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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배의 꽃-65화 (64/94)

<☆65>깜

“하스트레드를 배신한 대가를 치를 준비는 되었겠지.”

내가 말했을 때였다. 제온의 눈이 분노와 고통으로 시뻘겋게 물들었다. 그는 뭐라고 내게 중얼거렸다. 재갈이 물려 있어서 말은 잘 들리지 않았지만 그는 분명 뭐라 말하는 중이었다. 눈이 아까와는 달리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무슨 말인지 궁금해서 재갈을 빼내자 그가 말했다.

“하스트레드가 날 배신한 거다.”

그의 목에서 쇳소리가 났다. 그는 뭐라고 말을 하려다 입을 벙긋거렸다. 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할 말이 너무 많은 것 같았다. 그는 한 맺힌 말들을 하려다 멈추고 또 하려다 멈추더니 한마디 더 중얼거렸다.

“이따위 꼴을 보려고 내가 인생을 바친 게 아니야….”

나는 제온이 하스트레드에 인생을 바쳤다는 이야기는 들어 본 적이 없다. 아버지는 늘 그를 두고 멸칭만 사용하셨으니까. 하지만 지금의 그는 진심으로 분하고 고통스러워 보였다.

어쩌면 그도 인생의 어느 한순간에는 하스트레드에 모든 것을 바치는 기사 중 한 명이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는 변심했다. 그의 변심은 그로 인한 것이었을까, 아니면 타인, 예를 들면 내 아버지의 멸시 같은 것 때문이었을까.

내 아버지, 일리드 사리안은 냉혈한으로 이름이 높았다. 그는 가족을 사랑했지만 가족, 그러니까 돌아가신 내 어머니와 나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사랑하지 않았다. 자신의 형제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선택한 가족 외에는 아무도 가족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괴짜였다. 그는 여러모로 저주사를 당할 만한 사람이었다. 수많은 사람을 모욕하고 그들의 인생을 멸시했다. 하지만 그는 내 아버지였다.

“제온 삼촌.”

내가 그를 부르자 그가 나를 올려다보았다. 모든 걸 잃은 것 같기도 하고 세상에 배신당한 것 같기도 한 어떤 남자의 초라한 얼굴이 보였다.

“아버지를 죽인 게 삼촌입니까?”

“일리는 내 형이야!”

제온이 피를 토하듯이 고함을 질렀다. 비명이 공간을 찢었다.

“일리는 나를 한 번도 제대로 본 적도 없지만, 나를 쓸모없는 등신처럼 여겼지만, 그래도 일리는 내게 자랑스러운 형이었어! 네가 감히, 네가 감히 일리와 나에 대해 뭘 안다고 그따위 소리를 해! 네가 감히!”

그와 내 사이에는 비이성적인 공기만 가득 차 있는 것 같았다. 그는 이성을 완전히 놓고 있었고 이야기가 잘 통하지 않았다. 하지만 하나는 알 수 있었다. 그는 지금 자신이 악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 오히려 본인이 배신당했다고 생각하며 피해자라고 여긴다는 것.

문득 생각이 났다. 제온은 내가 어릴 때 나에게 화관을 만들어 준 적이 있었다. 화관은 참 누덕누덕 기워져 있었지만 그건 제온 삼촌이 내게 직접 만들어 준 것이었다. 그는 그때도 그렇게 말했었다. 여자애들은 이런 걸 좋아하지. 그는 분명 언젠가는 나를 예뻐했고 언젠가는 내 편이기도 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에 나를 증오하게 되었다.

생각해 보면 그의 딸들은 하스트레드의 이익을 위한 결혼을 했다. 내 아버지는 정작 나는 그렇게 결혼시키고 싶어 하지 않으셨다. 나의 사촌은 두 명이었는데 둘 다 결혼 생활이 그다지 행복하지 못했다. 남편 하나는 난봉꾼이었고 하나는 아예 여자에게 관심이 없었다. 그녀들의 불행은 하스트레드를 위해서였다. 그래, 그랬지. 나는 그게 제온 삼촌의 야망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어쩌면 삼촌은 하스트레드를 위해서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재판을 준비해.”

