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깜
왕궁의 홀과 결혼식의 습격.
이 두 사건은 공통점이 있다. 왕궁의 홀에서 나는 손님이었다. 드레스를 입고 있었고, 사실 그 상황에서 검을 휘두를 사람은 내가 아니라 근위대였다. 나는 보호받아야 할 입장이었다. 그때 내가 검을 휘두른 건 근위대가 마물을 감당할 수 없어 보였고, 왕을 반드시 보호해야 했으며, 무엇보다 마물이 왕궁에 들어온 건 근위대 누군가의 협조가 있었을 가능성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결혼식의 습격 사건 때 나는 그 자리에 없어야 했다. 그러니까 두 사건 다 나는 사실 안전지대에 있어야 했다. 그리고 이든이 이 점을 염두에 둔 채 일들을 벌인 거라면….
바람이 내 머리카락을 엉망으로 만들고 있다. 내 머릿속은 폭풍에 휩쓸린 폐허와 같다.
나흘간 자지도 먹지도 않고 물만 마시면서 옌선까지 달렸다. 나의 애마, 산드라는 옌선의 스틸라드에 도착하자마자 탈진해서 쓰러졌고 나는 마구간지기에게 산드라를 맡기고 이든에게로 올라갔다. 올라가면서 가장 어이가 없었던 것은 나의 몰골이 걱정스러웠던 것이다. 나흘간 나는 씻지도 않았고 냄새도 날 것 같았으니까. 좀 씻고 만나는 게 좋을까. 이 와중에 이런 생각을 하는 내가 너무 우습고 같잖고… 가여웠다. 이렇게 사랑해 버린 내가, 바보 같았다.
이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이든을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순수하고 아름다운 사랑에 감화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든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아니, 더 아름다워진 것 같았다. 내 눈은 어딘가 미친 것 같았다. 이든이 있는 곳은 반짝거려서 나는 입술 안쪽으로 혀를 지그시 깨물어 현실 감각을 깨우려 애써야 했다. 이든의 방 안에 발을 들이는 것만으로도 나는 꿈속에 들어온 듯한 기분을 느꼈다. 몽롱했다. 아, 하긴, 내가 나흘을 안 자고 말 위에 있었지. 서 있는데도 말을 타고 있는 것처럼 세상이 흔들리는 기분이었다.
이든의 방은 흰색과 청회색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건 금발에 푸른 눈을 가진 이든과 정말 잘 어울렸다. 이든은 침대에 누워서 잠에서 덜 깬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가만히 그를 바라보았다. 그냥 평생 이러고 있었으면 좋겠어. 나는 당신이 대공이 아니어도 좋아. 당신이 아무것도 못 가져도 상관없어. 그냥.
그냥 하스트레드의 적만 아니면 되는데.
“힘들어.”
그가 중얼거렸다. 그렇구나, 힘들구나. 그도 힘들구나. 그와 있는 시간은 아름답고 행복한데, 그 시간이 너무나 완벽해서 그다음에 오는 시간은 더 힘들어졌다. 그리고 그 사랑스러운 시간을 지키기 위한 대가는 더욱 커져만 갔다. 나는 내가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 줄의 위에 있는 네가 너무 아름다워서, 너는 너무나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을 가지고 있어서.
“힘들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그렇게 말했을 때, 그는 잠에서 완전히 깬 것 같았다. 그는 내 얼굴을 보고 무척 당황한 듯 보였다. 그는 몇 번이고 힘들지 않다고 주장했다. ‘힘들지 않아, 리. 아니라니까.’ 그는 나를 붙잡고 설명하려 했다. ‘그런 거 아니야.’ 그를 바라보다 그의 이마에 키스했다. 이 키스를 몇 번이나 더 할 수 있을까, 생각하면서.
그날 밤.
크라이스가 소식을 가져왔다.
정확히 말하자면, 크라이스가 가져온 소식은 아니었다. 그는 여전히 하스트레드에 있었고(아마 옌선으로 출발했겠지만), 그의 부하인 로다인이 정보를 전했다.
