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경배의 꽃-69화 (68/94)

<☆69>깜

이 더러운 기분이라니.

내 웃음은 내 귀로 들어도 히스테릭했다. 내가 그렇게 웃자 남자는 덜덜 떨며 고개를 숙였다. 자신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이 나라는 걸 깨달은 것 같았다.

웃으면서 생각했다. 죽여 버릴까? 아니면 채찍질을 할까? 인두로 마구 살을 지져 줄까? 사람을 괴롭힐 수 있는 수많은 악랄한 방법들이 떠올랐다. 하지만 마지막엔 실리의 얼굴이 생각나고 말았다. 새하얀 얼굴. 늘 무심하고 어딘가 체념하고 있는, 픽 웃는 그 얼굴. 강인한 성. 하지만 너는 무너질 것만 같고 나는 그래서 너를 힘껏 끌어안고 울고 싶어져. 늘 그래.

그녀가 너무 찬란하고 예뻐서 나는 그런 더러운 곳에 발끝도 들이고 싶지 않아졌다. 과거를 용서한다는 건 내게 어려운 일이다. 어떤 과거는 용서할 수 없다. 그 과거를 용서한다면 그 과거 속의 나를 배신하는 것과 같기 때문에. 그러나 과거를 용서하지 않으면서 보복하지 않는 길도 있다.

그 길은 아주 좁고 아슬아슬한 길이지만, 분명 존재한다.

“그래, 사주한 사람은?”

내 목에서 지옥 바닥을 긁는 것처럼 쇳소리가 났다. 실제로 목이 뜨거웠다. 목에서 지옥불이 타고 있었으니까. 오랜 세월 쌓아 둔 증오를 억지로 삼키는 건 불을 삼키는 것만큼 괴로운 일이었다.

나는 굳이 그에게 묻지 않았다. 나의 증오는 눈앞의 남자에게 향해 있었으나 사실 나의 원수는 그가 될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다른 이였다. 이 남자를 돈 주고 산 자. 그에게 모든 걸 지시한 자. 그가 나의 원수였다.

그리고 사실 그가 누군지는 세상 모든 사람이 다 알고 있었다. 그저 증언이 필요할 뿐이었다. 하스웰은 그리고 그 증언을 받아 낼 수 있는 사람이었다.

“이변은 없었습니다.”

하스웰의 대답은 나를 납치하도록 사주한 사람의 이름이 나왔고 그 이름은 내 삼촌의 것이었다는 뜻이었다. 그래, 하스웰의 말 그대로 이변은 없었다.

“어떡할까요?”

“처리해.”

그러나 살려 둘 수는 없다. 이야기가 새어 나갈 위험도 있고 그게 아니라 하더라도 서로 간에 치러야 할 최소한의 대가는 존재했다. 남자도 알고 있었기에 그것을 두려워할지언정 피해 보려는 시도는 감히 하지 않았다. 도리어 그는 “가, 감사합니다.”라며 고개를 떨구었다. 내 결정이 자비롭다는 걸 아는 듯했다.

아침, 밝은 빛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밤을 지새웠다. 머릿속에서는 전쟁이 났다. ‘놈을 더 잔인하게 죽였어야 했어!’ 그렇게 울부짖는 어린 시절의 나를 지금의 내가 어르고 달랬다. 불합리해. 그는 그저 평민이다. 그가 당시 대공의 명을 어떻게 거절할 수 있단 말인가. 물론 그는 필요 이상으로 내게 잔인하긴 했다. 하지만 그는 평생 억압당한 계층의 인물. 그런 그가 왕세자를 학대할 수 있는 위치가 되었을 때 억눌렸던 평생의 한이 터져 나오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내가 알 바야? 내가 잘못한 건 아무것도 없었어!’

어린 시절의 내가 피눈물을 흘리며 통곡한다. 그리고 나는 빛을 보며 결국 아직 작고 어린 나를 달래는 걸 포기한다. 그를 달랠 수 있는 건 내가 아니라는 걸 깨달은 까닭이다.

그가 필요로 하는 건 다 큰 데다 현실이나 이성적인 말 따위를 읊어 대는 자기 자신이 아니다. 그가 필요로 하는 건 꿈같은, 태양 같은, 밝은 빛 같은, 단 한 명의 사람이다.

나도 그녀가 필요해.

