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경배의 꽃-64화 (63/94)

<☆64>깜

“곤란한 일이군.”

나는 범인을 한참 응시하다 한마디 중얼거렸다. 내 말에 범인이 몸을 움찔 떨었다.

내 결혼식은 하스트레드가 아닌 옌선에서 진행되었지만 당연히 하스트레드에서도 성대한 파티가 열렸다. 하스트레드 성에서는 한 달 내내 성안의 사람들에게 수많은 식사와 볼거리들이 제공되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어떤 용병이 문제를 일으켰다.

그는 떠돌아다니는 용병으로 스스로를 기사라고 말하는 사람이었는데 나를 비방하며 화를 냈다. 내가 왕의 개라면서 결국 왕가에 빌붙었다고 막말을 내뱉었다. 그리고 여자는 하스트레드의 주인이 될 자격이 없다며 자신이라면 내 배에 칼을 꽂았을 거라고 소리를 질렀다. 그러다가 당연히 성의 경비병들에게 붙잡혀 감옥에 갇혔다. 그러나 축제 때문에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감옥은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그리고 누군가가 그를 탈출시키고 돈을 주며 이스트럼의 위치와 잠입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 주었다.

…당연한 얘기지만, 이 용병은 진짜 용병이었고 우리가 고용한 자였다. 그는 돈이 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하는 남자로 기사가 될 생각은 추호도 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하스트레드에서 기다리고 있던 내 기사들에게 이 사실을 알려 주고 막대한 대가를 받은 뒤 종적을 감췄다. 그리고 우리는 배신자를 찾아냈다.

그 배신자는 축제 분위기에 빠진 하스트레드의, 아무도 관심을 주지 않는 지하 감옥에서 고초를 겪으며 모든 것을 털어놓은 뒤 내 결혼식 날짜에 맞추어 옌선에 도착했다.

“참으로 곤란한 일이야.”

내 말에 범인, 로스토프가 움찔거렸다. 온몸에 피딱지가 앉아 있는 그는 이제 정말 내가 두려워진 모양이었다.

“어째서였을까. 나는 분명히 네게 경고를 해 주었던 거 같은데.”

내가 여자라서, 자신의 제자였어서, 어릴 때부터 봤었기 때문에, 나를 주인으로서 탐탁잖게 여겼던 로스토프는 이제 나와 눈도 못 마주치고 있었다. 참으로 곤란한 일이다. 나는 사실 로스토프를 죽이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를 고문하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그는 내 스승의 목록에 포함된 자니까.

“자, 로시. 우리는 이야기를 쉽게 끝낼 수도 있어.”

“…….”

“하지만 어렵게 끝내겠다면 기꺼이 그렇게 해 주지. 말해 두지만 네가 지금까지 겪었던 것과는 비교도 안 될 거야.”

내가 말했잖아, 로시. 나를 가장 무서워해야 한다고.

내가 손을 내밀자 소피가 내 손에 자신의 단검을 공손히 놓아 주었다. 그 단검을 검집에서 꺼내며 생각했다. 참 익숙하다고. 꿈결 같은 아침은 다 어디에 갔지? 또 별빛이 어린 듯한 그 첫날밤의 이야기들은 또 어디에 조각난 채 떠돌고 있을까.

이든, 네가 이 모습을 몰랐으면 해.

너의 눈이 언제나 나를 자랑스러워하고 눈부셔하는 걸 알고 있지. 그러니까 너는 영원히. 나중에 혹여 우리가 엇갈리는 그날이 오더라도.

이 모습은 모르고 돌아섰으면 좋겠다.

“이야기를 해 보지.”

로스토프의 눈에 공포가 서린 걸 보면서 그저 웃었다. 이 모든 게 익숙했다. 진저리가 날 정도로.

“시간은 기니까.”

로스토프는 당연하게도 오래 버티질 못했다. 그가 말한 이름은 나의 삼촌 중 한 명이었다. 제온이라는 이름의 삼촌은 나를 ‘어린 계집애’라고 공공연히 말하고 다녔는데 내가 열다섯 살 때에도 그러했고 서른다섯 살이 된 지금도 그런 멸칭을 썼다. 내가 없는 자리에서 나를 모욕하며 자신이 강하다는 걸 입증하려고 했다. 그의 패거리들은 그런 그를 더욱 부추겼고 그렇게 그의 자아는 비대해졌다.