라스나티프는 이든과 접촉했고 지속적으로 스틸라드를 드나들었다고 했다. 왜 거기에 대해서 테인과 로즈메리는 보고하지 않았는가. 테인과 로즈메리의 충성심이 변질됐다? 나는 잠시 생각해 보고 그럴 리 없다고 결론지었다. 나는 그 아이들을 믿는다. 하지만 테인과 로즈메리를 피해서 스틸라드를 드나들 방법이….
‘현혹’인가.
로다인은 라스나티프가 스틸라드를 드나들었다는 정보를 그녀의 신관으로부터 입수했다. 그러나 스틸라드에서는 전혀 금시초문이라는 반응이었다. 이렇게 되려면 라스나티프가 자신의 모습에 현혹을 걸어 모두의 눈에 다른 모습으로 보이지 않고서는 불가능했다.
그게 신성력으로는 불가능할 거고 그럼 라스나티프의 측근 중에 마법사가 있다는 추측을 할 수 있었다. 신관과 마법사는 전통적으로 사이가 좋지 않으니 라스나티프의 곁에 있는 마법사는 눈에 띌 수밖에 없다.
옌선에 남아 있던 하스트레드 인원을 모조리 투입해 그 마법사를 수색하자 의외로 금세 찾아낼 수 있었다. 그, 아니 ‘그녀’는 의외로 내가 아는 인물이었다.
순례 때문에 내 결혼식에도 참석하지 않았던 친구가 옌선에 남아 있었다는 걸 알았을 때의 황당함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그녀가 나를 피해 다니고 있다는 걸 확신하고 그녀의 여관 방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자니 나를 알아본 그녀가 눈을 크게 떴다.
“오랜만이다, 잉그리드.”
내 말에 잉그리드가 눈을 파르르 떨었다. 내가 올 거라고는 생각을 못 한 건지, 아니면 올 게 왔다고 생각하는 건지 알 수 없는 눈이었다. 잉드리드 뒤에서 여관의 싸구려 액자가 덜컹거렸다. 잉그리드의 마력이 불안정해서 그런 듯했다.
“잉가.”
내가 이름을 부르자 그녀가 손으로 자신의 입을 막았다. 애칭을 부르는 나에게 어쩔 줄 몰라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자 나도 그녀에게 엄하게 대할 기운을 잃어버렸다. 그녀는 내 친구였다. 오랜 친구. 그녀를 처단하게 되는 일이 생기더라도 함부로 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실리, 나는.”
잉그리드가 중얼거렸다. 그녀는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번민하고 있었다. 나는 우리가 왜 이런 데서 만나 이런 얼굴을 하고 있을까 생각했다. 이 여관은 이상한 냄새가 났다. 나무 바닥은 썩은 곳이 군데군데 있었다. 햇빛은 잘 들지 않았다. 너는 왜 이런 데 있을까. 그리고 나는 왜 이런 데까지 너를 잡으러 와야 했을까.
내가 팔을 벌리자 잉그리드가 내 품으로 와서 나를 끌어안았다. 내 친구, 잉그리드. 너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도대체 무슨 일이.
“실리, 라즈베리가 옌선을 떠났어.”
잉가는 내 품에 안긴 채로 작게 속삭였다. 이렇게 된 와중, 그녀는 내가 무엇을 물을지 우리 사이에 무슨 이야기가 이루어져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고 피하지 않았다.
라즈베리. 나는 그녀가 누군지 안다. 나랑은 친분 관계가 거의 없다시피 한 잉그리드의 소꿉친구다. 백작 가문의 셋째 딸로 라즈베리 색 눈동자를 가지고 있어서 잉그리드가 붙인 별명이 라즈베리. 내게는 조용하고 특징 없는 사람이지만 잉그리드에게는 얌전하면서도 이상한 데서 호기심 넘치고 독특한 친구였다. 잉가는 늘 그녀의 이야기를 하고는 했다. ‘라즈베리가, 라즈베리가….’ 라즈베리는 신부 수업을 하느라 왕립 학교에 오지 못하였으나 잉그리드는 늘 그녀와 서신을 교환했다. 잉그리드에게 아주 소중한 인간관계라는 걸 안다.
