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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배의 꽃-70화 (69/94)

<☆70>깜

리온이 저벅저벅 죄인에게로 걸어갔다. 키들키들 웃는 모습에 죄인은 더 기가 질렸다. 리온은 결혼도 안 했고 돈만 좋아하는 인물이다. 그가 진심으로 고문을 즐기는가? 알 수 없다.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전장을 다니다 보면 마음속 깊은 곳에 무엇이 있는지는 알 수 없다는 걸 배우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심연의 무언가는 건드리지 않으려 한다. 화합하여 살기 위하여.

“자, 잠깐!”

“흐음?”

“잠깐만, 잠깐만! 누가, 누가 시켰는지는 정말로 몰라! 모르지만, 모르지만!”

이 죄인은 제온 삼촌의 심복 중 한 명이었다. 제온이 죽고 나서 죄인은 당연히 나의 감옥으로 끌려왔다. 그는 한동안 발설하는 것을 거부하였으나 여러 고된 조건 아래에서 결국 하나하나 입을 열었다. 그래도 중요한 것들에 대해서는 여전히 증언을 거절했다. 하지만 치이익, 소리가 나는 인두는 그에게 너무 위협적이었던 모양이다.

“자, 장로님께서 매주 편지를 보낸 사람을 알고 있습니다.”

“매주.”

내가 그의 말을 따라 하자 그가 열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매주, 장로님은 편지를 보내셨어요. 특히 일이 잘못되거나 하면 바로 편지를 보내셨으니 반드시 이 일에 그분이 결부되어 있으리라 확신합니다!”

“이 배신자!”

소피의 발밑에 팔이 짓눌려 있는 죄인이 고함을 질렀다. ‘입 닥쳐어어어!’ 그가 비명을 지르자 소피가 우아하게 그의 턱을 발로 후려 찼다. 입 닥치라는 고함은 곧 비명으로 변화하여 사라졌다. 내가 움직이자 부츠가 또각또각 소리를 냈다. 또각. 내 부츠 소리가 죄인의 앞에 멈추자 그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분, 은 당연히 이름이 있으시겠지?”

“…….”

“내가 아는 이름으로 듣고 싶은데.”

내 말에 죄인이 눈을 감고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러자 리온이 치이익, 소리가 나는 인두를 그의 귓가에 들이밀었다. 치이익. 그 소리에 죄인이 파르르르, 몸을 떨며 대답했다.

“대신관 라스나티프 님입니다!”

대신관 라스나티프.

그녀는 왕과 사이가 무척이나 나빴는데, 여러 가지 이유가 혼재한다. 첫째, 라스나티프는 신관 중에서도 대신관이다. 그러니까 그녀는 아주 알아주는 전통주의자이고, 따라서 정통성에 집착한다. 그러니 역대 몇 안 되는 완벽한 정통성의 왕세자를 ‘제거’하고 왕위에 오른 왕을 싫어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둘째, 왕은 라스나티프가 여성이라는 이유로 대신관에 오르는 걸 반대했던 이력이 있었다. 라스나티프는 소녀같이 반짝이는 눈동자를 가진 인물이지만 상당한 야심가였고 그녀는 대신관이 되기 위해 불철주야 노력했다. 그리고 그 앞길을 막은 게 당시 대공이었던, 현재의 왕이었다. 당시에는 라스나티프가 매우 고분고분했다고 전해진다. 그녀는 대신관 자리에 올라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단 종신직인 대신관의 자리에 오르자 그녀의 태도는 손바닥 뒤집듯 바뀌었다. 그녀는 사사건건 당시에는 대공이었던 왕을 저격했고 그가 즉위한 이후에는 더욱 심해졌다. 결국 반왕파의 대표적인 인물로 자리매김을 하면서 왕은 두고두고 그때 라스나티프를 어떻게든 대신관이 되지 못하게 했어야 했다고 후회하게 되었다.