몸을 일으키며 명령하자 리온이 후후, 웃으며 “예, 주군.” 하고 나갔다. 그는 아주 기쁘게 제온의 모든 삶과 명예를 산산조각 낼 생각인 듯했다. 하지만 나는 그럴 투지를 잃어버렸다.

밖으로 나와 성안의 정원을 가로지르다 하늘을 보니 하늘이 청회색이었다. 왠지 모르게 옌선의 하늘은 눈부실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기엔 찬란한 사람이 있으니.

그건 왠지 위로가 되었다. 당신이 있는 곳은 환하겠지. 그 생각이 내 마음에 작은 촛불을 켜 주었다.

***

재판이 열리는 데는 꼬박 열흘이 걸렸다.

제온의 편이었던 다른 삼촌들이 죽을힘을 다해 하스트레드로 달려왔다. 그리고 그를 변호할 권리를 주장했다. 당연히 하스트레드 내부에서는 좋은 반응이 나오지 않았다. 제온 삼촌은 계약자인 왕을 습격했다. 다른 사람이라면 즉결 처형이 될 일을 장로라는 이유로 재판에 서게 되는 특혜를 받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이 와중에 평소에는 하스트레드 일에 방관만 하던 장로의 반이 변호를 하겠다며 달려왔으니 다들 보는 눈이 곱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이미 제온 삼촌을 제외한 관련자들은 계속 목이 잘려 하스트레드 성으로 들어오는 교차로에 목이 걸리고 있었다. 살벌할 정도로 많이 걸린 수급들에 누군가는 눈살을 찌푸렸고 누군가는 까무러쳤다. 누군가는 교차로에 서 있는 견습 기사의 멱살을 쥐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잘린 목이 다시 붙지는 않는다.

“너는 정말 발칙하기 짝이 없는 계집애구나!”

삼촌들은 나를 하스트레드의 주인이 아닌 그냥 계집애라고 매도했다. 이제 우리 모두는 막장에 다다른 것 같았다. 분위기는 험악해졌다. 리온이 스르릉 소리를 내며 검을 뽑으려 하자 다른 삼촌이 “무엄한 놈!”이라고 고함을 질렀다. 홀의 공기는 적의와 악의로 가득 찼다.

주먹을 쥐고 삼촌의 뺨을 후려쳐 주자 삼촌이 악 소리를 내며 바닥에 쓰러졌다. 때리기 직전 건틀릿을 벗은 건 그가 아버지의 형제이기 때문이다. 그게 아니라면 건틀릿을 낀 손으로 목을 졸라 버렸을 것이다. 그럼 목뼈가 나갔겠지.

내가 내려다보는 눈길에 삼촌이 움찔 떨었다. 그러더니 부르르 떨면서 그의 바지춤이 젖어 들었다. 아아. 누군가가 질린 목소리로 신음했다.

“지안튼.”

내가 집사장을 부르자 그가 공손히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리고 내 명령을 기다리지도 않은 채 삼촌을 부축해 일으켰다. 지안튼의 눈에 멸시가 지나갔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내 눈에도 보였고 삼촌의 눈에도 보인 것 같았다. 삼촌이 지안튼을 후려치려고 해서 내가 그 손목을 잡았다.

“내 집사장이지, 삼촌의 종이 아니야.”

내가 존대해 주지 않자 삼촌은 화가 나서 얼굴이 붉어졌다. 하지만 그는 곧 나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내가 무서운 것 같았다.

홀을 나가기 전 다른 삼촌들에게도 눈길을 주었다. 나는 그들이 나를 어떻게 바라보는지 좀 궁금해졌다. 발칙한 계집애. 계집애 주제에 하스트레드의 정점에 서서 오랜 전통을 가진 기사단을 망칠 계집애. 그렇게 나를 칭하는 그들이 나를 어떤 눈으로 보고 있는지 재판 전 마지막으로 한 번 확인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눈이 마주칠 때마다 삼촌들은 서둘러 내게서 시선을 돌렸다. 눈이 마주치면 나에게 맞기라도 할 것처럼. 두려워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눈에 띄는 걸 겁내 하는 사람도 있었다. 우스워졌다. 고작 이 한 대가 무섭나. 당신들이 내게 저질렀던 그 수많은 폭언들은 별게 아니고? 나에 대한 공개적 모욕들은 다 괜찮고?

