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깜
그래, 나는 그게 뭔지 알지.
내가 지금 하는 말은 잉가, 너에게 하는 소리가 아니야. 나에게 하는 말이지. 내가 내 감정에 취해서 행동하면 하스트레드는 어떡하지. 하스트레드가 꿈꾼 자유는, 그 이상은, 그리고 그것을 위해 모든 것 바쳤던 목숨들은 다 어떡하지.
“정신 차려야 할 거 같은데.”
잉가, 너보다는 사실 내가 정신을 차려야 할 거 같아.
나는 잉그리드에게 말하는 척 자신에게 말했다. 정신을 차리라고. 아무리 아름다운 사랑이어도, 그건 너의 개인적인 것이라고. 하스트레드는 그보다 큰 가치라고. 그다음부터는 내가 잉그리드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도 모르겠다. 귀가 먹먹했다. 어느 순간부터는 잉그리드가 내 품에서 울고 있었다. ‘알아, 안다고!’ 그녀의 목소리가 내 안의 목소리 같았다. 알아, 안다고!
고개를 들자 2층 입구를 막고 있던 하스트레드의 기사들이 겸연쩍은 얼굴로 우리를 외면하고 있었다. 나는 그들을 바라보다 피식 웃었다. 그래, 알아야지.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거느리고 있는 자리가 가볍지 않다는 걸 알아야 마땅하지, 세실리아 사리안. 정신을 차리기 위해 손톱을 손바닥에 박아 보았다.
하지만 밤은 온다.
옌선의 밤은 도시의 밤. 마차는 달각거리며 포석이 깔린 길을 굴러가고, 사람들은 밤늦게까지도 옌선의 길거리를 오간다. 길거리에서는 꽃을 파는 마차들이 밀회를 떠나는 신사들에게 꽃다발을 내밀며 유혹하고, 카페 유리창은 안에서 비치는 노란 불빛으로 반짝였다. 마력석들이 유독 많이 박혀 있는 상점 거리는 그야말로 불야성이었다. 사람들은 축제가 있는 것처럼 들뜬 얼굴로 행복하게 길거리를 거닐고 있었다. 상점가 바로 앞 거대한 공원에는 수많은 등들이 아름답게 공간을 수놓고 있었다.
잉그리드를 설득하는 일은 실패했다. 잉그리드는 자신이 잘못하고 있지 않다면서 라스나티프와 접촉하지 말라는 내 말을 거절했다. 한차례 폭풍이 지나가는 것처럼 울었던 그녀는 어느 순간 말끔히 감정을 정리하고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 “나는 순례를 다니는 마법사야, 실리. 그런 내가 대신관의 곁에서 공부를 좀 하겠다는 게 뭐가 이상하지?” ]
나는 그녀의 말에 토 달지 않았다. 대신관이 순례를 다니는 마법사 하나를 개인적으로 챙긴다고? 그것도 라스나티프 같은 전통주의자에 신성주의자가? 하지만 말이 안 된다는 걸 잉그리드가 모르는 게 아니다. 그녀는 일단 명분을 내세우고자 하는 것이다. 자신의 가문이 역모죄로 끌려 들어가지 않을 만한 명분.
사실 지금은 역모죄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 아직은 정보를 수집하는 단계니까. 하지만 정보가 다 수집되면 분명히….
머릿속에 이든의 수급이 매달리는 상상이 스쳐 지나갔다. 사람의 목을 얼마나 많이 잘라 보았지? 내 손으로 이든의 목을 자른다고? 나는 내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그 순간에 충동을 참지 못했다.
“스틸라드로 간다!”
로다인은 마부 창을 열고 곧바로 마부에게 내 명을 전달했다. 마차가 황급히 방향을 바꿨다. 스틸라드로 가는 길,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든과 거리를 두는 게 좋다는 걸 알고 있다. 마음을 정리하려면 눈으로 보지 않는 게 제일이겠지. 아는데 도무지 참을 수가 없다.
보고 싶었다.
