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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배의 꽃-62화 (61/94)

<☆62>깜

라스나티프의 신관들은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모욕과 투쟁심으로 점철된 그들의 눈을 보면서 속으로 웃었다. 한 놈쯤 혈기를 못 참고 나를 공격해도 좋을 것 같았다. 그 모든 것은 빌미로 작용될 테니까. 아니나 다를까, 가장 젊어 보이는 신관이 나를 공격하려는 순간이었다.

[멈춰!]

라스나티프가 날카롭게 소리 질렀다. 그녀의 언령이 빛의 사슬이 되어 젊은 신관을 꽁꽁 묶었다. 신관이 으윽, 하는 소리와 함께 털썩 무릎을 꿇고 주저앉았다.

“사죄 올립니다, 전하.”

라스나티프가 정중하게 내게 사과했지만 나는 그 사과를 받아 줄 생각이 없었다.

“너나 네 신관들이나 다 똑같군. 위아래를 모르는 무엄한 것들.”

내 말에 라스나티프가 곤란한 얼굴로 한숨을 쉬었다. 슬슬 시간이 다 되었을 것이다. 피로연이 열릴 시간이었고 나의 신부에게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나는 화사한 얼굴로 웃어 보였다.

“피로연에는 오지 말도록 해. 손님들 술맛 떨어지시니까.”

이익.

누군가가 내게 이를 갈았지만 나는 들은 체도 않고 집무실을 나왔다. 내가 이래도 라스나티프는 나를 버릴 수 없다. 나는 그걸 잘 알고 있다. 그녀는 왕이라면 아주 이를 갈고 있고 왕에게 대적할 만한 정통성을 가지고 있는 건 나뿐이니까. 하지만 그녀는 나를 모셔야지 나를 이용하려고 들어서는 안 된다. 누가 누구를 길들이게 될지, 두고 봐야 할 것이다.

라스나티프의 집무실을 나오자마자 음악 소리가 크게 들렸다. 악단들이 음악을 연주하고 있었다. 피로연장에 들어서자 제일 먼저 보인 건 내 배우자가 된 실리였다. 세실리아 사리안이 아니라 세실리아 그로스랜이 된 나의 실리. 그녀는 전통적인 피로연 복장을 입고 머리를 복잡하게 땋아 내린 모습에 신부의 화관을 쓴 모습이었다.

손님들은 자신의 위치에 맞는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가장 상석에 앉은 사람은 왕이었는데 실리의 오른쪽이었다. 왕은 실리와 무언가 심각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실리는 화관을 쓰고 있는데 신부라기보다는 여왕처럼 보였다. 그녀는 이 자리를 빛내는 자가 아니라 지배하는 자였다.

샹들리에 불빛이 일렁이는 홀 안에서 악단은 춤곡을 연주했다. 사람들은 플로어에서 춤을 췄다. 손과 손을 마주하고 빙글빙글 도는 춤은 피로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었다. 벌써 어느 테이블의 사람들은 거나하게 취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내 손님들은 구석에서 음험하게 도박을 벌이고 있었다. 상석은 정숙한 모습이었지만 말석으로 갈수록 흥청망청 취하고 있는 분위기가 이질적이었다. 모든 피로연이 그렇지만 내 결혼식의 피로연 또한 온갖 인간 군상이 다 모여서 하나의 불협화음을 연주 중이었다.

“하스트레드가 이토록 범인을 오래 못 찾는 건 드문 일이지 않나?”

가까이 가니 왕은 새 신부를 추궁 중이었다. 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그녀는 오늘의 주인공인데 왕은 그러거나 말거나 왜 왕실 습격의 범인을 못 찾아내고 있느냐고 닦달 중이었다.

“건국 이래 왕실이 습격당한 일도 처음이지요, 전하. 최선을 다하고 있지만 만만한 자들은 아닙니다. 상당히 치밀합니다.”

“치밀하다고 해도 너무 늦는군.”

“송구합니다.”

내 얼굴이 굳은 걸 본 왕비가 적절하게 끼어들었다.

“전하, 좋은 날입니다. 새 신부에게 덕담을 해 주셔야지요.”