그녀에게 주절주절 나의 고통을 떠들고 싶은 게 아니다. 그저 그녀가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나의 고통이 감해지기 때문에, 아니, 내 고통으로 인한 어둠이 그녀의 빛으로 감싸이기 때문에 그녀가 필요할 뿐이다. 그녀는 아무것도 안 해도 좋다. 그녀는 그런 존재니까.

하지만 그녀는 올 수 없지. 그녀는 먼 곳에, 아주 먼 곳에 있….

“전하.”

빛 속에 그녀가 보였다.

헛것을 보고 있군. 잠도 못 잤고 스트레스도 많이 받은 탓이다. 내가 받은 악영향의 끝에는 늘 그녀가 별빛처럼 아스라하게 존재하여 나를 버티게 해 주었으니까. 문 앞에 서 있는 그녀는 너무 실재하는 것처럼 보였다. 미쳐 가나. 나는 어이가 없어 웃었다. 미쳐 가나 보다.

“힘들어.”

그래서 나는 투정을 부렸다. 현실의 그녀에겐 그럴 수 없다. 그녀는 나보다 더 큰 몫의 짐을 어깨에 얹고 있는 데다가 그 사실을 인지조차 못 하고 있는 사람이니까. 기특하고 가여운 내 여자에게 입이 찢어져도 힘들다는 말 따위는 할 수 없다. 하지만 이건 환상이니까 해도 되겠지.

환상은 힘들다는 내 말에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는 뺨을 손바닥으로 한 번 문지르고는 “많이 힘드십니까?”라고 물었다. 속삭이는 듯이 작은 목소리였다. 나는 “응.” 하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나를 어떻게 해 줄지 기대했다. 한 번도 그녀는 나를 그냥 둔 적이 없었으니까. 현실이든 환상이든 그녀는 나를 언제나 일으켜 세웠고 구해 주었다.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간에.

환상은 천천히 다가왔다. 젠장맞을. 속으로 욕설이 터져 나온 건 환상이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보다 말랐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헤어지기 전에 잔뜩 먹이고 올걸 그랬어. 그랬다면 조금 통통한 모습으로 환상이 나타났으려나. 환상은 조금 초췌해 보였다.

환상이 말했다.

“와 주셔서 기뻤습니다.”

“나는 네가 부르지 않아서 별로였어.”

왜 너는 나를 부르지 않을까. 네가 죽인 삼촌의 장례식이 열릴 텐데도 너는 나를 부르지 않았지. 많은 사람이 너를 비난할 자리에서 너는 남편인 나의 지지가 필요했을 텐데 결코 나를 부르지 않았어. 너는 늘 그렇게 나를 부르지 않아. 내가 촉각을 곤두세우지 않으면 난 그 자리에 없는 사람이 되어 버리지.

“그러셨어요?”

“나는 대공이야, 리. 나는 너를 지지하고 너에게 반대하는 놈들을 처단할 수 있어. 나는 그럴 힘이 있어.”

내 투정에 그녀가 웃었다. 마치 어린애를 보는 것처럼. 나도 알아, 내가 말하는 것처럼 그게 간단한 일이 아니라는 것쯤은. 그래도 실리, 네가 힘들 때 나를 부르지 않으면 나는 내 존재 이유를 정말 모르겠어.

내가 힘들 때 버텨야 했었던 이유를,

내가 지금 이 순간 이를 악물어야 하는 이유를,

그런 이유들을 모르게 되어 버려.

“늘 지켜 주셔서.”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잠시 입을 다물었다. 뭐라고 말을 이어야 할지 잘 모르겠는 것처럼. 이윽고 그녀가 속삭였다.

“행복합니다.”

그녀가 조금씩 다가오는 걸 보며 나는 눈을 감았다. 너는 비겁해. 환상에게조차 내가 투덜거리는 걸 용납하지 않잖아. 나는 또 너에게 녹아내리지. 행복하다니, 너는 나를 너무 잘 다루고 나는 기꺼이 조종당하지. 이렇게, 또. 이런 식으로, 또.

“너는….”

너는 정말 좋겠다. 손끝 하나로 나를 움직일 수 있어서. 나는 언제나 온 힘을 다해 너에게 달려가는데 너는 그저 말 한마디, 손끝 하나로 나를 조종할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을까.

