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깜
사람들은 이미 제온을 적으로 규정했다. 적이 더욱 고통스럽길 바라고 그 괴로움이 즐거운 눈요깃거리가 되기를 원하고 있었다. 하지만 내게는 그렇지 못했다. 나에게는 제온이 완전히 적이 될 수는 없었다. 그는 나의 삼촌이었다. 그와 나는 오랜 세월을 함께했고 그는 나에게 모욕을 주었지만 추억도 남긴 사람이었다.
내가 눈살을 찌푸리자 재판장이 교수형을 선언했다. 그러자 사람들이 아쉬워했다. 그래도 교수형도 나름의 즐길 거리라서 그런지 아이들은 꺄아아,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교수형에 처하기 직전에 제온은 나를 불렀다. 어차피 죽을 사람이었다. 아버지의 형제를 고문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 물론 궁금했다. 그가 누구를 아버지의 원수로 생각하고 있는지 그 이유는 무엇인지. 하지만 결국 물을 수 없었다. 그걸 묻기 위한 수단은 강경한 것밖에 생각나지 않았기 때문에.
“삼촌.”
창살문 너머에서 그를 부르자 그가 웃지도 못하고 울지도 못하는 이상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실리.”
오랜만에 들어 보는 이름이었다. 그는 나를 늘 재수 없는 계집애 따위로 불렀으니까.
악귀에 물들었던 나의 삼촌이 돌아온 기분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다른 삼촌들은 죽기 직전 그가 악귀에 물들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결국 악귀란 한쪽에서만 보이는 얼굴일지도. 다른 쪽에서 보면 천사일지도.
“실리, 할 말이 있어서 와 달라고 했어.”
“…….”
“일단 고맙다. 나 하나로 끝난 건 네 덕분이겠지. 일리였다면 나도 화형이었을 거고 내 가족들도 전부 화형대 신세였을 거야.”
“…….”
“하지만 실리, 그게 널 계집애로 만들어. 마음 약하게 굴지 마라.”
그가 말한 계집애라는 단어 중 유일하게, 정말 유일하게 날 모욕하지 않은 단어였다. 내가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자 그가 웃었다.
“넌 진짜 대단한 녀석이야.”
“…….”
“내가 했던 말들 다 신경 쓰지 마라.”
“…….”
“그 말 하려고 불렀다. 내가 했던 말들… 다 생각하지 마라. 그건 그냥, 우리가 라이벌이라서 한 소리니까.”
“…….”
“숙모랑 사촌들 좀 부탁해도 되겠니?”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는 내 대답을 안 듯 다시 웃었다. 오랜만에 보는 웃음이었다. 왜 죽기 직전에서야 그는 다시 내 삼촌이 될 수 있었던 걸까. 하스트레드의 단주라는 자리가 뭐기에. 이 상황에 진저리가 난다. 내가 그를 바라보며 침묵만 지키자 그가 갑자기 내 앞으로 다가왔다. 철창을 양손으로 움켜쥔 그가 내게 얼굴을 바짝 들이밀고 속삭였다.
“왕을 믿지 마.”
“……?”
“일리는 왕의 뒤를 캐고 있었어. 일리와 왕은 사이가 좋지 않았어. 일리는 선왕과 사이가 좋았거든. 그러니까. 믿으면 안 돼, 실리. 어쩌면 일리를 살해한 배후에는….”
크어억, 제온이 피를 토하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일이었다. 피가 검은색이었다. 저주? 아니, 이건 맹세의 저주다. 그는 이 일을 발설하지 않기로 누군가에게 맹세를 한 거다. 그리고 그 대가를 지금 치르고 있었다.
“문 열어!”
내가 고함을 질렀고 간수가 뛰어왔지만 바닥에 쓰러져 경련하던 제온은 이미 동공이 비어 있었다. ‘왕을 믿지 마. 믿으면 안 돼, 실리.’ 그는 목숨을 걸고 그 이야기를 해 주려 했다. 죽기 전에, 교수형이라는 단어가 나오기도 전에. 그걸 말린 건 나를 믿지 않아서가 아니라 삼촌들이 전부….
