있지 않았다. 무표정하게 전의를 불태우고 있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내 방을 한 번 둘러보고 방을 나와 마차로 향했다.

집결지는 왕궁으로 이어지는 숲이었다. 왕궁의 사냥터인 그 숲의 사낭터지기는 매수된 지 이미 오래였다. 거기에 집결한 라스나티프의 사람들은 왕을 반대한다는 의미의 검은 옷을 입고 왼쪽 팔에 붉은 띠를 두르고 있었다. 몇몇 귀족들이 눈에 띄었다. 한두 명은 들떠 있었고 대부분은 극도로 긴장한 얼굴이었다.

라스나티프가 그들에게 짧은 연설을 했다. 왜 나를 추대해야 하는지, 왜 지금의 왕이 없어져야 하는지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녀는 훌륭한 연설자였고 사람들은 흥분했다. 그녀가 내게 단상에 올라가 이야기를 하겠느냐고 물어서 거절했다. 나는 그녀만큼 훌륭한 연설자는 아니었으니까.

카리스마를 생각했다. 실리나 라스나티프 같은 사람들은 타고난 카리스마가 있었다. 사람들은 그녀들을 따르고 맹목적으로 추앙했다. 하지만 내게는 그런 사람들이 없었다. 왕세자로 태어났어도 내게는 그런 오라는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수많은 이들이 따르는 사람들이 선택할 만한 존재가 되면 된다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군주는 군중을 집결시키는 카리스마를 가질 필요는 없다. 그런 카리스마를 가진 사람들을 잘 조율하는 인물이면 충분하다.

왕의 숲에서 왕궁으로 향하는 작은 성문에 다다랐을 때 병사들이 일제히 멈추라고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때 라스나티프 쪽에서 외침이 들렸다. 신관인 그녀가 쓰기에는 지나치게 공격적인 언령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라스나티프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이건 신력의 운용이 아니라 마력의 운용인데? 누구일까, 의아함에 고개를 돌리자 어디서 봤던 얼굴이 라스나티프와 나란히 말을 달리고 있는 게 보였다.

잉그리드.

분명 그런 이름을 가진 실리의 친구.

“……?”

당신이 왜 여기에 있어, 실리는 어쩌고?

내 눈이 아마 그렇게 묻고 있었나 보다. 그녀가 쓰게 웃었다.

그 말 그대로 돌려드리죠, 전하.

그녀의 눈이 차갑게 대답했다.

맞는 말이었다. 실리는 내가 여기에 없기를 가장 원했을 것이나 나는 지금 이 순간 결국 여기에 있었다. 그래, 결국 나는 어느 한쪽을 택했다. 실리를 위해서든 뭐를 위해서든 지금 어느 한편을 택했고 이제는 최선을 다할 때였다. 손에 마력을 모아 화염으로 바꿔 분출했다. 내 손에서 뻗어져 나간 화염이 불덩어리로 변해 왕궁 문을 때렸다.

내 공격을 필두로 마법사들은 화염을, 그리고 신관들은 신성 공격을 왕궁 문에 퍼부었다. 왕성 문이라면 어림도 없었을 것이고, 왕궁 문이어도 정문이었다면 더 잘 견뎠을 것이다. 하지만 이 문은 사냥터로 향하는 작은 문이었다. 문은 힘없이 부서졌다.

“가자!”

내 명에 사람들이 와아아, 고함을 질렀다. 건너온 다리는 불 질렀고 더는 앞으로 가는 것 외에는 아무런 선택지가 없는 것처럼.

해일이 밀려드는 것처럼 우리는 본궁을 향해 진격했다. 빠른 속도로 달리는 우리들을, 근위병들이 놀라서 막아 보려 했다. 그러나 대부분은 마법 한두 방을 맞고 쓰러졌다. 그리고 동료가 쓰러지는 걸 본 근위병들은 몸을 비켜서 주거나 쓰러진 척하기도 했다.

“싸우려는 사람이 없군?”

