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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배의 꽃-73화 (72/94)

<☆73>깜

♡  열두 번째 뒷장. 성배  ♡

날이 밝았을 때, 실리는 내 곁에 없었다.

집사는 그녀가 일어나자마자 바로 돌아갔다고 말했다. 나는 어젯밤 마지막으로 보았던 그녀의 모습을 떠올렸다. 내가 그녀의 안에 마지막으로 사정했을 때 그녀는 나를 꽉 붙들고 있었다. 그러고 나서 단 한마디, “다치지 마세요.”라고 중얼거렸다. 내가 뭘 할 건지 그녀는 아는 것 같았다.

하지 말라고도 하지 않고 그렇다고 내게 동조해 주지도 않는 것이 그녀다웠다. 자신의 입장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 그리고 타인의 입장을 재단하지 않는 것. 실리는 늘 그렇게 행동해 왔고 나는 그런 그녀를 사랑했다. 그러니 서운할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아침 식사 시간, 테인과 로즈메리가 내 앞에 나타났을 때는 어쩔 수 없이 마음이 쓰렸다. 그들은 둘 다 무척 상처받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마 내가 그들을 속여 온 걸 실리가 말해 준 듯했다.

“잠시 옌선을 떠나 있으려고 합니다. 로즈가 몸이 좀 안 좋아서요, 전하. 허락하여 주십시오.”

테인이 내 눈을 마주치지 못한 채 고개를 숙이고 중얼거렸다. 로즈메리는 울었는지 눈가가 붉었고 눈이 부어 있었다. 그녀는 아예 내 눈을 피하고 있었는데 내가 싫어서가 아니라 나와 눈이 마주치면 또 울 것 같아서인 듯했다.

내가 속인 게 그렇게 속상했어? 나를 떠날 정도로?

그렇게 물으려다가 바들바들 떨리는 로즈메리의 손을 보고 그만두었다. 그러고 보니 로즈메리의 짐이 무척 많아 보였다. 창밖을 보자 바리바리 싣는 트렁크의 개수가 심상치 않았다. 잠시 떠나 있는다고? 아니, 완전히 떠나기 위한 준비로 보였다. 그제야 나는 깨달았다. 내가 역모를 진행한다는 건 내가 소중히 여기는 로즈메리나 테인의 목숨도 도박판에 건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을. 어째서 지금까지는 생각지 못하였을까. 나는 그들을 친구로 생각한 게 아니었던 걸까. 왜 그들이 안전하다고만 여겼지. 내가 잘못되면 그들은 같이 끌려 나와 화형대에 못 박히든 교수형대에 목매이든 할 텐데.

지금 실리는 자신의 사람들을 피신시키고 있는 것이다. 내가 생각지도 못한 부분을 배려해 주는 그녀에게 진심으로 감사했다. 혹여나 일이 잘못되어 이들이 나와 같이 죽는다면 나는 정말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잠깐만 기다려.”

서둘러 서재로 달려가 수표를 쓰려다가 만약을 대비해서 보석을 손수건에 싸서 가지고 왔다. 그리고 테인이 아니라 로즈메리에게 건넸다. 로즈메리는 야무지다. 보석의 가치는 꿰뚫고 있으니 결코 헐값에 넘기는 등의 바보 같은 짓을 하지 않으리라.

그녀의 손에 쥐여 주면서 그녀를 끌어안고 나지막이 속삭였다.

“보석이야, 로즈.”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로즈는 바로 알아들은 것 같았다.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지 마세요.’ 그녀가 중얼거렸다. 뭘 그러지 말라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보석을 주지 말라는 건지 아니면 내가 역모를 진행하지 않기를 바라는 건지. 아마 둘 다겠지.

하지만 둘 다 이루어 줄 수 없다.

“만약에 나에게 문제가 생기면 바로 국경을 넘도록 해. 알았지?”

“전하아아.”

로즈메리가 내 품에서 발을 동동 굴렀다. 결국 그녀가 울음을 터뜨렸다. 화장이 엉망이 되는 것도 아랑곳 않고 울기 시작하는 그녀를 꽉 끌어안았다.

“너는 내 하나밖에 없는 누이야.”

“전하아, 전하. 제발, 제발.”