누군가가 하스트레드에 검은 손을 펼쳤다. 하스트레드는 내부에서 무너지고 있었다.
제온 삼촌의 장례식은 비공개로 치러졌다. 내가 참석했을 때 숙모는 나를 붙잡고 쓰러져 울었다. ‘고마워.’ 그녀는 연방 그렇게 말했지만 사실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며 내게 속삭였다. ‘어떻게 해야 할까, 실리. 어떻게 살아야 할까.’ 미망인이 된 그녀에게는 몇 안 되는 선택지만이 남겨져 있었고 그나마도 하나같이 예전의 삶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초라한 것들이었다. 마음속에 슬금슬금 올라오려는 동정이라는 이름이 새겨진 넝쿨의 싹을 자르며 나는 쌀쌀맞게 말했다.
“힘을 내셔야겠지요.”
무덤덤한 말에 숙모가 내 얼굴을 보더니 우는 얼굴로 조금 웃었다.
“알고 있니, 얘야. 제온이 늘 너의 버릇에 대해 투덜거리던 걸.”
“제 버릇이요?”
“그 애는 억지로 강한 척을 할 때 이렇게.”
숙모의 우아한 손가락 끝이 내 미간에 닿았다.
“눈썹이 평평해진다면서. 일리는 마음 약한 딸을 억지로 아들로 키우려 들고 있다고, 자연의 섭리를 배반하여 너를 괴롭힌다고 그랬지.”
반은 틀린 말.
독선적인 사람.
“그랬나요….”
사람이 죽으면 왜 미움이 희석되는 걸까. 이래서 차라리 전쟁이 낫다. 전쟁은 적과 아군의 구분이 확실하니까. 이런 식으로 죽은 다음에 사람의 뒷맛을 씁쓸하게 하진 않으니까….
제온 삼촌은 하스트레드의 장로 중 가장 권한이 막강한 사람이었지만 그 말로는 쓸쓸했다. 다들 내 반응이 무서운지 장례식에 참석하질 않아서 참 초라하고 쓸쓸한 마지막이 되었다. 심지어 삼촌이 시킨 결혼으로 불행해졌다고 믿는 두 딸은 마법 전보 하나 보내지 않았다.
그는 나쁜 사람이었을까, 좋은 사람이었을까.
숙모는 어깨를 떨며 울었다. 그의 죽음을 진심으로 슬퍼하는 부인, 그의 죽음에 전보 한 장 보낼 가치를 못 느끼는 두 딸, 그리고 그를 죽인 조카. 세상의 가치는 늘 혼돈으로 가득하다.
자정, 바닷가는 유독 찬바람이 감돌았다.
“제온 지 사리안, 자식을 사랑한 아버지이자….”
신관의 이야기가 공허하게 귀를 스쳐 바람과 함께 날아갔다. 달빛이 아른아른 빛나는 수평선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해가 잠드는 곳, 그곳에 이제 삼촌도 간다. 거기에는 수많은 선조와 함께 내 아버지도 계시겠지. 아버지는 삼촌을 어떻게 맞을까. 반갑게 맞아 줄까. 다정하게 끌어안아 줄까. 아니면 평소처럼 힐난하고 못나게 취급할까.
아버지가 삼촌을 마중 나왔으면 한다. 상냥한 마중이었으면 좋겠다. 둘은 어릴 때 사이가 좋은 형제였다고 들었다. 다시 그런 형제로 돌아갈 수 있기를. 그곳에서는, 그곳에서만이라도.
수평선 너머에서 배가 한 대 다가오고 있었다. 그래, 누군가는 가고 또 누군가는 오지. 삼촌은 가고 또 누군가는 태어났겠지. 그 누군가는 그리고….
“이르시아스 대공의 문장이다.”
누군가가 하는 말에 퍼뜩 정신이 들었다. 자세히 보니 정말 이르시아스 대공의 문장이었다. 대공의 배, 그러니까 이든의 배였다. 이든의 배가 이 시간에 왜 여기에 있는 거지? 심지어 나는 알지도 못하는 배였다. 저런 배가 있었나? 그런 생각을 할 때 갑판에 나와 있는 사람이 보였다.
