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깜
너는 늘 나를 밝히지.
나는 눈을 감은 채 차마 할 수 없는 말을 삼켰다. 이든이 어떻게 알고 여기까지 왔을까. 그런 걸 물을 생각은 사라져 버렸다. 그는 여기에 왔고 나를 위로한다. 삼촌을 잃은 나를. 삼촌이라는 존재를 오랫동안 잃었던 내가, 겨우 찾은 삼촌을 스스로 죽여야 하는 상황에 처했던 것을 그는 위로하고 있다. 제온과 내가 마지막에 화해 비슷한 걸 하고 관계를 조금이나마 회복할 수 있었던 것은 제온이 죽음을 앞두었기 때문이었다는 게 참 아이러니하다. 그가 멀쩡히 살아서 권력을 탐할 수 있는 상태였다면 나에게 또 계집애 운운하며 모욕하고, 나는 그를 무시하는 것으로 온 세상에 그에 대한 경멸을 드러냈을 것이다.
하나의 악연이 달과 함께 지고 있었다. 부디 고이 잠들길, 바라 보았다. 가장 따뜻하고 달콤한 품 안에 있어서 그런 걸 바라면서도 쓸쓸하지도 씁쓸하지도 않을 수 있었다.
♡ 열한 번째 뒷장. 해가 잠드는 곳 ♡
실리는 피곤한 티를 내지 않는 사람이지만 나는 그녀가 지쳐 있다고 느꼈다. 별말은 없었지만 그녀는 조금 자고 싶어 하는 듯한 분위기였고, 그 희미한 분위기는 그녀에게 온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던 나에게 바로 전해졌다.
내게 배정된 침실은 전 공작 부인, 즉 실리 어머니의 침실이었다. 실리의 침실은 전 공작의 침실을 재단장해 만든 모양이지만 내 침실은 아무래도 내가 하스트레드까지 올 일은 없다고 판단한 듯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공작의 침실을 빼면 내게 주어질 곳은 공작 부인의 방뿐이다. 이곳을 내 침실로 단장하는 건 당연한 일이나 그렇게 되면 실리는 어머니와의 장소를 하나 더 잃는 것이니까 가능하면 그 시간을 더 늦추고 싶었을 것이다.
“보시다시피 숙녀분의 취향에 맞춰져 있는지라….”
하스트레드의 집사장이 나를 객실로 보내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나는 이곳이 마음에 들었다. 무엇보다 가장 마음에 드는 건 누군가가 그린 그림이 작은 액자에 끼워져 장식장 위에 놓여 있는 것이었다. 그 그림은 어떤 아기를 그린 것이었는데 그냥 봐도 실리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누가 그린 걸까? 아마 일리드 사리안이나 혹은 이 방의 주인이었던 공작 부인이 그린 것 같은데 잘 그리기도 했지만 애정이 느껴지는 그림이었다.
실리의 어머니는 독서를 좋아했던 것 같다. 방에는 공작 부인이 책을 읽고 감상을 빼곡하게 적어 놓은 수십 권의 노트가 있었다. 딱히 재밌진 않았으나 그녀의 관점을 명확하게 보여 주는 메모들이었다. 그리고 언젠가부터.
‘세실리아, 엄마가 오늘 읽은 책은 ’탐욕의 계단‘이라는 책이었어.’라는 편지로 변했다.
세실리아, 그게 누구인지는 너무나 잘 알 수 있었다. ‘세실리아, 엄마가 오늘은….’이라고 시작되는 편지들은 가면 갈수록 일상적인 것으로 바뀌어 갔다. 꽃을 본 이야기, 남편과 여행에 대해 계획을 짠 이야기. 독서 감상이 주를 이루었던 노트들은 어느새 딸에게 보내는 편지문을 빙자한 일기가 되어 가고 있었다.
실리의 모친은 몸이 약했지만 모험심은 있었던 사람인 것 같다. 그녀는 멀리 가 보고 싶어 했다. 그녀의 남편은 언제나 그런 그녀에게 수십 가지의 희귀한 물건들을 선물하고 아름다운 것들을 보여 주려 노력했다. 그러나 그녀는 아팠기 때문에 약초가 매우 풍요로운 하스트레드에서 거의 벗어날 수가 없었다. 공작 부인이면서도 사교계 시즌에 수도에도 가지 못할 정도로 그녀는 아주 병약했다.