그 외에도 왕은 라스나티프가 모시는 신을 유약한 신이라고 생각하며, 소위 말하는 ‘부드러운 신’들에 대해서는 예산 편성에 박한 편이다. 그에 대한 대책으로 라스나티프는 신전을 아름답게 꾸미고 수많은 혼례를 직접 주관하여 자신의 신전을 결혼의 대명사처럼 만드는 데 성공했다. 덕분에 그녀의 신전은 왕의 예산이 없어도 충분히 부유했다. 하지만 그녀와 그녀의 신관들은 왕에게 적의를 품었다. 지금은 부유해도 한때 그녀의 신관들은 빨래와 청소를 스스로 하고 옷을 기워 입을 정도로 가난했었기 때문이다. 한겨울에 장작도 제대로 때지 못하고 무엇보다 신전에 꽃도 제대로 장만할 수 없어 장식이 듬성듬성하여 몰골이 추하기 그지없었다고 하니 그 모든 모욕을 그들은 결코 잊지 않았다.

왕과 라스나티프는 건널 수 없는 강을 사이에 둔 관계가 되었고 이건 유명한 일이었다. 내가 이든의 생존을 위해 누군가를 이용해야 할 때 그녀를 선택하게 만든 주된 이유이기도 했다.

그녀가 왜 제온 삼촌과 손을 잡았지?

제온 삼촌이 나와 척을 지고 있다는 걸 이미 온 세상이 안다. 그녀 또한 모를 리 없을 터. 그런데도 삼촌을 도왔다고? 어째서?

왕의 사냥개.

물론 나는 그 이름으로 많이 불리지만 라스나티프가 나와 단순히 그 이유로 척을 지고 싶어 할 리 없다. 그녀는 이든을 매우 아끼니까. 왕을 증오하는 그녀에겐 유일한 활로가….

유일한 활로.

내가 생각한 단어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라스나티프는 그 소녀 같은 얼굴과는 달리 완전한 행동파였다. 그녀가 과연 자신의 유일한 활로에게 접촉을 안 해 보았을까?

손을 들어 입을 막았다. 신음이 나올 것 같았다. 이든이, 이 일에 관련이 되어 있을 수도 있다. 그 가능성만으로도 머리가 징, 하고 울리는 기분이 들었다. 내가 충격받은 건 이든이 이 일에 관련되었을 가능성 때문이 아니었다. 그것에 놀라고 상처받으려 하는 나 자신 때문이다.

“주군?”

크라이스가 나를 불렀다. 나는 그를 돌아보며 픽 웃었다.

이렇게나 마음을 줘서… 어쩌려고 그래. 나는 크라이스를 보면서 내 안의 나에게 물어보았다. 하지만 내 안의 나는 어깨만 으쓱일 뿐이었다. 하긴 나도 알고 있었다. 내가 마음을 준 게 아니었다. 나는 마음을 주고 싶지 않았다. 누구에게도 내 마음 따윈 주고 싶지 않았다. 누구에게 줄 만큼 대단한 마음도 아니었을뿐더러 나는 하스트레드의 주인, 언제든지 하스트레드의 이익을 위해 움직여야 할 몸이다. 그러니 누군가에게 마음을 주어 내 위치를 잊는 건 곤란하다. 그러니까 나는 누구에게도 내 마음 같은 건 주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이든은 내 마음의 문을 열었다. 나는 그때 문만 열렸다고 생각했는데 내 마음은 문이 열리자마자 흘러 나갔다. 환희에 차 달려 나갔다. 이든에게로 마구 몰려가서는 내게 돌아오지 않았다.

그래, 나는 이 순간을 걱정했는데.

“라스나티프를 캐 봐.”

“예.”

당연한 명이라고 생각하는 크라이스를 잠시 쳐다보다가 하고 싶지 않은 말을 한마디 더 덧붙였다.

“이르시아스 대공 주변도.”

크라이스의 눈이 커졌다. 그는 나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괜찮겠냐는 듯한 눈이 껄끄러웠다. 내가 그 눈을 피하지 않고 그저 눈길을 받고만 있자 그가 눈을 내리깔았다.