저 얼굴은 착각하려야 착각할 수가 없지.
아름다운 얼굴이 달빛을 받아 평소보다 더 희고 요요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는 케이프 코트를 입은 채 내 쪽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는데 무표정한 얼굴이라 서신 한 장만 남기고 떠나온 나에게 화가 난 건지 속이 상한 건지 가늠하기가 어려웠다. 배는 쾌속선의 형태였지만 그 배가 실을 수 있는 한도 내에서는 잘 무장한 것으로 보였다. 아주 비싼 마법 무기들이 줄줄이 늘어서 있는 걸 보았을 때 선원들도 아주 숙련되고 몸값 비싼 이들일 것이다. 물론 이든은 돈이 많고 자신의 안전에 심혈을 기울여야 할 상황인 것도 맞다. 하지만 저런 선원들은 돈만 가지고는 구할 수가 없다. 인맥이 필요한데 어디서 구했을까?
그는 나의 피보호자였다. 나는 그를 보호하고 그를 가르쳤다. 그러나 이제 그는 성인이 되었고 내 울타리를 훌쩍 넘어서 버렸다. 이럴 때마다 조금 쓴웃음이 나왔다.
배는 항구에 세워졌고 이든은 배에서 내리며 고개를 들어 성벽에 서 있는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그는 곧 성큼성큼 걷기 시작했다.
“저분이, 이르시아스 대공?”
숙모님이 놀라서 내게 물으셨다. 고개를 끄덕이자 “어머, 여드름 난 빨간 고수머리 소년이라고 들었는데….”라고 말씀하시고는 서둘러 입을 다무셨다. 그 소문은 다소 악질적인 것이었다. 그를 더 어리게, 나를 더 나이 들게 묘사하고 있는 소문에 대해 나 또한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사실 그 소문은 제온 삼촌의 진영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러나 숙모조차 그 소문에 휘둘리고 계실 줄은 몰랐다. 그 소문에 의하면 나는 ‘매부리코에 주름이 벌써 자글자글한 늙은 마녀’이기 때문이다. 다른 건 다 개인이 보기 나름이라고 해도 나는 매부리코가 아니다. 마녀는 더더욱 아니고. 신력의 소유자에게 무슨 망발인가.
이든의 아름다움에 놀라 숙모님의 눈물이 쏙 들어갔다. 숙모님은 이 초라한 장례식에 이르시아스 대공이라는 거물이 온 것이 기쁘면서도 부끄러운지 하인들을 재촉하여 주변 정리를 하려고 했다. 이든은 빠르게 올라오고 있었고 그사이에 하인들이 이 난장판을 치우는 건 불가능한 일인데도 숙모는 히스테릭하게 재촉했다. 하인들은 어떻게든 하는 시늉이라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곧 이든이 나타났다.
그는 밤에 오는 악마 같았다. 새까만 코트에 빛나는 머리카락. 너무 아름답고 너무 꿈결 같아서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모두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누군가가 툭, 물건을 떨어뜨리는 소리가 났다. 이든의 얼굴을 보느라 손에서 힘이 빠졌는데 정작 본인은 자신의 손에서 힘이 빠져 물건이 떨어졌다는 것도 모르는 듯했다.
이든은 그런 사람들의 태도가 익숙한 듯 전혀 개의치 않고 내게 다가왔다. 그리고 그는 나를 끌어안았다. 한 팔로 나를 끌어안은 그가 도닥거리면서 내 귓가에 속삭였다.
“잘 견뎠어.”
너는, 내가 견디고 있음을 도대체 어떻게 알고 있을까.
나는 말랐지만 커다란 품에 잠시 이마를 대고 있다가 고개를 들었다. 고개를 들면 해가 잠드는 곳, 달과 바다가 만나는 지점이 멀리 보였다. 달은 바다와 만났다. 이제 사라지려는 달은 가장 밝게 힘껏 빛나고 있었다. 얼마나 빛나는지 영롱하다는 표현을 써도 될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