그녀가 그리는 일리드 사리안이라는 남자는 내가 들어 왔던 그 사람과는 아주 딴판이었다. ‘남편’이라는 한 단어로 묘사되는 그는 사려 깊고 다정한 로맨티시스트였다. 솔직히 그로스랜 귀족 사회에 저런 남편이 있을 수 있나 싶을 정도로 그는 헌신적인 남자기도 했다. 아내가 몸이 아플 때 밤새도록 그녀의 몸을 주무르면서도 그녀가 조금이라도 덜 아프고 웃을 수 있게 끊임없이 실없는 농담을 이어 나가는 사람이고, 그녀가 먹어 보고 싶다고 한 음식은 대륙 반대편에 있는 것이라도 어떻게든 구해 와 한 입이라도 먹여 주는 사람이었다.
실리의 모친은 어떻게든 살아남으려 했다. 자식과 남편과 먼 곳의 아름다운 풍경을 보는 것이 그녀의 큰 꿈이었다. ‘할 수 있어.’ 몇 번이고 그녀는 그렇게 썼다. 아름답다고 들었다며 남편에게 들은 걸 묘사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녀의 일기장은 가면 갈수록 그 글씨가 엉망으로 변해 갔다. 글씨를 제대로 쓸 수 없을 정도로 그녀의 상태가 악화되어 감을 짐작할 수 있었다.
‘세실리아.’
마지막 글은 거의 알아볼 수 없을 지경이었다. 너무 흘려 쓴 데다가 얼룩까지 져 있었기 때문이다. 아마 눈물인 것 같았다.
‘엄마가 죽으면 아빠는 어떡하지?’
아무에게도 할 수 없는 말.
남편은 필사적으로 그녀가 살 수 있다고, 우리는 행복할 거라고, 네가 보고 싶은 모든 곳을 가자고, 그렇게 말하고 있는데 부인은 죽음을 예감하고 있었다. 그녀는 남편의 앞에서는 필사적으로 밝은 척, 긍정적인 척했지만 사실은 죽음을 앞두고 삶을 마무리해야 하는 상황임을 알았다. 그리고 그녀가 가장 걱정하는 건 자신의 남편이었다.
그걸 그녀는 아무에게도 말할 수가 없어서 딸에게 묻고 있었다. 일기장에 토로하는 중이었다. 살고 싶은데, 무슨 대가든 좋으니까 치를 수 있는데, 그런 건 불가능했다. 그녀는 죽어 가는 중이었고 그녀는 코앞까지 다가온 죽음의 숨결을 느낄 수가 있었다.
‘아이를 낳고 나서는 아마 오래 버티지 못할 거야. 어쩌면 아이를 낳다 죽을지도 모르고.’
이상한 건 그녀의 남편인 일리드 사리안은 그녀가 죽을 거라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는 듯했다는 것이다. 그는 그녀가 낫고 있다고 믿는 듯 끊임없이 밝은 미래만을 이야기했고 그건 그녀에게 대단한 부담이 되고 있었다. 그녀는 매일 남편을 속이는 기분을 느껴야 했다. 자신이 떠난 뒤 이 헌신적인 남편은 어떻게 될 것인가. 어떻게 자신의 죽음을 대비시켜야 줘야 하는지 그녀는 엄두도 나지 않았다.
남편을 속이고만 있는 것 같은 부담감.
자신은 이미 죽어 가고 있는데, 남편은 마치 자신이 영원히 그의 곁에 존재할 것처럼 군다. 나중에 그가 겪을 상실감과 배신감을 그녀는 어떻게 감당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이렇게 있어서는 안 된다는 걸 알아.’
그녀의 쇠약한 글씨가 띄엄띄엄 그녀의 마음을 드러냈다.
‘그런데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를 모르겠어.’
마지막 글은 ‘사랑해, 일리.’로 끝났다. 남편이 보게 될까 봐 마지막 인사를 여기에 적은 그녀는 더 이상 일기를 쓰지 못했다. 날짜를 보았을 때 실리가 세 살 무렵쯤인 것 같았다.