“전부 알아 오겠습니다, 주군.”

하나도 빠짐없이, 라고 말하는 크라이스의 목소리에 은은한 염려가 깔렸다. 나는 픽 웃는 것으로 그의 염려를 돌려보냈다. 나는 그에게 염려를 받을 사람이 아니다.

“주군.”

지하 감옥을 나가기 전, 크라이스가 나를 돌아보았다. 그는 어딘가 우물쭈물하는 기색이었다.

“만약 각하께서 연루되어 계시면 어떡합니까?”

그의 태도에서 그동안의 내 모습이 보였다. 내가 얼마나 열다섯 살 어린 남자에게 내 마음을 주었는지, 그게 모두에게 얼마나 노골적으로 보였는지. 크라이스는 나를 걱정함과 동시에 내가 하스트레드를 오롯하게 선택할 수 있을지 의심하고 있었다. 웃음이 났다. 가슴이 아플 때 웃는 건 언제부터 생긴 습관이었지? 어릴 때, 언젠가부터 생긴 습관 같기는 한데 생각이 나지 않는다.

가슴이 아픈 건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지 이미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스트레드의 적은.”

창밖의 햇살이 눈부시다. 이든의 햇살을 녹여 만든 듯한 금발이 떠올랐다. 아름다운 나의 이든. 나는 그를 선택해서 후회한 적이 없었다. 지금도 후회하지 않는다. 설사.

“제거해야 된다.”

설사 우리가 대치하는 상황이 오더라도.

크라이스가 만족스럽게 웃으며 “예, 주군.”이라고 대답하고 지하 감옥을 나갔다. 약간의 시간을 두고 나도 지하 감옥을 나왔다. 소피가 내 뒤를 따라오려 했지만 나는 그녀에게 “뒤처리를 해.”라고 명하여 그녀를 떨어뜨렸다. 혼자 걷고 싶었다.

석벽을 따라 걸으며 일렁이는 횃불들을 바라보았다. 횃불은 일정한 간격으로 벽에 걸려 있었다. 횃불이 타는 냄새가 내 코를 찔렀다. 피 냄새보다 이 냄새가 더 불쾌하게 느껴지는 건 아마도 현실이 가까워진다는 생각 때문일 것이다.

이든이 하스트레드의 적일 수도 있다….

오른손을 들어 내려다보았다. 이 손으로 몇을 죽였지? 셀 수 없다. ‘대공’을 죽이는 것이 두려운가? 아니, 두렵지 않다. 하스트레드의 적이고 필요하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라면 나는 누구든 제거할 것이다. 그게 왕이라 할지라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그게 이든이라면.

나는 이르시아스 대공이 아닌 이든을 죽일 수 있는가?

…얼굴을 보면 알 수 있을까.

이렇게 충동적으로 무언가를 결정해 본 적이 언제였던가. 손꼽아 보니 늘 이든에 관해서는 충동적이었던 것 같다. 이든은 늘 내게 특별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를 둘러싼 공기는 다르게 느껴졌고 그의 목소리는 다른 이들보다 더 내 마음에 크게 울렸다.

[바람이여, 날개로 화하라.]

성검사가 된 이래 나는 성력도 마력도 검을 휘두르는 데만 사용해 왔다. 다른 데에 사용한 적은 거의 없었는데.

나는 홀로 말을 달렸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옌선으로 향했다. 단벌이었고 짐도 없었다. 가진 거라고는 돈과 내 말, 그리고 검 한 자루뿐이었다. 말도 안 되는 짓이라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나는 이든을 보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를 봐야 했다. 그의 얼굴을 보고 확인을 해야 했다. 그에게 묻고 싶었다. 라스나티프와 연루되어 있습니까? 하스트레드의 제론 사리안과는? 그때, 왕궁의 홀에서 습격당했던 건, 그리고 결혼식에서 습격당했던 건 사실은 일부러 만들어 둔 판이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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