왕비가 우아하게 부채를 부쳤다. 공작 깃털로 장식된 호사스러운 부채가 팔락거리는 것이 마치 나비의 날갯짓 같았다. 나는 그 부채를 빼앗아 갈기갈기 찢어서 왕비의 얼굴에 뿌려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때 나는 그녀가 내 어머니였다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다. 어린 시절에, 나는 그녀와 왕이 내 부모이길 소망했었다. 그들이 진정한 내 부모이며 가족이라고 여겼었다.

가증스러운 작자들.

그리고 그들이 이제 내 여자를 쥐고 흔들며 모욕하려고 한다.

“덕담이라니.”

왕이 피식 웃더니 피로연을 돌아보았다. 그러고는 어깨를 으쓱였다.

“왕의 결혼식보다 호사스러운 결혼식에 피로연을 하고 있는 새 신부에게 무슨 덕담을 해야 할지 모르겠군.”

“그게 어디 하스트레드 경의 뜻이겠습니까. 아시다시피 하스트레드 경이야 워낙 소박한 취향이지 않습니까. 이 호사스러운 것들은 아마도….”

왕비는 의미심장한 눈길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실리의 옆에 앉았다. 그리고 그녀의 손을 다정하게 잡으며 대꾸했다.

“예, 숙모님. 이토록 보석 같은 신부를 맞게 되었으니 세상에 그에 상응하는 예식과 피로연을 보이는 것은 당연지사지요. 신부가 마음에 드는 것만큼 의식으로 보여 주는 것이 그로스랜 남자들의 오랜 전통 아니겠습니까.”

나는 내 신부가 마음에 든 만큼의 호사스러움을 보였을 뿐이다. 왕이 너를 맞이할 때 그리하지 못하였다면 그만큼 마음에 들지 못했나 보지. 이런 의미가 담긴 나의 독설에 왕비의 눈이 새치름하게 가늘어졌다.

“여인은 안정도 중요한 법이랍니다. 금전을 함부로 여겨서는 안정은 멀리 달아나는 법이죠.”

“충고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전하. 저는 아직 안정을 생각할 만큼 궁핍하진 않지만 그런 상황에 처하게 되면 왕비 전하의 말씀을 꼭 마음에 새기도록 하겠습니다.”

비꼬는 말에 왕비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녀가 부채로 탕, 하고 테이블을 내려치며 뭐라고 하려는 순간이었다.

“새 신부와 산책 좀 해야겠습니다. 공기가 탁하군요.”

나는 대화를 끊어 버렸다. 그녀의 말을 들어 줄 생각이 없었다. 나의 입지가 아슬아슬하다고? 아니, 나도 그동안 정치에 대해 많이 배웠다. 나는 하스트레드의 배우자가 되었다. 하스트레드와 나는 이제 동맹이다. 대륙에서 가장 사납고 용맹한 기사단. 그리고 나의 금력. 이 둘이 합쳐진 이상 우리는 무시할 수 없는 강력한 세력이었다.

왕은 우리가 결혼하지 않기를 바랐다. 정확히는 실리가 영원히 혼자 지내기를 원했다. 그가 나와 실리를 약혼시킨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그것이 가장 컸을 것이다. 그는 대륙 최고의 신붓감이었던 실리를 어떻게든 독신으로 만들고 싶어 했다. 누구하고도 결혼하지 못하도록, 연합할 수 없도록 해야 했고 그때 열한 살인 내가 있었다. 열다섯 살 차이. 그건 쉽게 결혼할 수 없을 조건으로 보였고, 그래서 그는 겸사겸사 우리 둘을 약혼으로 묶었다.

그러나 우리는 결혼했다. 우리의 결혼식이 다가올수록 그는 눈에 띄게 초조해했다. 우리 둘이 진짜로 결혼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내가 거부하거나 실리가 반발하는 것이 그가 바라는 바였다. 사교계에서는 우리의 나이 차를 한껏 비꼬았다. 내가 너무 어린애라고 실리가 너무 나이가 많다고 우리는 비아냥거림의 대상이 되었다. 왕은 그걸 더 부추겼다. 우리가 세간의 이목 때문에 감히 결혼할 수 없도록.