아버지의 형제만 아니었다면 제온은 이미 시신이 누더기가 되어 소느르강에서 발견되었을 것이다. 그것이 내 명예를 모욕한 자에게 합당한 대가니까. 하지만 그는 아버지의 형제였고 그 점이 늘 나를 멈추게 했다. 하스트레드 기사들은 그를 어떻게든 갈기갈기 찢고 싶어 안달 냈지만 나로서는 그럴 수가 없었다. 나는 어린 나이와 여자라는 핸디캡을 안고 단주가 되었다. 그 상황에서 아버지의 형제들을 단죄한다는 건 내게 리스크가 너무 컸다.

“이건 선을 넘은 정도가 아니라 강을 건넌 겁니다.”

크라이스가 분노한 얼굴로 말했다. 소피는 이럴 때 조금 침묵을 오래 지키는 편이었는데 그녀는 정치에 약간 자신 없어 하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 정치에 닳을 대로 닳은 리온은 턱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죽이는 걸로는 부족해.”

리온의 말은 목숨을 받아 내고 입을 영원히 다물게 하는 것으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나는 리온의 말에 동의했다. 이미 죽이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게 되었다.

하스트레드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건 구성원의 자유이고,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하스트레드의 힘이며 그 힘을 사용하는 수단이 바로 계약이다. 우리는 계약을 하고 그 대가로 많은 것을 얻어 왔는데 제온 삼촌은 우리의 계약을 위험하게 만들었다. 우리의 계약자를 공격함으로써. 이건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이었다.

“재판을 연다.”

하스트레드의 영지에서, 우리들의 법으로 재판을 연다. 그게 무슨 뜻인지 아는 기사들의 얼굴에 비장함이 서렸다. 아버지의 형제를 재판한다는 건 내게도 하나의 낙인이 찍히게 되는 셈이다. 알지만 이건 피할 수 없다. 그는 이미 계약자인 왕을 공격했다. 한 번 시도했으면 두 번도 세 번도 가능하다. 뿌리를 뽑아야 했다.

“크라이스.”

잠시 눈을 감고 제온을 떠올렸다.

그는 어릴 때 나를 무척 예뻐했었다… 라고 나는 기억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애매하긴 하다. 그는 나에게 인형을 사다 주기도 하고 드레스를 선물하기도 했다. 내 아버지는 그가 선물하는 모든 것들을 싫어했다. 물론 내 아버지께서는 친척들을 다 싫어하시는 분이었다. 그들을 박쥐니 쥐새끼니 하셨으니까. 그러나 그들 중 가장 싫어하는 사람을 하나 꼽으라면 첫손가락에 들어갈 사람이 제온이었다.

제온은 늘 나에게 여자애는 예뻐야 하는데 너는 참 예뻐서 다행이라든가 그 비슷한 말을 서슴없이 했다. 내가 검을 잡을 때마다 여자애가 무슨 검이냐며 다치니 그만두라고 말렸고, 내가 성검사가 되었을 때는 세상이 망할 징조라며 대놓고 침을 뱉었다. 물론 내 앞에서, 혹은 아버지 앞에서 그러지는 못했다. 단지 점점 멀어졌을 뿐이지. 그리고 자신의 저택에서 침을 뱉으며 우리를 욕하고는 했다. 그리고 아버지는 멀리서 그 이상의 독설을 내뿜으셨고. 그렇게 둘은 먼 거리를 두고 서로를 욕하는 사이로 발전해 왔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상속권 분쟁에서 내가 승리하고 나서는 나를 ‘망할 년’이라든가 하는 말로 불러 댔는데, 그가 그렇게 불러도 주변 사람들은 감히 거기에 동조하진 못했다. 그게 그를 더 불편하게 했고 그래서 그는 더 괴팍해졌다고 들었다.

“하스트레드로 잡아 와.”

“예, 주군.”