픽 웃음이 났다. 세상이 다 이렇지.

내가 홀을 나서려 하자 내 뒤로 소피와 크라이스가 따라붙었다. 잠깐, 소피와 크라이스? 나는 움직이지 않으려고 하는 리온을 돌아보았다. 내 눈길을 받은 리온이 후후 웃으며 말했다.

“저는 장로님들과 용건이 좀 남았습니다, 주군.”

“…살살해.”

아직 장로니깐.

내 눈빛에서 첨언을 읽은 리온이 더 음산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공손하게 대화하겠습니다.”

“…….”

“자격이 있으신 만큼은요.”

하아, 바람이 빠지는 것처럼 나는 웃었다. 여기서 리온과 티격태격하고 싶지도 않았고 리온이 어떤 말로 삼촌들을 쥐락펴락하며 괴롭힐지도 관심 밖이었다.

어차피 나는 낙인이 찍힌다. 어차피 찍힐 낙인이라면 하나가 찍히든 두 개가 찍히든 무슨 상관일까. 그리고 낙인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삼촌들을 대하는 방법도 더 이상 유할 이유가 없다.

내 태도가 완전히 바뀐 것을 알게 된 삼촌들이 침묵하는 게 보였다. 우스운 일이다. 그동안 늘 그렇게 여자를 운운했고 방금 전까지도 계집애라고 하던 삼촌들이 정작 지금에 와서는 조용해졌다. 결국 그들은 내가 허용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기에 오만한 태도를 취한 것이다. 조카와 삼촌이라는 간판을 등에 업고서.

“실리!”

내가 나가기 직전에 나를 부른 건 제온 삼촌이었다. 내가 뒤를 돌자 그가 물었다.

“일리를 죽인 사람을 찾고는 있는 거냐?”

“당연히.”

“우리는 그 사람이….”

제온이 말을 하려던 순간, 다른 삼촌이 그를 막았다.

“하지 마, 제온!”

그 날카로운 목소리에 제온이 입을 다물었다. 우리는 그 사람이? 내 아버지를 죽인 사람? 그에 대해 뭔가를 알고 있는 건가? 나는 잠시 제온을 내려다보았지만 제온은 결국 고개를 돌려 나를 외면했다.

“제온 삼촌.”

내가 그를 불렀지만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를 재촉하려다 결국 그만두었다. 이제 곧 재판이 시작될 터였다. 파멸을 앞둔 사람에게 내 원한을 돌봐 달라고 이야기하는 건 곤란한 일이었다. 나는 한숨을 쉬며 잠시 제온의 양심이 제 기능을 하여 형의 원수를 내게 공유해 주길, 그리하여 그 원수를 갚을 수 있게 해 주길 기다리다 결국 그 장소를 나왔다.

재판은 아주 간단하게 끝났다. 숨 막히게 달려왔으면서도 삼촌들은 내 태도와 재판장의 과격한 분위기에 놀라 제온 삼촌의 변호를 포기했다. 하스트레드 사람들은 하스트레드 기사의 가족들이었다. 당연히 그들은 하스트레드가 중요시하는 가치가 뭔지 잘 알았고, 하스트레드가 계약을 왜 잘 지켜야 하는지 그 이유를 뼈에 새겨 놓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하스트레드의 계약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자신들의 목숨도 바칠 수 있는 사람들은 제온의 행위에 매우 분노했고 공개 재판장의 피고석에 돌이 끊임없이 날아왔다. 욕설은 아주 노골적인 것들이었다. 죽어, 죽어 버려! 아이들까지 천진난만하게 소리를 지르기 시작하자 분위기는 무시무시했다.

재판장이 선고를 하기 전 하스트레드의 주민들이 고함을 질렀다. 화형, 화형, 화형! 오랜만에 볼거리를 원하는 사람들의 바람에 재판장이 흠흠, 헛기침을 하며 나를 바라보았다. 내 혈족인 만큼 나의 허락을 바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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