그럼에도 나는 너에게서 벗어나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아. 부디 더 나를 조종해 봐. 뒤흔들어 봐. 나는 자극이 더 필요해. 너라는 자극이. 부서져도 좋고 망가져도 좋으니까 나를 더 마음대로 다루어 줘. 내가 쓰러져 버릴 때까지.

너는, 이라고 말하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내게 무언가가 다가왔다. 촉, 하는 입맞춤의 감촉이 내 이마에 닿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뭐야, 이거. 내가 눈을 크게 뜨자 실리가 의아한 듯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왜요?’라고 묻는 듯한 눈이 순수했다.

“아니….”

급히 손을 뻗어 그녀의 팔을 잡았다. 팔을 잡힌 그녀가 피식 웃었다. 내가 꽤 세게 잡은 것 같은데도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보였다. 도리어 그녀는 내 손을 도닥이며 “괜찮아요.”라고 속삭였다. 뭐가 괜찮다는 거야? 나는 어이가 없어서 그녀를 올려다봤다. 환상이 아니었어?

환상이 아니라고 생각하니 얼굴이 확 붉어질 것 같았다. 그걸 간신히 참아 내고 그녀를 끌어안았다. 나는 침대에 앉은 상태였고 그녀는 서 있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그녀의 허리를 안게 되었다. 그녀가 내 머리에 입술을 묻었다.

“힘드시게 하여 송구할 따름입니다.”

“아니, 힘들지 않아.”

내 다급한 부정에 그녀가 웃었다.

“하지만….”

“힘들지 않다니까!”

네가 힘든 게 아니야. 네가 힘들게 한 게 아니라고. 네가 환상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면 입이 찢어져도 말하지 않았을 거다. 내가 차마 말하지 못하고 그녀의 허리만 부둥켜안고 있자니 그녀가 소리 높여 웃었다. 그녀는 나를 토닥이면서 내 체향을 들이마셨다. 몇 번이고 숨을 들이쉰 그녀가 속삭였다.

“힘들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자 그녀의 금안이 따뜻하게 웃고 있었다. 문득 태양이 그녀의 눈 안에 잠들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정도로 그 눈동자는 아주 따뜻했고…. 그리고 지는 것처럼 음울했다.

“부디 늘 그러시기를.”

왜 그렇게 보이는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묻고 싶었는데, 묻지 못했다. 실리가 깨질 것같이 웃고 있었기 때문에.

♡  열두 번째 앞장. 사냥개  ♡

“왕의 사냥개 년! 너는 저주받을 거다! 네 아비처럼 뒈져 버려라!”

나는 가끔 궁금해진다. 저런 말을 하는 사람들은 정말로 내가 저런 말에 상처 입을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

아아악…!

죄인이 비명을 질렀다. 소피아가 지나가면서 그의 팔을 하이힐로 밟은 탓이었다. 소피는 그걸로도 분이 안 풀리는지 뒤축을 비벼 그를 더욱 고통스럽게 했다. 그의 비명이 지하 감옥을 울리는 동안 나는 리온을 돌아보았다. 리온은 피와 검댕이 끈적하게 묻은 인두를 내려다보며 휘파람을 불고 있었다. 뭐로 할까…. 리온의 혼잣말에 형틀에 구속되어 있는 죄인이 비명을 질러 댔다. 내가 보기에도 리온은 피에 미친 도살자처럼 보였다.

치이익, 불에 달궈진 인두가 리온의 손에 들리자 죄인이 진저리를 쳤다. 악, 악, 그가 비명을 질러 댔지만 리온은 어깨만 으쓱할 뿐이었다. 지금처럼 나이가 들기 전 처음 이 광경을 보았을 때 내 기분이 어땠던가. 잠시 생각해 봤다. 그때 나는 놀랐고 혐오감이 들었다. 한동안은 이런 고문에 전혀 적응할 수 없었다. 내가 이 고문에 적응한 건 고문당하고 온 내 또래의 누군가를 보았을 때였다. 그때 나는 깨달았다. 나 자신도 고문당할 수 있는 몸이라는 걸. 내 친우도 동료도 고문당할 수 있다는 걸. 방어하지 않는다면 공격당한다는 걸. 나는 나의 전우였던 누군가가 한쪽 팔을 못 쓰게 된 걸 보고 나서야 그걸 깨달았던 것이다. 그러고 나서는 이런 일에 인정을 베풀지 않았다. 이런 건 아무리 잔인해도 빠르게 끝내는 게 서로에게 좋다는 것 또한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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