적극적으로 싸우려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왕궁 안은 파티 참석을 위해 종종 올 때와는 달리 을씨년스러웠다. 왜 이런 분위기인지 알 수가 없었다. 내가 말을 달리며 라스나티프를 보자 그녀가 “이미 왕은 신망을 잃었습니다!”라고 대꾸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환희와 기쁨으로 가득 차 있었다. 우리가 이길 거라는 기대가 가득이었다. 그러자 왠지 불안해졌다.

이렇게 쉬울 수가 있나.

“저, 전하께오서는 홀에 계십니다….”

시녀를 붙잡고 왕이 어디 있느냐 묻자 시녀가 공포에 질려 대답했다. 하지만 그녀가 기다렸다는 듯 대답하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건 내 착각일까.

왜, 이렇게 쉽지? 이럴 수가 있나? 아무리 습격이라고 해도?

이 불안은 점차 심해져 갔다. 복도가 비었다. 사람이 없었다. 도무지 왕궁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만큼 기분 나쁠 정도로 지나치게 고요했다. 내가 복도 한가운데에 우뚝 멈추어 서자 같이 달리던 이들이 자리에 섰다. 숨이 목 끝까지 찬 탓도 있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

홀에 있다고? 집무실도 아니고, 서재도 아니고, 침실도 아닌 홀에? 왜?

홀은 많은 사람을 수용하기 위한 장소다. 즉, 왕궁의 어딘가에서 매복을 한다면 가장 가능성 있는 장소였다. 거기에 누가 있을까. 예감이 좋지 않았다. 내가 왕이라면 누구를 매복시키겠는가. 누가 가장 믿음직스럽겠는가.

왕은 하스트레드를 이끌고 거기에 있을 것이다. 나의 마지막을 즐기기 위해서. 실리에게 나를 죽이라 명하기 위해서. 마치 악의를 가진 신처럼.

“신이라….”

내가 중얼거리자 라스나티프가 나를 돌아보았다. 왜 그러느냐는 듯이. 그녀는 홀의 거대한 문 앞에 서서 가만히 있는 내가 의아한 모양이었다. “전하?” 라스나티프가 나를 속삭여 불렀다. 함께 있는 이들의 사기가 떨어지기 전에 빨리 들어가자는 재촉이었지만 나는 대답하지도, 그녀를 돌아보지도 않았다. 그저 거대한 문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이 문이 열리면 우리의 운명이 시작될 것이다.

마치, 마상 경기가 시작되는 깃발이 움직이는 것처럼 우리의 운명도 시작되고 그건 어떤 신인 척하는 인간에 의한 것이겠지.

여기서 돌아가면 모든 걸 되돌릴 수 있을까. 그럴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냥 너와 단둘이 살고 싶었을 뿐이야. 네가 원하는 것도 그것뿐이었지. 그런데 왜 우리는 여기에 문을 사이에 두고 서 있을까.

너의 행복을 원하는 나와.

하스트레드의 영원함을 원하는 너는 왜 같이할 수 없을까.

그 두 개는 멀리 있는 게 아닐 텐데.

“전하?”

라스나티프가 결국 소리를 조금 키워 나를 불렀다. 공개적인 재촉에 웃음이 났다. 픽 웃는 이 웃음은 실리로부터 배운 것이다. 아니, 나의 모든 것은 그녀로부터 왔다.

그래, 놈이 어딘가에 존재할 악의에 가득 찬 신일지는 몰라도.

“문을 열어라.”

나의 신은 아니지. 나의 신은 너니까, 실리.

거대한 문이 양쪽으로 열리면서 천천히 하스트레드의 기사들이 집결한 게 보였다. 왕좌에는 왕이 앉아 있었다. 초점이 풀린 눈을 한 나의 삼촌과 그 옆에 서 있는 무표정한 실리를 보며 나는 웃었다. 그래, 여기서 만나는 게 우리의 운명이라면.

실리, 네가 신의 것이라면.