“잘 살아라. 꼭 잘 살아야 돼. 챙겨 주지 못해서 미안했다.”

로즈메리를 안은 채 테인에게 손을 내밀자 그가 내 손을 잡았다. 그리고 말했다.

“제발, 살아남으십시오, 전하.”

성공하라는 말은 할 수 없을 것이다. 내가 성공한다면 하스트레드가 계약자 호위에 실패했다는 걸 의미하니까. 테인은 실리의 사람이니 그럴 수가 없어서 그저 나에게 바라는 걸 소원했다. 나의 소꿉친구들을 한 번씩 더 끌어안아 주고 그들을 내보냈다. 배웅은 삼갔다. 눈에 띌 뿐일 테니.

그날 저녁에는 폴이 의아한 얼굴로 “어머니께서 영지를 좀 돌보라고 잔소리가 대단하시네. 좀 다녀올게.”라며 웃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이라서 웃음이 났다. 폴은 자신을 휘두르는 소피에게 그저 화가 난 기색이 역력했는데 소피의 마음이 얼마나 타들어 갔을지 생각하면 그저 미안할 뿐이었다. 폴에게도 무언가를 좀 주고 싶었지만 그는 미래의 영주님이기도 하고 괜히 아무것도 모르고 해맑은 그에게 경계심을 줄 필요는 없을 것 같아 나는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척 대꾸했다.

“너희 지역 특산물이 뭐더라?”

“그딴 거 없어, 전하.”

“뭔가 있었던 것 같은데… 술이었던가?”

“술 안 마시잖아.”

우리는 실없는 이야기를 하며 복도를 걸었다. 폴이 복도 끝을 벗어나려고 할 때 나는 굳이 따라 나가지 않았다. 아까처럼 눈에 띌까 염려해서였다. 내가 따라가지 않자 폴이 나를 갑자기 꽉 끌어안았다. 평소와는 다른, 으스러뜨릴 것처럼 강한 포옹이었다.

“이겨.”

그제야 나는 폴이 해맑은 것 같아도 늘 많은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는 걸 또 한 번 깨달았다. 폴은 나를 한 번 더 꽉 끌어안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놔주었다. 그러고는 “아, 진짜 지겨워 죽겠어. 어머니들이란 왜 이렇게 잔소리가 심한 걸까.”라고 중얼거리며 밖으로 나가 버렸다. 특산물 같은 건 없으니까 기대하지 마! 그가 하는 말이 공허하게 복도를 울렸다. 빈 복도. 내 사람이 없는, 나 홀로 있는 빈 복도를 마지막 다정한 목소리가 채울 뻔하다가 채우지 못하고 사라졌다.

혼자가 되었다.

그날 밤은 기묘했다. 나는 완전히 혼자였다. 실리도 없었고 그동안 내 곁을 지켜 주었던 친구들도 없었다. 밤새도록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외로웠다. 언제였던가. 내 마음이 무너질 때 나는 실리에게 달려갔었다. 그녀는 나를 끌어안아 주었고 우리는 그렇게 이어졌었다. 그때는 모든 걸 보상받은 기분이었다. 그런데 이제 나는 갈 곳이 없다.

부정적인 생각이 든다. 내가 이 모든 걸 이겨서 왕좌를 가졌을 때 그녀가 없으면 어떡하지. 그녀가 나를 지지하지 않으면 어떡하지. 그녀가 내 곁에 있어 주지 않으면 어떡하지. 내가 계획한 것들이 생각한 대로 흘러가 주지 않으면 어떡하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숨을 가늘게 쉬었다. 긍정적으로 생각해야 했다. 어차피 되돌아갈 길 따위는 남아 있지 않으니까.

하지만 보고 싶어.

실리를 끌어안고 그녀의 체향을 맡으며 숨 쉬고 싶었다. 그럼 모든 게 좋아질 것 같았다. 다 괜찮다고 세상이 속삭여 줄 것만 같았다. 늘 그런 기분이 들었고 그것으로 충분했었다. 그런데 실리가 멀어지자 세상이 가혹하게 굴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아침의 햇살이 싸늘했다. 누군가가 나를 비웃는 것처럼 한기를 느꼈다. 햇살 속을 걸어 온실로 향했다. 그곳에는 내가 실리를 위해 구해서 모아 둔 것들이 가득 있었다. 무언가를 살리고 싶다던 실리가 떠올랐다. 무언가를 죽이는 일이 많아서 취미는 살리는 걸 선택했다는 실리의 목소리가 쓸쓸한 겨울 삭풍 속 나무 그림자처럼 내 마음속에서 흔들렸다.