이든이 살아 있다는 걸 이 두 손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차라리 그 어깨를 잡고 물어보고 싶었다. 왜 그랬어? 왜 라스나티프와 접촉했어? 그래서 그가 별거 아니었다고 대답해 주면 그대로 믿고 싶어졌다. 하지만 그럴 리가 없지. 그녀는 유명한 반왕파 인사고 이든은 정통성으로는 왕을 능가하는 존재다. 사라졌다가 돌아온 왕세자를 반왕파의 상징이 만났는데 ‘그냥 만났다, 별거 아니었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창밖이 반짝인다. 나는 반짝이는 불빛들과 거리를 거니는 신사와 숙녀들을 바라보다 생각했다.
차라리, 하스트레드가 이든에게로 움직인다면 어떨까. 차라리 그를 왕으로 추대한다면 어떨까.
나를 태운 마차가 스틸라드의 정문을 통과했다. 나는 하스트레드가 이든을 지지할 수 있는 방법을 내내 생각해 보고 있었다. 현실적으로 그런 방법 따윈 없었지만 그래도 이 달콤한 꿈을 놓기가 힘들었다.
하스트레드가 이든을 지지한다는 건 일단 하스트레드 내부에서 엄청난 반발을 불러올 것이다. 그건 우리가 계약자를 배신한다는 의미니까. 하스트레드의 공고한 위치와 신용은 계약자를 지키면서 쌓인 것이다. 단 한 번이라도 계약자를 배신하면 하스트레드는 다시는 그 빛나는 신용을 가질 수 없게 된다. 그건 엄청난 리스크다. 앞으로 하스트레드에 의뢰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배신을 염두에 둬야 할 것이고 그건 의뢰인에게 큰 부담이다.
그럴 수는 없어.
심지어 그 신용 문제는 몇백 년을 이어질 수도 있다. 지금까지의 하스트레드가 빛난 것은 나의 선조들께서 어떠한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하스트레드의 신용을 지켜 오셨기 때문이다.
[ “우리는 누구에게도 소속되지 않는다. 우리는 자유를 선택한다.” ]
하스트레드의 창시자이신 나의 선조께선 그렇게 말씀하셨다지.
그리고 나의 이든은 언젠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 “하지만 실리, 당신은 하고 싶은 대로 해도 괜찮아. 돈도, 명예도, 자유도, 모두 내가 이 손에 넘치도록 가질 테니까, 당신은 하고 싶은 걸 해.” ]
이든, 나의 선조께서는 자유를 선택하기 위해 하스트레드를 만드셨고, 당신은 내게 자유를 주기 위해 모든 걸 갖겠다고 천명하는데 나는 정작 자유라는 걸 가져 본 적이 없어.
지금 이 순간에도 내게는 길이 하나뿐이야. 내가 아무리 다른 길을 가고 싶다고 하여도 그 길은 내가 갈 수 있는 길이 아니지.
당신이 그걸 알아 줄 수 있을까. 내가 당신을 선택할 수 없다는 걸 당신이 이해할 수 있을까.
이스트럼이 웅장한 편이라면 스틸라드는 아름다운 저택이었다. 그 눈부시게 아름다운 저택에서 이든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수많은 사용인들을 뒤로하고 그는 나를 맞아 주었다. 마치 내가 양산보다 무거운 건 들 수 없는 숙녀라도 되는 것처럼 그는 마차에서 내리는 나를 정중하게 에스코트하기까지 했다. 그런 그를 올려다보다 충동적으로 키스할 뻔했다. 하지만 하지 못하고 대신에 손을 꽉 잡았다.
그가 내 손을 마주 잡았다. 꽉 맞잡은 두 손에서 우리의 마음이 변하지 않았다는 걸 충분히 느낄 수 있었지만….
“식사?”
그가 가볍게 웃으며 권했다.
“괜찮습니다.”
그는 내가 여기를 왜 왔는지, 누구를 만나고 왔는지, 무엇을 걱정하고 의심하는지 다 아는 것 같은 얼굴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한마디도 해 주지 않았다. 네가 생각하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아, 같은… 나를 안심시킬 수 있는 말은 할 수 없는 단계에 돌입한 게 분명했다.
그래, 그는 역모를 준비 중인 것이다.