옌선을 떠났다는 말은 이중적 의미로 쓰이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는 아마 영원히 떠났다는 뜻일 거다. 즉, 추방이다. 수도에서 추방되었다는 이야기는 라즈베리가 매우 불명예스러운 상황에 맞닥뜨렸다는 뜻일 테고.
내가 등을 도닥거리기만 하자 잉가가 말을 이었다.
“불한당 조니가 건드린 하고 많은 여자 중에서.”
불한당 조니는 오아스티안 백작을 지칭하는데 그는 왕비의 남동생이다. 온 세상 여자를 다 건드리고 싶어 하고 실제로 수많은 여성과 염문을 뿌리고 다니며 엄청난 트러블을 일으켰다. 하지만 막강한 누이의 힘 덕분에 항상 무사할 수 있었다. 잉가가 속삭였다.
“하필 왜 라즈베리가 임신을 했을까.”
“…강제였어?”
오아스티안 백작은 상당히 잘생긴 편이고 그는 누군가를 강제로 추행한 적이 없다. 설마 라즈베리를 강제로 건드린 것일까? 그리고 왕비가 힘으로 라즈베리를 추방하고 이 일을 무마하려고 한 거라면….
“아니.”
잉가는 고개를 저었다. 역시, 그런 일은 아니었구나.
“하지만 둘이 즐겼잖아.”
“…….”
“왜 조니는 여전히 아무 벌도 받지 않고 즐기면서 사는데 라즈베리는 이혼당하고 돈 한 푼 없이 평민이 되어 다 쓰러져 가는 집에서 삯바느질이나 해야 하는 거야?”
잉그리드가 분노했다. 라즈베리가 이혼당한 건 조니와 불륜을 해서가 아니다. 아이를 가져서, 그리고 옌선에서 추방당했기 때문이다. 옌선에서 추방당했다는 건 수도 사교계에 참석할 수 없다는 뜻이고, 그런 아내를 귀족인 남편은 더 이상 데리고 있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사실 사생아 임신보다는 그쪽이 더 컸을 것이다. 왕비 남동생의 아이는 좋은 미끼가 될 수도 있으니 사람에 따라서는 그 아이의 존재는 묻어 둘 수도 있는 일이었을 테니. 라즈베리의 남편은 그럴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아주 ‘귀족적인’ 인물이었으니까.
나는 그다음 일이 눈에 선했다. 가족에게 버림받은 라즈베리는 가장 친한 친구인 잉그리드에게 연락했을 것이고 잉그리드는 라즈베리를 도와줬겠지만 이 모든 일에 깊이 분노했겠지. 그분노는 왕비를 향했을 것이고, 곧 반왕파를 돕는 것으로 바뀌어서….
몇 년 전의 나였다면 어이가 없었을 것이다. 아무리 친한 친구라고 해도 우리는 지켜야 할 것들이 있는 몸이었다. 내가 하스트레드를 지키고 있듯이 잉그리드도 귀족 집안에 태어나서 받은 혜택이 있는 만큼 짊어진 소임이 있다. 그런데 친구 하나 때문에 온 집안이 역모죄로 끌려갈 짓을 해? 나는 몇 년 전이었다면 정말 잉그리드를 어리석다 했을 것이다.
하지만.
“네 집안 식구들은 아무 짓도 안 했는데 너의 분노 때문에 역모죄로 죽을 수도 있어. 그 사람들은 왜 죽어야 하는 거지, 잉가.”
이렇게 말하면서도 사실 나는 잉그리드의 분노와 선택을 이해하고 있었다. 이해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이해했다. 가끔 마음속 저울이 미쳐 돌아가는 걸 어떻게 할 수가 없다. 아무리 다른 한쪽에 수많은 가치들을 올려놓아도 단 한 가지의 가치가 모든 것을 압도하고, 저울이 꿈쩍도 안 하는 순간이 오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