이 일기에 등장하는 ‘남편’은 부인을 잃은 상실감을 견딜 수 있는 인물로 보이지 않았다. 그는 몸이 약한 부인을 거의 안고 다니다시피 했고, 그녀가 조금이라도 눈에 안 보이면 미친 듯이 찾아다녔으며, 그녀에게 약간의 아픔이라도 주는 모든 상황을 말살하려 했다. 그녀는 당장에라도 꺼져 버릴 비누 거품처럼 아주 조심스럽게 다루어졌다.
나는 실리에게 그런 식으로 행동하지 않는다. 그녀는 강하니까. 그리고 나는 그런 식으로 행동하는 게 그녀를 모욕하는 짓이라고 생각한다. 그녀는 보호받을 대상이지만 그와 동시에 한 기사단의 주인이고 가문의 가주이다. 나는 그녀를 존중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고 있다.
그런 나도 실리가 죽는다고 생각하면 눈앞이 까매지는 기분이 든다. 그건 추락이다. 갈 곳을 잃은 정도가 아니라 아예 공간의 부재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세계의 부재. 발판은 사라졌고 눈앞에는 그저 떨어져 가는 풍경들밖에 없다. 추락의 속도는 엄청날 것이고 나는 아무것도 잡지 못한다. 바람은 칼날이 되어 내 온몸을 갈기갈기 찢어 놓을 것이다. 그것이, 실리가 죽는다고 고작 상상만 했을 때 내가 겪는 데미지다.
그런데 실제로 겪은 일리드 사리안은….
심지어 그는 자신의 부인을 너무나 사랑하여 가능한 한 곁에서 떼어 놓지 않고 싶어 했던 남자였다. 그런 남자가 부인을 잃었을 때의 충격은 어느 정도였을까.
“아, 젠장.”
나도 모르게 욕설이 나왔다. 눈물이 뚝 떨어져 뺨을 타고 흐르는 차가운 감각을 느껴서였다. 아무도 없으니 망정이지, 강해지겠다고 하고선 울어 버렸다. 실리가 없다니, 그녀가 죽는다니, 그런 개 같은 세상을 도대체 어떻게 살아.
실리 모친의 일기장인지 독서 기록장인지 모를 노트를 있던 자리에 꽂아 놓으며 등을 돌렸다. 다시는 읽지 말자. 꼴도 보기 싫었다. 아무도 없어서 다행이다. 이렇게 감상적인 모습 따윈 아무에게도 보여 주고 싶지 않으니까.
***
아침을 먼저 들겠느냐는 집사장의 말에 기다리겠다고 하고 나선 여유롭게 신문을 봤다. 실리가 몇 시에 일어나는지 잘 알고 있었지만 그녀는 평소와는 달리 조금 늦잠을 잤고 그 때문에 내 아침 시간은 평소보다 조금 늦어졌다. 그 사실을 알게 된 그녀는 허둥지둥 달려와서 미안한 얼굴로 눈살을 찌푸렸다.
“먼저 드시지 그러셨습니까.”
나는 그런 그녀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늘 단정한 편인 그녀가 오늘따라 흐트러진 모습이었다. 셔츠도 조금 엉망이었고 머리카락도 풀어져 있었다. 잠에서 덜 깬 듯 부스스한 모습에 상기된 뺨을 보니 어쩔 수 없이 같이 눈을 뜬 아침에 보게 되는 그녀의 모습이 떠올라 아래에 열이 올랐다.
“같이 먹고 싶어서 그랬어. 별로 배도 안 고프고.”
나는 짐짓 아닌 척하며 식탁에 신문을 내려놓고 턱을 괴었다. 허리를 조금 비틀었는데 아래가 약간 당기는 게 불편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모습을 본 순간 실리의 눈이 약간 가늘어졌다. 그러더니 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체하며 나와 모서리를 사이에 둔 자리에 앉았다.
하인들이 사라지자마자 실리가 한숨을 쉬더니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전하, 남들은 모를 것 같긴 합니다만… 지금 허리, 조금, 움직이고 계십니다. 아주, 조금이긴 합니다만.”
그녀는 나에게 주의를 주고 있었다. 아아, 그제야 나는 내가 아주 느릿하게 자꾸 허리를 움직이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아, 그래. 나는 그녀를 안고 싶었다. 열어 놓은 창에서 바람이 불 때마다 그녀의 꽃향기가 내게로 날아들었다. 그 간지러운 감각조차 애무처럼 느껴졌다. 후우. 참고 있는 정욕이 한숨과 함께 흘러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