나는 신을 부숴서라도 너를 자유롭게 하겠다. 네가 내 곁에 있든 있지 않든, 그건 너의 자유지. 내 마음이 아무리 아프고 고통스러워도 그건 네 자유야. 하지만 너를 옭아매는 건.

너의 자유가 아니야. 그건 신의 자유도 아니고. 너는 누구의 것도 아니지. 그건 내가 용납하지 않아.

너는 가장 높은 곳에 있는 나의 성배. 나의 꽃. 너는 모든 것을 가지고 날아오를 자. 그러니까 실리.

네가 설사 원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나는 너를 자유롭게 만들어야겠다.

“결국, 네가 여기를 오는구나.”

삼촌이 나를 보며 이를 드러냈다. 그의 눈이 광기로 번들거렸다. 그가 나를 왜 여기까지 오도록 용인했을지 생각해 봤다. 아아, 그렇지. 그는 늘 정통성이라는 약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나를 한 번 죽였다. 그는 아닌 척했지만 온 세상 사람들이 다 그가 나를 죽이려 했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 그는 내가 왕궁을 습격하는 완벽한 상황을 만들어 내야 했던 것이다. 한마디로 현행범으로 잡아 죽이셔야 직성이 풀리겠다는 거겠지.

나는 그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사실 이제 와서 그따위는 보이지도 않았다. 내 눈에는 실리만 보였다. 그의 곁에 서 있는, 그의 검으로 존재하는 나의 여자가. 나의 성배가. 나의 신이.

그녀가 그녀의 의지로 저기에 서 있다고? 나는 도저히 그 말에 동의할 수 없다. 실리, 너는 네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고 있어?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겠지. 아니, 너는 유리처럼 깨질 것 같은 가면을 쓰고 네 고통을 감추려 급급하고 있지. 어느 무엄한 자가 감히 네가 거기에 자의로 서 있다고 말할 수 있단 말이야.

너의 인생을 통째로 빼앗은 네 아버지라는 작자가?

계약이라는 빌미로 너를 옭아매고 있는 나의 삼촌이라는 작자가?

“만날 줄 알았잖아.”

더 이상 삼촌으로서도 왕으로서도 대우해 주지 않는 나의 태도에 그가 실소했다. 그는 왕좌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나를 위협하려는 수작이라는 걸 알았지만 무섭지는 않았다. 시선을 흘끗 움직여 모여 있는 기사의 면면을 살폈다. 소피아, 크라이스, 리온. 그 외의 내가 알고 있는 수많은 주요 전력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그에 비하면 여기는 신관들이 전력의 대부분. 아마 이길 수 없을 것이다.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생각할 때 갑자기 삼촌이 말했다.

“나의 조카님. 생각해 보니까.”

그는 비열하고 기만적인 미소를 담고 나를 보고 있었다.

“내가 너를 위해 해 준 게 아무것도 없더라고. 어릴 때부터 나는 너를 죽일 생각만 했지, 너를 위해 뭔가를 해 주려고 한 적이 없었거든.”

놀랍게도, 이 말은 진부한 창이 되어 내 심장에 꽂혔다. 나는 너를 위해 뭔가를 해 주려고 한 적이 없었다. 그 말에 나는 내 어린 시절들을 떠올리게 되었다. 내가 배신당했다는 걸 알고 있었고, 아주 오랫동안 그 배신을 마치 낙인처럼 품고 살았는데도 나는 내 어린 시절 어느 시점에서 그가 변심한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한때는 내가 그를 아버지처럼 여겼듯이 그도 나를 사랑했을 거라고 생각해 왔었다. 하지만 그는 나를 죽일 생각만 했다고 지금 고백했다. 그 말에 순간적으로 아팠다. 하, 아프네. 나는 실리가 가르쳐 준 웃음을 지으며 삼촌, 아니 로프넬을 바라보았다. 그래, 너는 그랬군. 처음부터 나를 교육이 아니라 제거할 목적으로 데리고 있었군. 단지 타이밍을 재고 있었을 뿐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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