하지만 우리는 결혼했다.

자, 이제 왕은 자신의 코밑에 호랑이를 키우게 됐다.

“전하.”

실리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나를 탓했다. 왕에게 너무 무례하다는 듯이. 하지만 나는 그녀의 허리를 안고 다정하게 귀에 속삭였다.

“발코니에 함께 가고 싶어.”

이런 파티에서 발코니로 나가자는 게 무슨 뜻인지 아는 실리가 당혹스러운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다 왕과 왕비 앞에서 벗어나기 위해 일단 나를 잡아끌었다. 나는 그녀에게 끌려 순순히 움직이면서 왕과 왕비에게 싸늘한 시선을 던졌다. 나를 죽이려고 했지. 내 여자를 모욕하려고 했지.

자, 이제 누가 이길지 두고 보자고.

실리는 나를 데리고 창가 쪽으로 오긴 했지만 발코니 창밖으로 나가진 않았다. 그녀는 커튼 근처에서 주변을 흘끗 본 다음에 나를 달래는 듯한 태도로 웃어 보였다. 그녀의 손이 내 뺨에 닿았다. 살살 쓸어내리는 손은 아주 다정했다. 그게 다였다. 하지만 나는 가늘게 한숨을 쉴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손이 내 성기를 쓸어내리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에. 도대체 왜 뺨을 만지는 것을 성기를 만지는 것으로 인식하는지는 나도 알 수가 없지만 여하간 그랬다.

내 얼굴이 어땠는지는 몰라도 실리는 덴 것처럼 놀라 손을 뗐다. 그리고 그녀는 난처한 얼굴로 피식 웃더니 고개를 기울이고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얼굴을 반쯤 머리카락이 가리고 있었지만 그녀의 웃는 눈은 분명하게 보였다.

“왜….”

그녀는 뒷말을 잇지 못하고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그 얼굴에는 당혹감과 함께 기쁨도 나타나 있었다. 그 기쁨이 기꺼웠다. 내가 그녀를 원하는 것을 그녀는 반가워했다. 그리고 그 반가움이 내게는 독 같은 행복이 되었다. 그녀는 내가 자길 원하기를 바라고 있다. 우리는 얼마나 서로를 원하는 관계인가.

아, 물론 내가 그녀를 훨씬 더 원하긴 하지만.

“전하.”

그녀가 난처한 목소리로 나를 불러도 나는 꿋꿋하게 그녀를 커튼 뒤로 이끌었다. 결국 그녀가 커튼 뒤로 끌려 들어왔다. 아무도 보지 못하는 곳에서 그녀의 입술에 키스하며 손을 뒤로 돌려 발코니 문을 열었다.

발코니 문이 달칵하고 닫히는 소리가 났을 때 그녀가 혀를 내밀었다. 고개를 뒤로 빼서 그녀가 혀를 빼 물고 있는 모습을 감상했다. 늘 단정하기만 한 그녀였지만 요즘 그녀는 혀를 빨리는 걸 좋아해서 종종 내 입에 자신의 혀를 밀어 넣었다. 그리고 내가 정성스레 빨아 주면 응, 응, 하고 소리 내며 허리를 들썩였다.

내가 감상하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그녀는 수치심에 뺨을 붉힐 뿐 내민 혀를 감추진 않았다. 나를 원한다고 말해 주는 솔직함이 좋았다. 하긴, 내가 그녀의 어떤 점을 싫어하겠냐마는.

그녀의 목을 쓸면서 드레스 안쪽의 피부를 상상했다. 매일 밤 만졌는데도 만질 때마다 눈물이 울컥 치밀어 오르는 기분이 드는 건 왜일까. 그저 관계일 뿐일 텐데, 사람들은 섹스는 하다 보면 시들해지는 것이라고 했는데 나는 할수록 정신을 못 차리겠다. 실리의 이런 모습은 나만 알고 있어서, 나의 이런 밑바닥을 보여 주는 상대는 그녀뿐이라서, 일견 공범자가 되는 것 같은 감각이 황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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