나는 도저히 너를 이대로 둘 수가 없어, 리.

“전하?”

누군가가 나를 불러 고개를 돌리자 정원사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고 있었다. 내가 그를 바라보고 있자 그가 서둘러 모자를 벗고 내게 인사를 해 왔다.

“오셨습니까?”

“온실과 정원은 어떻지?”

“다 좋습니다. 아주 잘 자라고 있습니다.”

문득 내가 죽으면 이곳은 어떻게 될까 생각했다. 그녀는 이곳을 본 적이 있다. 그녀의 드레스 차림을 처음 본 날이었다. 그날 그녀는 내게 등을 돌린 채 꽃과 약초에 눈길을 주고 있었다. 나는 실리에게 이곳을 선물하고 싶었다. 그녀가 영원히 이곳을 보았으면 했다. 그녀가 좋아하는 약초와 꽃들을 이곳에서 키우며 조금이라도 자신이 원하는 일을 평온하게 하길 바랐다. 내가 죽은 뒤에… 이것들은 다 어디로 가게 될까. 그녀의 손에 떨어질 수 있을까.

실리, 너는 내가 죽으면 울까.

아니면 강한 척을 하느라 울지도 못할까.

“나는 당분간 떠나 있을 텐데, 돌아올 때까지 잘 키우도록 해. 중요한 사람에게 바쳐질 온실이니.”

내 말에 정원사가 여부가 있겠냐며 방긋 웃었다. 나는 잘 부탁한다고 말하고 등을 돌렸다. 내게 이 온실은 실리라는 존재가 없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 장소였다. 나는 식물을 별로 좋아하지 않으니까. 하지만 실리가 여기에 있는 것들에게 애정을 기울인다면 나도 좋아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온실을 나오면서 정신이 좀 들었다.

나는 질 수 없다. 반드시 이겨서 왕좌를 차지하고 하스트레드의 계약자 위치를 가질 것이다. 실리의 자유를 제한하는 자가 하스트레드의 계약자라면 나는 그 위치를 가지고야 말 것이다. 그리고 나는 실리에게 가장 중요한 인물이 될 것이다.

나는 죽거나 패하여 실리의 눈에서 눈물이 나게 하지 않을 거다. 그러니까 이런 부정적인 생각들은 다 필요가 없다.

내가 이길 거다. 수많은 도박에서 그래 왔듯이.

휘익, 내가 휘파람을 불자 어딘가에서 새가 날아왔다. 그 새는 실재하는 새가 아니었다. 오직 마력으로 만들어진 새. 새하얀 깃털과 파란 눈을 가진 새는 자세히 보면 어디에도 없는 그런 새였다. 새가 내 앞에서 날갯짓을 하며 허공에 떠 있었다. 나는 새에게 말했다.

[라스나티프에게 전하라.]

내 명에 새가 아름다운 소리로 응했다.

[가장 빠른 시간 내에 왕을 친다.]

시간을 오래 끌 일은 아니었다. 이미 내 주변은 많은 것이 변화했고 외부에서 본다면 이상을 알아챌 수 있을 만했다. 그 전에 움직여야 했다.

돌려받는다.

결전의 날 아침, 나는 귓바퀴 중간쯤을 뚫어 작은 보석이 박힌 귀걸이를 하나 착용했다. 그 귀걸이는 장거리 이동 마법이 담겨 있었다. 만약에 문제가 생기는 경우 나는 하스트레드로 이동할 생각이었다. 나는 삼촌에게 나를 죽일 수 있는 기쁨을 주지 않을 것이다. 나는 하스트레드로 갈 거다. 실리의 땅에 내 목을 매달 것이다. 실리는 슬퍼하겠지. 하지만 나는 죽어서도 그 땅을 내려다보며 그 땅의 적들을 처단할 것이다. 거기에 존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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