내 명령에 크라이스가 대답하고는 곧바로 뛰어나갔다. 여기서 하스트레드까지는 말을 꼬박 달리면 이틀이면 당도할 수 있다. 나는 승마술에 약한 이들은 일행에서 제외하고 말을 달리는 데 익숙한 이들만 일행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하스트레드로 출발하기 직전, 이든을 떠올렸다.

이든에게 이야기를 해 주고 갈 수 있으면 좋으련만.

이건 가능한 빠르게 움직여야 한다. 왕의 귀에 들어가기 전에 하스트레드로 이동해서 제온의 죄를 단죄한 뒤 왕의 앞으로 끌고 갈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우리의 죄가 될 수도 있는 이 일에서 하스트레드와 제온을 분리시킬 방도도 궁리해 내야 했다. 그러니까 나는 시간이 없었다. 이든이라는 꿈에 젖기에 내 현실은 너무 높고 차가운 벽과 같았다.

편지지를 꺼내 잠시 고민하다 편지를 썼다.

[  하스트레드에 다녀오겠습니다.  ]

그렇게 쓰고 나니 할 말이 없었다. 잠시 고민하다 한마디 더 덧붙였다.

[  건강하세요.  ]

더 쓰고 싶었지만 더 이상은 정말 덧붙일 말이 없었다. 서명을 한 뒤 서신을 봉투에 넣어 봉하고 견습 기사에게 건넨 뒤 등을 돌렸다. 그가 서운해할까. 걱정이 잠깐 머리를 스쳤지만 곧 머리는 깨끗하게 비워졌다. 긴 시간 말을 타야 할 거고 그다음엔 아버지의 형제, 나의 삼촌, 그리고 우리의 장로인 사람을 공개 재판장에 세워야 한다. 개인사는 잊을 때다.

***

끌려온 제온은 얼굴은 먼지로 새까맸고 몸은 상처투성이었다. 옛날의 제온은 아주 눈에 띄는 수준은 아니었어도 꽤 유망한 기사였다고 했다. 그러나 내 기억 속의 제온은 살이 많이 쪘고 검을 드는 법 자체를 잊은 것 같은 사람이었다. 그는 하스트레드로 끌려오는 동안 죄인 취급을 받았다. 즉 말 등에 짐짝처럼 얹어져서 일정 시간마다 말을 바꿔 가며 계속 달려서 하스트레드에 당도한 것이다. 짐짝처럼 실려서 이틀을 달려왔으니 당연히 그의 얼굴은 핼쑥했고 상태도 최악이었다. 그는 내게 저주를 퍼부었다.

“너 같은 년은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어!”

그의 저주는 솔직히 귀가 간지럽지도 않았으므로 나는 듣는 둥 마는 둥 했지만 내 기사들은 상황이 달랐다. 크라이스는 당장에라도 검을 빼 들 기세였고 내가 보호막으로 누르지 않았더라면 소피는 이미 그를 통구이로 만들었을 게 틀림없었다. 그리고 리온은.

“후, 후후, 후후후.”

이렇게 불길하게 웃기만 했다.

저걸 어떻게 토막 낼까 상상하고 있는 게 눈에 훤히 보였다. 다들 제온에게 악감정을 듬뿍 가지고 있는 가운데 나는 바닥에 뒹굴고 있는 제온의 앞에 쪼그리고 앉아 그를 바라보았다. 리온의 음산한 웃음소리를 듣고 있던 견습 기사들이 그의 눈치를 보며 제온의 입에 재갈을 물렸다.

“오랜만.”

내 반말에 그의 얼굴이 사나워졌다. 뭐라고? 그가 당장에라도 내게 욕을 퍼부을 것 같았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의 입에 재갈이 물려 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애초에 그는 지금 죄인의 신세였기 때문이다.

“나는 너를 오랫동안 두고 봤는데.”

“……!”

“너는 결국 나를 실망시키는구나, 제온.”

제온은 내 반말에 얼굴이 시뻘게져 뭐라고 욕을 했다. 재갈 안쪽으로 욕이 끊임없이 쏟아졌다. 뺨을 한 대 때려 줄까 하다가 조금 더 정신을 차리게 하는 게 좋겠다 싶어서 주먹으로 턱을 후려쳐 주었다. 턱이 부서지는 느낌이 손끝에서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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