분위기만으로 알 수 있었다. 그는 어렸고 분위기를 잘 숨기지 못했다. 아니, 아마 나도 잘 숨기지 못하고 있을 것 같았다. 그가 어려서가 아니다. 그는 포커페이스에 능한 사람이다. 나라에서 알아주는 도박꾼이지 않은가. 단지 그와 내가 너무 친밀해졌다. 그저 계약 관계인 부부가 아니라 우리는 진심으로 서로에게 속해 있었다. 그래서 서로를 속일 수 없게 되었다.
그가 이끄는 대로 걷는 동안 그는 참지 못하고 나를 끌어안았다. 내 어깨를 안고 내 머리카락에 손가락을 집어넣어 계속 쓸어내렸다. 말은 할 수 없다. 말로 하는 순간 우리가 소중히 여겼던 모든 것들이 깨어져 나갈 것 같아서 차마 입을 열 수 없었다. 제자리를 돌려받고 싶은 그와 내 자리를 지켜야 하는 나는 대치할 수밖에 없다. 세상의 흐름 속에서 종종 우리의 마음 같은 건 하찮게 치부되니까. 하지만.
내가 그의 허리를 끌어안자 그가 깜짝 놀란 듯 몸을 떨었다. 그러고는 갑자기 나를 어느 방인가로 이끌었다. 그의 방은 아니었다. 모르는 방. 아마도 게스트 룸 같았는데 상관없었다. 창밖은 어두웠고 그는 들어오자마자 거칠게 방문을 닫아 버렸다. 쾅 소리와 함께 사용인들이 밖에 남겨졌다. 그들이 잠시 우왕좌왕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그 소리는 곧….
“흡….”
밀려드는 그로 인해 멀어져 버렸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그래, 사실은 들리면서도 나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것처럼 눈을 감았다.
문에 밀어붙여졌다. 등 뒤에는 문이, 내 앞에는 그가 있었다. 옴짝달싹 못 하게 된 이 순간이 좋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이 순간은 얼마나 사랑스러운가.
키스는 낯익어서 좋았다. 어느새 적응된 키스는 그 행위만으로도 나를 안심되게 했다. 편안히 기분 좋게 만들어 주는 효과가 있었다. 버릇이 된 것처럼 키스에 빠져들었다. 내 양 뺨을 붙잡고 있는 그의 두 팔에 내 손을 걸고서 키스했다. 혀를 한껏 내밀어 그를 탐닉하는 건 매우 본능적인 행위라서 머릿속이 하얗게 날아갔다.
“사실은….”
그가 내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대고 헐떡였다. 그의 두툼해진 것이 내 다리 사이에 바짝 닿아 있었다. 이든이 쉰 목소리로 속삭였다.
“매일 세상 따위 망해 버리라고 기도해.”
“…….”
“그럼 너는 완벽히 내 것일 거야, 그렇지?”
세상이 없으면, 왕도 없고 하스트레드도 없으면, 너는 완벽히 내 거일 거야…. 그렇지? 이든이 물었고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마음이 아파서 대답할 수가 없었다. 문득 생각했다. 너는 왜 나여야 했을까. 한때는 나밖에 없었다지만 그 이후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너의 눈길을 기다렸는데.
그가 나를 침대에 눕혔다. 침대에 누워 그의 손길을 받으며 속삭였다. 같은 생각을 한 적이 있노라고. 당신이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사람이었더라면 우리는 아무 문제가 없었을 텐데요, 라고 속삭였더니 그가 웃었다.
“나는 그래도 괜찮아, 리, 하지만.”
그의 양팔이 나를 가두었다. 그는 양팔을 내 어깨 양쪽에 두고 몸을 지탱한 채로 나를 내려다보더니 쓸쓸하게 웃었다.
“내가 아무것도 가지지 못하면, 누가 너를 생각하지?”
“…….”
“너조차 너를 돌보지 않잖아. 나는 네가 그런 삶을 사는 걸 참을 수 없어. 그러니까 결국은.”
그의 입술이 내 뺨에 내려왔다. 내 코에, 입술에, 귀에 달라붙었다. 그리고 귓가에 속삭임이 들렸다.
“결국 이렇게 되었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